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세이브리스 (1)
* * *
To. 사랑하는 나의 제자, 이강현에게.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구나.
이따금 씩 너와 함께 세계를 거닐던 나날들이 그리워지더구나.
항상 내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던 덕에 지루할 틈이 없는 즐거운 여행이었지.
이렇게 떨어져 지난 세월을 그리워할수록, 그 기억들은 점점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 되어가더구나.
사람을 사람으로서 있게 해주는 것은 기억이다.
강현이 네가 자주 했던 말이었지.
어쩌면 이 스승은 더더욱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구나.
이렇게 시간은 무심한듯하면서도 상냥하니, 흘러 나는 세월이 야속해도 이런 것들 때문에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거겠지.
여행길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한 마을을 들렸을 때였단다.
나는 한 아낙네에게 큰 뜻을 배우게 되었단다.
피곤한 기색이 짙게 깔려있지만 강인함이 절절히 느껴지는 눈동자와 책임감을 짊어져서인지 굽어있는 허리가 인상적이었지.
지금 이 순간에, 제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이거죠.
밭일을 나갈 남편과 뛰어놀 아들을 위한 옷을 빠는 게.
여러 종류의 옷들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옆에 두고 하천에 앉아 옷을 빨고 있었을 때였다.
그 아낙네가 즐겁다는 듯이 말했지.
가볍게 들었던 말이었으나, 그날 밤 숙소로 돌아가 눈을 붙이려 하는 데 그 아낙네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더구나.
재밌지 않느냐.
고작 빨래를 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니.
하지만 그 말에 담긴 깊은 뜻은 쉬이 여길 것이 아니더구나.
사람은 매 순간 자신의 위치에 따른 역할을 짊어지고 살지 않더냐.
그런 만큼 자신에겐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 그 누군가에는 그저 그런 시덥 잖은 일이 될 수도 있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별 볼 일 없고 의미 없는 일이라 할 지라도 최선을 다하고 중히 여기는 모습은 존경받아 마땅하더구나.
하나의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강현이 너는 어떠하냐.
들려오는 풍문에 의하면 정식 공방을 차려 여러 가지 약들을 팔고 있다 들었느니라.
네 일을 중요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좋겠다.
스승에게 잘 배우고 착실한 제자인 너인 만큼 신뢰하고 있지만, 아직 너를 가르쳐주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거 같구나.
나이가 들면 주책이라고 하던데, 영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야.
어느새 선선한 가을이 지나고 차가운 겨울이 찾아오더구나.
가벼웠던 복장을 조금 더 무겁게 할 필요가 있겠지.
편지가 길어졌구나.
이만 여기서 마치겠다.
조만간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꾸나.
추신, 하우로스 백작가는 별 문제없어 보이더구나. 백성들의 표정에는 활기가 넘쳐나고 영애의 덕과 인망을 칭송했었지. 아무래도 영애의 폭주는 외부의 개입이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From, 푸스탄트로부터.
칼리우스력 82년. 8월 1일에.
∴
‘이 할배가 진짜.’
아침을 맞이해,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하려던 강현은 통신 스크롤에서 느껴지는 마나에 황급히 내용을 확인해봤다.
스크롤에 적힌 편지 내용을 본 강현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씻으려 했던 것도 있고, 곧장 책상에 앉은 강현은 깃털에 잉크를 묻혀 내용을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To. 1년에 한 번 연락하는 친애하는 나의 스승, 할배에게’로 시작된 답장은 근황에 관한 짧은 이야기가 끝난 뒤, 연락이 드문 푸스탄트를 질책하는 내용이었다.
어느덧 푸스탄트가 여행길에 오른 후, 2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강현은 19살이 되었고 20살이 되기까지 2개월을 남기고 있었다.
‘추신, 연락 좀 자주 하라고. 할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로 편지를 끝낸 강현은 통신 스크롤에 약간의 마나를 불어넣었고 잉크로 적은 글씨들이 사라졌다.
똑똑똑.
그와 동시에 밖에서부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강현 씨, 저예요. 일어나셨나요?”
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정체는 레이였다.
∴
푸스탄트가 여행의 끝을 고한 뒤, 강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그는 곧장 루이스플 공작가에 방문했다.
직접 제작한 약과 포션, 영약들을 어디에 판매할까, 고민해본 뒤, 루이스플 공작가에 판매하기로 했다.
루이스플 공작가는 다른 상점과 상단, 귀족가들에 비해 비교적 높은 갚을 치르고 포션을 구매해줄 거라 생각했기에.
전생에서 레이를 치료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했을 때, 루이스플 공작가에게 포션들을 판매했다.
역시나 이번 생에서도 비교적 높은 가격을 쳐주었고 강현은 금전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종류, 같은 등급의 포션이라도 효과가 아득히 뛰어난 만큼 같은 재료로도 더욱 높은 이윤을 남길 수 있었으니.
거기에 더해, 황실에서 배정해준 운반단의 역할이 꽤 컸다.
그렇게 년도가 바뀌고 18살이 된 강현은 곧장 모험가 길드, 세이브리스 지부로 향했다.
모험가 일을 겸업함으로써 몬스터들을 상대로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서, 그리고 레이와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강현은 수호의 검을 완벽히 익힘으로써, 신살자의 검의 새로운 기능을 해금했다.
다섯 번째 능력, 검술의 기억.
사람을 벨 수 없으며 다른 검술을 익힐 수 없다는 속박이 영혼에 걸린 탓에 강현은 다른 검술을 배울 수 없었다.
하지만 검술의 기억이란 능력은 강현이 아닌 검이 직접 검술을 습득해둔 뒤, 필요할 때마다 육체와 영혼에 새겨진 검술과 교체할 수 있어진다.
정확한 원리를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충 이런 느낌이라고 강현은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새롭게 익힐 검술을 생각하던 중, 강현은 레이를 떠올렸다.
검성조차 능가해 대륙 제일 검이자 검귀라고 불렸던 레이의 검술.
두 번째 검술로 택하기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곧장 세이브리스로 와, 모험가로 등록한 뒤 레이와 함께 생활 중이었다.
검인 엘리스는 당연하고, 아리아와 라비까지 함께 왔지만.
“괜찮으세요?”
“으응…, 생력을 사용한다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네.”
레이의 검술에는 정확한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다.
뛰어난 재능과 타고난 레이의 전투 센스를 검술이라는 구격에 맞게끔 정형화했을 뿐이었기에.
대충 지은 임시 명칭으로는 핓빗 칼날이란 이름이 존재하긴 했다.
핏빛 칼날은 지킨다는 것에 의의를 둔 최강의 방패인 수호의 검과 달리, 오로지 적을 베어내 승리를 거머쥐겠다는 것에 모든 뜻을 둔 검술이었다.
그 검술을 사용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능력은 생력의 제어.
마나로 형성된 검기가 아닌 생력을 사용한 검기를 형성시키는 것이 핏빛 칼날의 제1장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강현이라 할 지라도 생력을 제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흡수할 수 있는 마나와는 다르다.
생력은 한번 방출한 다시 체내로 흡수하는 건 절망적인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고 마나처럼 자연에서 흡수할 수도 없다.
아주 천천히 회복되는 생력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은 생력 포션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지만, 제어는 해결할 수 없었다.
마치 폭발하는 불꽃같은 생력은 도통 생각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혹시 마나 흡수를 수련할 때처럼 내면세계의 드래건이 방해하는 건가 싶어 내면세계도 다녀와 봤으나 얻을 수 있었던 건 내 역량 부족이란 사실을 깨닫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빠르신 거예요. 어느새 검날에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잖아요.”
“뭐…, 그런 긴 한데 이걸 내 능력이라고 해야 할지.”
미미한 붉은 기운이 돌긴 한다.
1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 치고는 충분한 성장이었으나, 강현은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냈다고 선뜻 말할 수가 없었다.
“엘리스 덕에 가능한 거니까.”
검의 형태인 엘리스가 직접 생력을 받아준 뒤, 제어를 도와준다.
그게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강현의 대답을 들은 레이는 싱긋,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엘리스 님의 덕도 있겠지만, 강현 씨라서 가능한 거예요, 저도 검에 붉은 기운을 담기까지 5년이나 걸렸었어요, 직접 해보셔서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아시잖아요.”
따사로운 봄날의 햇살 같은 레이의 말에 강현은 조금 감동했다.
“고마워. 끄응…, 다시 시작할까?”
“좋아요.”
연무장의 의자에서 일어난 강현이 말했고 레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어! 잘하고 있냐!”
그때 멀리서부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렁찬 목소리에는 기백이 담겨 있지만 특유의 가벼움이 느껴지는 억양.
모험가 길드, 세이브리스 지부의 길드장 요한 윌이었다.
시간을 생각해보면 업무를 보고 있어야 할 텐데.
또 메르시와 싸운 모양이네.
강현과 레이가 동시에 생각했다.
“오셨습니까, 요한 님.”
강현은 그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응, 그래.”
요한은 강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 없게 요한 님이 뭐냐, 그냥 편하게 장인어른이라고 부르라니까.”
하나도 안 편한데, 강현이 생각했다.
검에서부터 엘리스의 강렬한 언짢음이 느껴져왔다.
“요한!”
레이가 소리 높여 외치자 크크, 작게 웃으며 요한이 장난이라 말했다.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세요?”
“그냥 심심해서 들려봤지, 오붓한 시간을 방해해 버렸나?”
장난스러운 어조로 요한이 말했다.
어찌 보면 경박하다고도 볼 수 있었지만, 듣는 이에게 주는 특유의 편안함은 그 경박함을 친근함으로 바꿔주기 충분했다.
“또 메르시랑 싸웠겠죠.”
레이의 일침에 요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곡이 찔린 모양이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에요?”
“무, 무슨 일은. 우리가 왜 싸워. 그거 다 오해라니까?”
“그럼 길드 발전을 위한 의사교환이에요.”
레이는 요한이 이따금씩 메르시와 다툴 때마다 했던 변명을 입에 담았다.
“잘 알고 있네.”
비꼬는 말이었지만, 요한의 태도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흡족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뭐, 그래서 잘 되고는 있어?”
그리고 자연스러운 주제 전환까지.
레이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답답함은 강현도 느끼고 있었기에, 그 한숨에 공감이 갔다.
“솔직히 말하면 영 시원찮습니다.”
“뭐가 시원찮아, 그 정도면 충분하지. 나도 한 3년 하고 포기했는데. 너무 조급해하지 말하고.”
크크, 요한이 웃으며 말했다.
“뭐…, 그럼 내가 조언 하나 해줄까?”
강현의 반응이 시원찮아서일까.
요한이 입을 열었다.
“조언…, 네. 부탁드립니다.”
요한은 1년 내로 검성의 경지에 오른다.
검술에 있어서 만큼은 제국 최고(레이 제외).
그런 인물의 조언을 거부할 이유는 강현에게 전혀 없었다.
“열정이야.”
“… 네?”
“네가 항상 열심히 하는 모습은 열정적이라고 보기엔 충분한데, 뭐랄까…, 조금 불타오르는 게 없다고 해야 할까.”
괜히 기대했네.
강현은 생각했다.
“기백을 짊어진 채, 열정을 불태우라고.”
요한은 무슨 소년만화 같은 대사를 입에 담았다.
“길드장님! 메르시님이 찾으셔요!”
“…, 나 간다.”
그리고 길드원의 부름을 받고 멀어지는 그의 등에서는 딱히 사나이의 기백이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어린양이라고 할까.
“…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멋지신데. 계속할까?”
“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