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황실의 포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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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강현은 황제가 앉은 옥좌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황제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가 고개 드는 것을 허락해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고개를 들라.”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고 황제를 바라봤다.
정말 저게 81살짜리 노인이 맞는가.
강현은 감탄했다.
꼿꼿하게 세워진 허리.
입은 의복 밑에서부터 보이는 근육.
강인한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중년의 나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다부지고 건강한 황제였다.
‘하긴 뭐, 초인이니까.’
자신의 육체에서 순환하는 마나를 깨닫고 수련한 이들에게 나이는 그저 허울에 불과하다.
당장 푸스탄트만 봐도 황제와 같은 81살인데 건강하지 않던가.
푸스탄트와 검술 대련을 할 때면 제정신 부여잡고 있기도 벅차다.
“황제 폐하의 존안을 뵙습니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느냐.”
위엄이 넘치는 자세로 황좌에 앉은 황제가 말했다.
“예, 아직 황제 폐하의 은총과 스승님의 은혜로 부족함 없이 지내왔습니다.”
“끌끌, 여전히 말 하나는 참 잘한단 말이지, 너는 옛날부터 그랬다. 어디가 애늙은이 같았단 말이지.”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황제, 칼리우스 페론티아 2세는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오랜만에 황성으로 찾아온 만큼 연회를 베풀고 지난날들의 회포를 풀고 싶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시종을 통해 들었겠지.”
“예, 황녀님께서 위독하시다 들었습니다.”
“그래, 할 수 있겠느냐.”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기 전까진 확답을 드릴 순 없겠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의약 성인(?藥?人)이란 과분한 호칭으로 불리는 몸, 제국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성심성의를 다하겠습니다.”
황제는 입에 발린 말은 극도로 싫어한다.
대륙을 호령하는 제국일지라도, 그 영광이 영원했던 것은 아니다.
현 황제의 아버지, 전대 황제.
그는 귀가 얇기로 유명했다.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간신들을 가까이했으며 세 치 혀에 놀아나 충신들을 멀리했다.
바야흐로 제국 암흑기의 도래였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칼리우스는 황제로 취임함과 동시에 제국을 몰락하게 만들고 부정부패를 일삼음으로써 자신들의 배들 불리던 간신들을 전부 숙청했다.
제국의 역사책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제국의 봄’.
그렇기에 황녀의 상태를 살펴보기도 전에 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건 괜히 황제의 신뢰를 잃는 짓이었다.
“그러냐, 그럼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으마, 치료에 성공한다면 막대한 보상을 내리겠노라.”
“예, 알겠습니다.”
“여봐라, 강현이를 릴리의 방으로 안내해주거라.”
∴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황실 기사단 5명의 감시를 받으며 제국의 황녀, 릴리의 안색을 살폈다.
창백해진 피부와 자색으로 물든 입술.
식은땀과 거친 호흡.
“네…. 흐읏…, 잘 부탁드릴게요….”
나긋나긋한 미성이 들려왔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릴리는 제대로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든 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뭐, 치료가 필요 없지만.’
강현은 자신의 약으로 황녀를 치료해준 것이 아니었다.
황성에는 뛰어난 실력을 지닌 의술사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황녀가 무슨 병에 걸린 지 조차 모른다고?
싶지어 치유 마법이면 암조차 치료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웃기지도 않는 얘기다.
그렇다면 뭐겠는가.
황녀의 병에 걸린 게 아니다.
황녀는 저주에 걸린 상태다.
하지만 그걸 곧장 알아차리는 모습을 보여줘 봤자 의심만 살뿐, 적당히 황녀, 릴리에게 수면제를 먹여준 뒤, 맥을 짚으며 문제를 찾는 시늉을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한 강현은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그들의 눈빛은 무슨 소리인지 묻고 있는 듯했다.
“황성에는 셋째가라면 서러울 의술사분들이 즐비해있지 않습니까.”
물론 첫째는 푸스탄트였다.
“예, 총 20명의 의술사가 황녀님을 치료해드리려 했으나 전부 실패했었습니다.”
한 기사가 말했다.
“왜 실패한 건지 알 거 같습니다. 황녀님께서 병을 앓고 계신 게 아닙니다. 제가 살펴본 바로는 그렇더군요.”
강현의 말에 기사들의 눈빛에 불신이 깃들었다.
다른 의술 사들도 같은 말을 했을 거다.
아무리 살펴봐도 황녀의 몸에 문제는 없었으니.
하지만 황녀는 생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증상을 겪고 있다.
그 증상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고.
강현에게 주어진 과제도 그 원인을 찾는 거였다.
“다른 의술 사들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당연하죠, 옥체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그럼 뭡니까, 치료가 불가능하단 말씀입니까?”
“예, 아픈 곳이 없으신데 어찌 치료하겠습니까.”
기사들이 어이없어하는 눈빛으로 강현을 바라봤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하지만 원인에 관해선 짐작 가는 바가 있군요. 혹시 저주에 관련된 검사를 한 적 있습니까?”
“예, 황녀님께선 저주에 걸린 상태가 아니십니다.”
“흐으음.”
고민하는 척하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있었다.
흑마법의 정수.
지정된 인물의 생력을 잡아먹는 아티팩트.
악신, ’켈투베루스의 반지’가 반지 진열대에 놓여있었다.
“스승님과 세계를 방랑하며 많은 것을 봐왔습니다. 본래, 흑마법의 저주는 대상에게 직접적으로만 걸 수 있었죠.”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 대상과 직접적인 신체적 접촉이 있어야만 저주를 걸기 위한 마나를 흘려보낼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흑마법은 탄압을 받아왔기에 다른 마법들에 비해 발전이 더뎠으나, 시간은 결국 모두에게 공평하다.
“그런데, 요즘엔 특수한 아티팩트를 이용하여 저주를 거는 경우도 있더군요.”
물론 거짓말이다.
그 정도까지 발전한 흑마법이 양지로 올라오는 건, 최소 10년 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황녀는 그 흑마법으로 인해 저주에 걸린 상태인데.
“저주가 아닌 이상, 황녀님의 생력이 사라지는 이유에 대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이 황녀님의 침실에 있는 모든 것들을 검사했음에도 저주에 관련된 것이 아예 나오지 않았던 겁니까?”
여전히 불신이 담긴 시선이었지만 기사들의 눈빛은 한층 더 진지해져 있었다.
“정확히는 황녀님만 검사를 받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능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성직자분을 불러주십시오. 제 말을 믿지 못하시더라도, 한번 시도해봐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
육각성
또는 육망성과 헥사그램이라 불리는 6명의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각자 제국 국정에 관련된 중책을 역임하고 있으며 하늘 밖의 하늘이란 뜻의 천외천이라 칭송받는 무력을 지니고 있다.
제국의 태양인 황제와 달인 황후의 뒤를 이어 의전서열의 3위부터 8위까지를 전부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은 제국의 별이라는 칭호를 수여받고, 위대한 6개의 별들이 모여 육각성을 이루게 된다.
“이야, 너 눈치가 좋은데?”
그리고 그 육각성의 장로들 중 항명인 록스 라우티가 강현의 어깨를 느른하게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잘했어, 덕분에 살았어, 황녀님 때문에 황제 폐하 기분이 매일 안 좋으셨거든.”
승리와 전투의 신, 베가를 섬기는 베가교의 교황이자 육각성의 서열 3위.
제국의 의전 서열 5위.
엄청난 인물임이 분명했으나, 성격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양쪽 귓불에 걸린 귀걸이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미는 그의 외모를 빛내주고 있었다.
여자 여럿 울리고 다닐 것 같은 외모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물론 별 관심은 없었지만 절대 가벼이 볼 상대가 아니다.
올해 35살이 된 그는 8 위계의 신성 마법을 사용한다.
또한 악신 숭배자들에게 황금의 철퇴를 휘둘러 죄인들을 회개(물리)시키기로 유명하니까.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흐으음, 그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록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별로 안 기쁜 모양인데, 그리고 말이야. 기사들이 불러와 왔을 때 처음 본 너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잘못짚으신 겁니다. 저주 말고는 가능성이 없었기에 확신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뭐….”
전생이나 지금이나 어딘가 기분 나쁜 사내인 건 여전했다.
그렇다고 강현이 록스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푸스탄트가 죽은 뒤, 힘이 되어준 사람 중 한 명이니까.
“지금은 그런 걸로 하자고.”
신탁을 떠올린 록스는 그저 지금을 즐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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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강현은 다시금 황제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흑마법이 그렇게 발전했을 줄이야, 내 실책이로구나.”
씁쓸하다는 듯이 황제가 말했다.
악신의 힘을 빌리는 만큼, 흑마법사들은 탄압당해야 마땅하고 황제는 각종 정책들과 군사력을 이용해 흑마법의 발전을 막아오고 있었다.
흑마법사들은 음지에 꼭꼭 숨어있다.
이 넓은 대륙 어디에 누가 흑마법사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번 일에는 네 덕이 컸다. 저주의 아티팩트를 파악한 공이 큰 만큼, 네게 약속한 보상을 내리겠느라.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거라.”
“일단 보상을 말씀드리게 앞서, 황제폐하게 바칠 물건이 있습니다.”
“음? 무엇이냐.”
“이겁니다.”
강현은 생각해봤다.
이 정도로 충분할까.
아니 부족해도 한참이나 부족했다.
전생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저 아티팩트의 존재를 운 좋게 찍음으로써 황녀의 병을 치료해준 거다.
자신의 활약이긴 했으나 임팩트가 부족했다.
그렇기에 강현은 지금 황제가 생각하는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이기로 했다.
“그게 무엇이냐?”
“생력을 치료하며 강화시켜주는 생력 포션입니다. 제 약제술로 직접 제작한 물겁이죠. 아티팩트의 저주에 걸린 황녀님의 생력을 회복시켜드리는 데 효과가 좋을 겁니다.”
“무슨, 네 말이 사실이냐?”
“예.”
놀란 눈으로 황제가 생력 포션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력을 치유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다.
전 세계에서 푸스탄트만이 가능한 위업.
그런데 그 위업을 포션으로 이루었다고 믿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강현은 푸스탄트의 제자였다.
‘못 믿겠지만 안 믿을 수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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