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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겜 속 중간보스와 히로인들이 내게 집착함-72화 (72/148)

〈 72화 〉 모두가 잠든 밤 (3)

* * *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다.

강현은 현대에서나, 이 세계에서나 그 말을 자주 들어왔고, 그만큼 말해왔다.

레이와의 약속.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매 순간 점점 성숙해지며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가는 레이를 이따금씩 만날 때면 빨리 20살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렇기에 강현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레이와의 약속을 엘리스에게 말해주거나 관계를 맺거나.

일단 전자는 절대 안 된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상대에게 첫 관계는 다른 사람과 맺기로 했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또한 엘리스는 강현에게 귀속된 검이다.

그런 강현에게 있어서 엘리스와의 원만한 관계 유지는 필수였다.

어찌 됐든 평생을 함께하게 될 테니까.

그걸 떠나서 엘리스를 좋아하기도 했고.

하지만 후자도 안된다.

간절하게 말하던 레이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

강현은 이런 상황이 초래된 건, 어쨌거나 여지를 준 자신의 잘못이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현대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할 수 없는 쓰레기였다.

말 그대로 바람을 핀 거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강현은 현대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시간보다, 이 세계에서 더욱 오랜 시간을 보내왔다.

일부일처와 일부다처.

상극인 두 개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있는 두 세계에서 각각 25년, 31년을 보냈기에 두둘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레이와 엘리스도 일부다처에 관해서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고 있었기에 첫 번째의 자리를 두고 경쟁해왔고.

‘결국 한번 정돈 있었어야 했던 일이야.’

엘리스의 날이 갈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유혹해오기 시작했고, 이따금 씩 슬퍼하고 불안해하던 그녀를 그냥 둘 수도 없었기에.

마침 오늘은 아예 작정을 한 모양이고.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지금까지 조급해하던 엘리스를 위로해주고, 솔직한 마음을 전하겠다고.

‘좋아.’

이제 이 상황을 마무리 지으면 된다.

“흐읏, 하아…, 흐으읏….”

옅은 신음소리와 간헐적으로 떨리는 몸.

몽롱하게 풀린 눈, 균열 사이로 흘러나와 침대를 적시고 있는 엘리스의 애액까지.

전부 아직 엘리스가 절정의 여운에서부터 빠져나오지 못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다.

엘리스가 원하는 성관계를 어느 정도 맺음으로써 상황을 마무리 지을 기회.

“엘리스.”

강현이 엘리스의 옆에 누우며 말했다.

“네, 네에….”

혀에 힘이 풀린 것인지 살짝 엘리스의 말이 살짝 어눌했다.

“오늘 좋았어.”

물론 단 한 번도 사정하지 못했으나, 그럴싸한 마무리 멘트를 입에 담으며 엘리스를 끌어안았다.

“저, 저도요…. 흐읏….”

강현의 품에 안긴 엘리스가 답했다.

“지금까지 좋아한다는 말 못 해줘서 미안해.”

“알면…, 흣, 됐어요.”

“앞으로 잘 부탁할게. 오늘은 비록 여기서 끝내지만, 서로를 아끼는 만큼, 천천히, 여유롭게 다가가고 싶어. 솔직히 많이 참기 힘들지만 엘리스 네가 너무 소중하니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할 뿐인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약속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엘리스와 관계를 맺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충동적으로 관계를 맺고 싶진 않다.

엘리스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더니 가슴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걸까.

“정말요?”

“당연하지. 엘리스, 너도 내가 좋지?”

“….”

엘리스는 입으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네가 좋으니까 너무 조급해하고 서두를 필요 없어. 꼭 몸이나 외관이 아니더라도, 너를 좋아하는 이유는 충분하니까.”

“그게 뭔데요?”

슬슬 진정되기 시작한 걸까.

몸의 떨림이 사그라 지고 목소리로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항상 여러 가지로 생각해주고 도와주잖아, 훈련이든 일정이든. 조금 성적이기도 해서 곤란하긴 하지만 나 좋다고 감정 표현도 자주 해주고.”

“그런데 어떻게 안 좋아하겠어. 날 놀리고 나서 재밌다는 듯이 웃는 얼굴도, 그러다가 역으로 당해서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너무 예쁘고 귀여운데.”

“… 그래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또 어영부영 끝내려는 거예요?”

순간 흠칫했으나, 엘리스의 목소리는 따스했다.

불만에 찬 목소리가 아닌 어딘가 만족한 듯한 말투.

“응.”

“뭐…. 좋아요.”

엘리스가 고개를 들고는 싱긋, 웃었다.

“제가 너무 좋다니까, 한 번은 넘어가 드릴게요.”

얼굴을 쓰다듬으며 엘리스가 말했다.

평소처럼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지금은 이걸로 충분해.’

점점 조급해지고 불안했다.

강현은 자신의 마음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더욱 그를 유혹했다.

그가 자신을 덮치게 함으로써 관계에 대한 증거와 확신을 얻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강현은 진지하게 자신이 좋다고 말해줬다.

안기도 싶다는 개인 적인 욕망도 분명 있었지만, 그의 마음을 직접 입으로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낌 받는다는 감각도, 솔직히 나쁘지 않았다.

강렬한 성욕을 참아낼 정도로 성욕도 참아낼 정도로 자신과의 관계를 진지하고 소중히 여겨주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니까.

“그럼 저희 이제 사귀는 거죠?”

사귄다라.

딱히 그 부분에 관해선 따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쨌든 서로 좋다고 고백했으니까 연인관계가 된 거긴 하겠지.

“뭐…, 그렇지.”

“… 고마워요.”

“고맙긴 뭘,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알면서 왜 그랬어요.”

볼멘소리를 내며 말한 엘리스는 더욱 강하게 강현을 끌어안았다.

푸스탄트는 강현에게 거짓을 말했다.

이따금씩 찾아가는 고향의 핑계를 대고.

오랫동안 고민해봤다.

자신에게 원한을 지니고, 사람을 세뇌할 정도의 능력과 악행을 지닐 사람이 누가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 한 명을 제외하면 없었다.

고민 끝에 푸스탄트는 확인 해보기로 했다.

“이럴 수가….”

텅 비어있는 관의 내부를 보며 푸스탄트가 경악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황성에서 머물다가 집에 돌아와 잔 덕일까.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임에도, 특히 상쾌한 아침이었다.

아니, 엘리스의 일을 해결해서 일 수도 있다.

물론 완벽한 대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처음 겪는 상황 속을 완벽하게 대처할 수 없을 테니.

좋은 대처와 나쁜 대처를 나뉠 뿐.

‘잘 한 거겠지.’

그래도 강현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말했고 엘리스도 그에 동의해줬다.

조금 더 나은 대처가 분명 있겠지만, 상황이 무사히 종료된 것에 기뻐하기로 정했다.

어쨌든 아침이 밝은 만큼 하루의 일상을 시작해야만 한다.

오늘 할 일은 포션 제조와 마법 훈련.

강현은 침대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손에서부터 축축함을 느꼈다.

“응? 아….”

뭐지 싶었다가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흠흠….”

[4 위계 무속성 마법: 클린을 사용했습니다.]

강현은 곧장 클린을 사용했고 축축하게 젖어있던 침대는 다시 뽀송뽀송해졌다.

몸을 일으키고 욕실로 가 씻은 뒤, 거실로 나왔다.

“할배, 왔어?”

그리고 고향에서 돌아온 것인지 푸스탄트가 식탁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아주 잠깐 동안 심각해 보였는데, 기분 탓일까.

“그래, 좋은 아침이구나. 강현아.”

평소와 다름없는 푸스탄트의 인자한 미소에 강현은 기분 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응, 고향은 어땠어?”

“여전히 포도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더구나.”

“그래?”

강현은 푸스탄트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다른 애들은?”

“음, 성녀님과 라비는 시장에 다녀온다더구나, 엘리스는 씻고 있다.”

“그래? 밥은?”

“이미 먹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 줄 모르는 게냐.”

못 말리겠다는 듯이,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푸스탄트가 물었다.

“몇 신데?”

“12시가 넘었다.”

“뭐?”

강현은 곧장 시계를 바라봤다.

진짜 12시가 넘어 있었다.

이 세계로 온 뒤, 단 한 번도 낮잠을 잔 적이 없었는데.

황성과 엘리스의 일로 긴장이 너무 풀려버린 걸까, 강현은 살짝 반성했다.

“뭐,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니겠느냐. 피곤한 만큼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중요한 게야.”

“흐흐, 역시 그렇지?”

강현은 푸스탄트가 좋았다.

그와 대화할 때면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으니.

“그래, 강현아. 네가 이제 17살이 되었지 않느냐?”

“응? 뭐, 그렇지?”

갑작스러운 푸스탄트에 말에 잠시 의아해한 강현이 답했다.

“어느새 12년이나 흘렀구나, 강현이, 너와 처음 만났던 한 겨울이.”

“그러게. 내 입장에선 31년이지만.”

전생 전의 시간까지 합쳐서 푸스탄트와 만난 지 어느새 31년이나 흘렀다.

다시 생각해보니 엄청 긴 시간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항상 곁에서 의지되어준 푸스탄트.

갑자기 말로 들어서 일가.

뭔가 새로운 감회가 느껴져 왔다.

“나와 함께했던 세월은 어땠었느냐?”

푸스탄트가 읽고 있던 심문을 내려놓고 물었다.

“뭐…, 좋았지. 힘들긴 했지만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재밌었지.”

“끌끌, 고맙구나, 나도 네 덕분에 단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구나. 혼자 하는 여행이 이따금씩 외로웠었으니.”

길쭉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떠올리듯, 눈을 감은 푸스탄트.

그의 말에 서서히 불안감을 느낀 강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어디 갈 것처럼 얘기하네?”

“흐으음, 그래. 네 말이 틀리진 않았구나.”

“… 할배,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진지한 푸스탄트의 표정에 강현이 물었다.

그와 동시에 불안감이 느껴져 왔다.

“강현아, 나는 앞으로 긴 여행을 떠나게 될 거 같구나, 아주 오랫동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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