〈 76화 〉 순애보 (1)
* * *
세이브리스 백작령의 성 앞 마을.
마을의 정식 명칭은 브라우닐.
이 마을은 그저 평범한 마을들 중 하나였지만, 어느 순간을 맞이함으로써,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게 될 정도로 유명한 마을의 반열에 오른다.
세이브리스의 영웅, 핏빛 칼날 레이.
12살 이되었을 때, 20의 오크를 혼자서 무찌름으로써 그녀의 명성이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많은 무력단체와 길드, 귀족가들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한 그녀는 더욱더 빠르고 강렬하게 그들의 뇌리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전장에 피어난 한송이의 장미.
백전불패, 역전의 영웅.
날개를 잃은 천사.
제국 제일 미녀.
순결함과 고결함.
레이를 노래하는 바드들의 가사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표현들이었다.
레이는 이 시대상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미인이다.
그 외모는 황태자조차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을 상대로도 절대 꺾이지 않는 강인함을 지녔으며 욕심이 없고 남에게 자신의 것을 베푸는 걸 꺼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레이에게는 또 다른 칭호가 존재한다.
어느 날이었다.
한 모험가가 레이에게 지금까지 몇 번의 청혼을 받은 거 같냐고 물었었다.
그리고 레이는 답했다.
천 번은 넘은 거 같다고.
아주 약간의 과장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 이후로 일천의 여인이라는 칭호가 생겨났다.
많은 모험가들과 귀족가의 자제들이 레이를 원해 끊임없이 구애하고 청혼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레이는 그 상대가 누구든 간에, 항상 똑같은 말로 거절했다.
이미 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의 순결한 마음과 사람은 뭇 여성들의 선망이 되었다.
또한 순애보적인 모습은 뭇 남성들의 소유욕을 더욱 강하게 자극하게 만들었다.
“아니, 별로 안 기다렸어.”
오래 기다렸나는 레이의 질문의 강현이 답했다.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눈빛은 언제가 자신감이 느껴져 왔다.
긴 속눈썹과 오뚝한 코와 같은 오밀조밀한 이목구미는 마치 한 장의 예술품 같아 그 깊이를 항유하기 위해 오랫동안 감상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길 때면 주변에 있던 많은 남성들의 숨을 이따금씩 멎게 만들었다.
레이와 함께 생활한 지 어언 1년.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레이는 무려 100회가량의 고백과 청혼을 받았다.
다만 세이브리스 모험가 길드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길드원 서로를 가족이라 생각하는 그들은, 오히려 레이의 사랑을 잘 알고 있는 만큼 그녀를 지켜주었지.
“미안해요, 메르시를 달래주고 오느라.”
레이, 엘리스, 아멜리아, 아리아, 라비.
강현은 자신과 연이 있는 여인들 중에, 다른 애들에겐 미안하지만 레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레이 1등.
나머지는 공동 2등.
물론 각자만의 개성과 성격이 뚜렷한 만큼, 각각의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외모로만 따져도 그렇게 큰 차이는 나지 않지만.
“괜찮아, 너도 여러모로 고생이 많네.”
기죽은 표정을 지은 채, 레이가 말할 때면 절로 마음의 무장이 해제된다.
“….”
그런 모습을 본 다른 여인들은 레이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을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강현과 가장 가까우며 위험한 여인이었기에.
“다들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그런 그녀들의 시선을 가볍게 받으며 레이가 답했다.
하지만 다른 여인들의 바라보는 레이의 시선도 그리 고운 것은 아니었다.
호시탐탐 정실의 자리를 위협하는 위험요소들.
3명 모두 레이의 적이었다.
“그럼 다들 모였으니까, 어서 출발해요.”
아리아가 말했다.
평소처럼 밝은 표정을 지은 채, 강현에게 팔짱을 끼며.
하지만 그녀의 시선을 레이에게 향해 있었다.
뭐가 됐든, 순순히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뜻이었다.
아리아는 의도적으로 강현의 팔을 가슴 사이로 끌어당겼다.
“으, 응. 가자.”
5명의 연인들 중, 1등에 빛나는 거유인 아리아의 가슴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팔을 둘러싼 부드러운 감촉에 당황한 강현은 아리아의 말에 답하고 팔을 빼내려고 했다.
다른 연인들의 차가운 시선이 불편했기에.
하지만 아리아는 안된다는 듯, 강현의 팔을 더 꽉 끌어안았다.
“….”
그리고는 어둡게 가라앉은 시선을 강현에게 보냈다.
그녀의 한기가 인 시선에 강현은 팔을 빼내길 포기했다.
싫진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가슴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
강현은 모험가의 신분으로 생활하며 여러 의뢰들을 수행하고 있다.
실전 경험과 인맥을 넓히기엔 모험가 생활이 딱이더라.
오늘도 여인들과 함께 길드에서 나온 이유는 의뢰를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세이브리스 백장령, 변방에 위치한 작은 마을.
그 마을은 근처에 단단하고 질 좋은 나무들이 무성하게 솟아있기로 유명한 숲이 존재하고 있다.
숲의 나무를 베어다가 가공하여 여러 가구들을 만드는 것은 마을의 주된 수입원으로 삼고 있다.
산에서 내려온 몬스터가 숲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몇몇의 마을 남자들은 이미 인명피해를 입은 상황.
강현은 그 의뢰를 선택하여 해결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의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1박 2일이라는 시간을 소모하여 오거를 처치했고 다시 길드로 되돌아왔다.
곧장 접수창구에 들려 메르시에게 의뢰 완수를 보고하고 레이와 강현, 단 둘이서 길드장실로 향했다.
아니 검의 형태로 변환 엘리스까지 해서 총 셋.
요즘따라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몬스터의 양이 부쩍 늘었다.
산에서 내려와 숲에서 활개 치던 오거의 숫자는 무려 다섯.
절대 간과할 일은 아니었기에 요한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음음, 그렇구나. 수고 많았어. 이건 황실이랑 모험가 연합에 따로 보고 올려둘게.”
진지하게 말을 듣던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가끔씩 그가 보여주는 진지한 분위기는 정말 같은 사람이 맞기나 한 건인지 착각이 들곤 했다.
평소엔 가벼운 성격이더라도, 진지할 땐 한없이 진지한 인물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서려 할 때.
쾅!
길드장실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밖에 없다.
세이브리스 모험가 길드의 서열 2위.
실무담당자, 메르시였다.
분명 30분 전까지만 해도 밝은 표정이었던 메르시는 분노에 차, 얼굴을 일 그러 뜨리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다.
진짜 큰 문제가 생겼거나, 요한이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거나.
“요한.”
“으, 응…? 무슨 일이야?”
“제가 방금 또 이상한 말은 들었거든요. 어젯밤에 잠깐 나갔다 온다면서 어디 다녀왔어요?”
메르시의 질문에 요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
강현과 레이의 시선이 요한으로 향했다.
물론 요한이 그럴 남자는 아니었지만.
“그, 그런 거 아니야. 잠깐 만날 사람이 있어서 나갔다 온 거니까.”
그렇구나.
강현과 레이는 살짝 안심할 수 있었다.
“그…, 일단 나가줄래? 메르시랑 얘기를 해야 할 거 같아서.”
“네.”
강현과 레이는 곧장 길드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시가 길드장 실 안에서 뛰쳐나왔다.
“제가 그렇게 별로예요?!”
“아, 아니 메르시 일단 진정을 좀….”
“놔요. 당신은 항상 그런 식이에요. 아무것도 몰라주고!”
요한의 손을 뿌리친 메르시는 곧장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들려오는 소리로 추론해봤을 때, 아마 길드 밖으로 나가는 듯했다.
“….”
“….”
요한과 어색하게 시선이 마주쳤다.
“하하, 별 일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억지로 표정을 밝힌 요한이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요한, 이번엔 또 뭐예요.”
“그게…,”
“아니, 뭐든 상관없어요. 요한의 잘못일 테니까.”
요한의 말을 끊은 레이가 말했다.
요한은 그녀의 행동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레이는 요한에게 감사하고 있다.
요한을 자신의 아버지로 여기고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이렇게 요한과 메르시가 싸울 때면 요한이 미워진다 하더라.
“레이, 진정해…. 그 요한 씨, 혹시 어제 여자 소개받으신 거예요?”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강현도 속이 터지는 것 같았다.
다른 부분에 관해선 몰라도, 요한은 이성의 마음에 관해선 전혀 눈치가 없다.
세이브리스 길드의 모험가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아는 사실.
강현은 요한이 메르시의 마음을 눈치채 주길 바랬다.
그 편이 더 깔끔할 테니까.
하지만 옆에서 보고 있자면 답답해 죽겠다.
메르시의 눈빛만 봐도 요한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강현의 입장에서는.
“이만 가봐.”
강현이 뭔가를 말하지 말지 고민하던 중, 요한이 말했다.
힘없는 미소를 지은 그는 어째선지 조금 괴로워 보였다.
“내일 아침이면 돌아오겠지. 그때 내가 잘 달래볼 테니까.”
“… 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강현은 요한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레이를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강현 씨, 정말 그대로 둬도 괜찮을까요?”
그러던 중, 레이가 물었다.
“그냥 두는 게 맞지, 메르시는 요한이 스스로 눈치채 주길 바라고 있잖아, 괜히 우리가 요한보고 메르시의 감정을 설명해줘도 별 소용없을걸.”
애초에 예의도 아니고.
강현은 말을 덧붙였다.
“… 알겠어요.”
석연찮은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레이가 답했다.
옛날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조급해지고 감정적으로 변하는 메르시가 안쓰러웠으며 위태로워 보였기에.
그리고 다음날, 남자들은 틀렸다.
아침이 돼도 메르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메르시를 찾으러 나선 모험가는 그녀의 흔적이 산 앞에서 끊겼다고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