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세이브리스 (2)
* * *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훈련이 끝난 뒤, 강현에게 수건과 수통을 건네며 레이가 말했다.
은은한 달빛을 등 뒤에 달아둔 레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이 아름다웠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절로 행복해지고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실 정도로.
“고마워.”
레이가 건네준 수건으로 땀을 닦고 수통으로 마른 목을 축였다.
“뭘요.”
싱긋 웃으며 레이가 답했다.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미소에 강현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서로의 얼굴만 봐도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강현과 레이의 관계는 어느새 그만큼이나 가까워졌다.
그렇게 좋아요?
강현의 머릿속에서 엘리스의 볼맨 소리가 들려왔다.
질투가 난 걸까.
엘리스, 너도 고생 많았어. 항상 도와줘서 고마워
엘리스도 검으로써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줬다.
검의 용도뿐만이 아닌, 생력의 제어를 보조해주는 입장으로써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강현은 평소처럼 훈련이 끝난 뒤, 엘리스에게 진심 어린 감사인사를 전했다.
뭐…, 좋아요.
강현은 만족스러움의 감정을 느꼈다.
∴
“흐으음….”
훈련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온 강현은 장부를 살펴보고 있었다.
지난 한 달간 황실 상단에게서부터 밭은 판매대금은 총 백금화 1 닢.
포션과 영약, 각종 질병을 치료해주는 약으로 인한 수입.
포션이야 어느 정도 상용화되었다곤 하나, 신체능력을 영구적으로 강화시켜주는 영약은 아직 귀하기 귀하다.
그런 강현은 다른 약들에 비해 시간이 조금 더 걸릴지 언정, 원하는 만큼 영약을 제조할 수 있었으며, 같은 가격 대비, 훨씬 뛰어난 효능을 자랑하고 있었다.
현재 강현의 총자산은 백금화 8닢과 약간의 금화.
그중 1닢은 황녀를 치유해준 보상으로 황실에게 받은 포상금이었다.
원래였다면 더 받을 수도 있었지만, 강현이 거부했다.
브로치도 받았고, 너무 많이 받으면 황실에 지어둔 빚이 감소할 뿐이니까.
또한 제약에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면 훨씬 더 많은 자산을 모을 수 있을 거다.
의약 성인이자 약제학 명장인 강현이기에.
‘이 정도면 자금은 충분해.’
하지만 강현은 현재로 만족하고 있었다.
검술과 마법을 훈련해야 하며, 지금의 수입으로도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없었으니까.
‘레이 관련해서는 대충….’
강현은 주판을 튕겼다.
현재 레이가 기부하고 있는 고아원과 학교의 개수는 총 21군데.
한 달 평균 은화 50닢과 금화 1닢 사이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강현은 레이를 고용하기로 했다.
고아원과 학교에 관한 기부금 전액을 자신이 고용비로 지불하기로 했고.
‘대충 월당 금화 15닢 정도인가.’
분명 레이와 처음 재회했을 때만 해도 5개라고 했는데.
지출이 늘어났음에도 강현은 오히려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금전에 관해선 강현은 절대적인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황실에서 말해준 생력 포션의 예상 낙찰가가 최소 백금화
사람들을 돕겠다는 신념을 지니고 살아온 강현으로선 오히려 뿌듯할 따름이었다.
‘그 외 지출은….’
많아봐야 월당 금화 10닢과 은화 30닢 정도.
그중 금화 10닢은 약 제조를 위한 재료와 도구 값이었다.
남은 건 은화 30닢
사치와 고급에는 별 관심이 없는 강현이었기에 기본적인 생활비만 필요했다.
사실 이 정도도 평민치고는 꽤 많은 편이다.
연애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이제 쓸만한 사람들을 모아야 하는데….”
강현은 자신의 세력을 일구기 위해 자본금을 모아 왔다.
충분한 자본이 모인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건 어떠한 분야에서는 뛰어난 실력을 지닌 사람이다.
가능하면 전투나 약제학에 능한 사람이면 좋겠지.
전투에 능한 사람들을 모아서 파밀리아 같은 느낌으로.
길드는 모험가 길드가 있고 용병단이라고 하기엔 외주를 받지 않을 예정이니까.
약제학에 능한 사람들은 제조법을 전수해줘서 일종의 제약회사를 만들 생각이다.
계획은 충분했다 하지만.
‘견제가 너무 심해.’
여러 세력들에서부터 견제가 심하다.
푸스탄트의 뒤를 잇고, 의약성인이란 명예를 전 대륙에 떨친 강현인 만큼 저절로 높은 정치적 입지와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물론 장점이라곤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강현을 탐탁지 못하는 세력들이 더러 존재했다.
권위주의에 빠져 평민을 인정하지 못하는 일부 귀족들이나 약을 팔아먹고 사는 장사치들 같은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렇다곤 하나 그렇게 위협적이진 않다.
그들보다 호의적인 세력이 훨씬 거대했으니.
‘견제보다는 내 욕심이 문제인가.’
아마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욕심 이리라, 강현은 생각했다.
푸스탄트는 강현의 재능이 자신을 뛰어넘는다고 인정했다.
그런 만큼 강현 또한 자신의 재능을 인지하고 있다.
7 위계, 현자의 경지라고 칭송받는 마법사들의 경지.
마법을 수련하기 시작하고 어느덧 13년이 흘러 19살이 된 강현은 어느덧 그 경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또한 소드마스터의 칭호를 얻기 위한 조건, 검기.
강현은 성국으로 가 아리아를 만나기 전부터 검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엔 검술 실력이 완전치 않았지만 지금은 수호의 검을 마스터하고 핏빛 칼날을 수련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주변엔 전부 재능이 넘치는 사람들밖에 없다.
강현이 22살일 때, 검성을 쓰려뜨렸다는 검귀 레이.
검신 엘리스.
19살의 나이에 3 서클을 달성한 것으로 모자라, 제국 내에서 명석하기로 소문난 아멜리아.
정령을 부리는 정렴 검사, 엘프 라비.
성녀 아리아까지.
높아질 대로 높아진 강현의 눈높이는 만족스러운 사람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잠시 동안 고민해본 강현은 너무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은 많다.
대륙에 존재하는 사람들 또한 많고.
언젠가 괜찮은 사람이 분명 나타나 주겠지.
“주인님, 뭐해요?”
엘리스의 달콤한 목소리가 강현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장부 봐, 월말이니까.”
“흐응…, 그래요?”
강현이 앉은 책상 위에 올려진 장부를 대충 훑어본 엘리스는 곧장 흥미를 거두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검술에 관해선 그 누구보다 박식하지만, 숫자와는 영 거리가 멀었다.
“거의 다 끝났어.”
원래였다면 이제부터 여러 가지 세금들을 계산해야 하지만, 황실의 브로치를 수여받은 자는 대부분의 세금에서 면제된다.
장부 확인이 끝난 뒤, 강현은 굳은 몸을 풀기 위해 잠시 기지개를 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엘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엘리스를 본 강현은 잠시 감탄했다.
하늘하늘한, 소위 여신 머리라고 불리는 머리스타일은 엘리스와 잘 어울리는 만큼, 그녀의 외모를 부각해 주었다.
잔잔한 눈동자와 살짝 올라간 눈매.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은 말 그대로 여신 그 자체였다.
그런 엘리스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은근한 눈빛을 보낼 때면 강현은 절로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서서 뭐해요, 이리 와요.”
엘리스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고 그제야 움직인 강현은 엘리스의 옆에 앉아 잠을 청했다.
∴
다음날 아침, 모험가 길드는 아침 시간 때만 되면 정신없기 그지없었다.
부산히 움직이는 모험가들은 게시판을 살펴보며 적당한 의뢰를 탐색하기 시작했고, 그중 동시에 같은 의뢰서를 붙잡는 바람에 크고 작은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매일 아침마다 반복되는 풍경 중 하나일 뿐이고, 보통 멱살만 잡다가 주먹 몇 번 휘두르고 끝난다.
처음엔 그 광경을 보고 당황한 강현이었으나, 이젠 별 감흥이 없었다.
어차피 큰 싸움으로 번지지도 않고, 기본적으로 모험가 길드의 모험가들은 서로에게 동료애를 가지고 있었으니.
“아, 강현 씨, 일어나셨어요?”
점수 창구와 게시판 사이에 배치된 테이블 사이에 앉아있던 아리아가 강현을 발견하고는 총총 걸어왔다.
여느 때처럼 열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는 아리아는 아름다웠다.
묶어 올린 포니테일은 앳된 귀여움이 느껴져 왔으며,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가슴은 그녀의 성숙함을 여지없이 뽐내고 있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땐, 가슴이 거의 없었는데.
아리아의 가슴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걸 직관한 강현으로써는 절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신성력은 모성이 넘쳐 보이는 저 두 개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응. 일찍 일어났네.”
“좋은 아침.”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라비가 건조하게 인사를 건넸다.
별 관심 없다는 듯, 다른 곳을 쳐다보며 인사하는 라비에게 강현은 살짝 서운했지만, 그녀의 성격이 원래 저런 걸 어떻겠는가.
눈매가 살짝 올라가 날카로운 인상의 미인.
약간의 녹색이 섞인 아름다운 백발의 생머리.
엘프인 주제에 나올 곳이 나오고, 들어갈 곳이 나온 육감적인 몸매의 라비를 볼 때면 사무복이 잘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곧장 들곤 했다.
강현도 남자고,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는 만큼, 그런 라비의 시큰둥하고 차가운 성격은 오히려 그녀의 외모와 더욱 잘 어우러져 하나의 매력으로 느끼며 꽤 좋아했다.
“라비도 좋은 아침, 응? 목걸이 바꿨네?”
인사를 건네던 중, 라비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가 바뀐 것을 눈치챈 강현이 말했다.
꽤 익숙한 디자인의 목걸이는 정령의 축복이 담긴 반지를 받았던 강현이 보답으로 줬었던 목걸이였다.
기껏 선물해줬는데 잘 쓰질 않아서 서운했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든 걸까.
“뭐, 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고른 거거든?”
“누가 뭐래?”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발끈하는 라비의 모습에 살짝 어이가 없었던 강현이 말했다.
“그냥 잘 어울린다고, 모델이 좋아서 그런지 목걸이에서 빛이 나네.”
강현은 적당한 침대를 입에 담았다.
그러자 더욱 얼굴을 붉힌 라비가 고개를 획 돌리며 말했다.
“시, 시끄러!”
그저 귀여울 따름이었다.
“강현 씨.”
곧바로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저는요?”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살짝 들어 올린 아리아가 물었다.
“저도 라비랑 또 같이 강현 씨가 주신 목걸이를 골랐는데.”
“자, 잘 어울려.”
갑자기 섬뜩해진 아리아의 반응에 당황한 강현이 곧장 대답했다.
“겨우?”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아리아의 말이 짧아졌다.
처음엔 분명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갑자기 흑화 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원래부터 어딘가 이상하긴 했었지만
아리아가 원하는 대답이 뭘까, 잠시 고민한 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쁘네, 아리아는 특히 머리색이랑 잘 어울리는 거 같아서.”
“…, 후후. 강현님도 차암…, 부끄럽잖아요. 오늘도 강현 씨는 평소처럼 근사하시네요.”
대답을 들은 아리아는 다시 밝은 분위기로 돌아와 수줍어하며 대답했고, 강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무서운 거지.
자신이 사실 겁이 많은 성격이 아닐까, 강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주인님, 저도 솔직히 조금 무서우니까 걱정 마요.
그 대답에 강현은 안심했다.
“강현 씨, 오래 기다리셨어요?”
마지막으로 한껏 레이가 도착했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도착하는 법.
레이는 여유롭게 웃으며 강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에게 달라붙은 다른 여자들의 시선을 가볍게 받아들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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