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소중한 사람 (4)
* * *
“야.”
아리아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타오르든 말든, 라비는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강현을 불러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너 혹시 전생에 나랑 무슨 연이라도 있었냐?”
“아뇨, 이번 생에서 처음 뵙는 겁니다.”
그게 왜 궁금한 거지.
잠시 의아했지만 못 알려줄 것도 아니었다.
“그래? 흐으음….”
그리고 뭔가를 신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빨리 푸스탄트님께 허락을 받으러 가죠!”
“뭐…, 알겠습니다.”
아리아와 함께 방 문을 나서며 한쪽에 세워진 검, 엘리스를 살펴봤다.
왜 조용히 있는 걸까.
불안할 따름이었다.
∴
“합류를 원하신단 말씀이십니까?”
“네, 혹시 가능할까요?”
아리아의 질문에 푸스탄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 신성 마법에는 자신 있답니다! 그리고 라비도 엄청 강해요!”
“나는 왜….”
자기를 팔아먹고 있는 아리아를 보며 라비가 팔짱을 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저희가 대륙 각지를 도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으십니까?”
“당연하죠, 곳곳에 존재하는 약자들을 돕는다는 푸스탄트님의 헌신에 대해 어찌 모르겠어요.”
원래는 이렇게 발랄한 성격이었던 걸까.
열정이 뜨거웠다.
어떻게든 합류하겠다는 열정이.
“성녀님의 목적은 용사를 찾는 것이라 전해 들었습니다. 대륙을 둘러보기 위해 동선은 같을 지라도 궁극적인 목적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게 실은, 저는 용사가 강현 씨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흐음?”
푸스탄 트는 강현을 바라보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회귀자에다가 시스템이라고 칭했던 특별한 힘.
“확실히 가능성이 낮진 않군요.”
“네.”
확신이 담긴 아리아의 대답에 푸스탄트는 계속 고민할 뿐이었다.
“성녀님이 어찌 생각하실 진 모르겠으나, 저희의 여행길은 꽤나 고단합니다.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당연하죠, 저 또한 헤르피아님의 선택을 받고 성녀가 된 몸, 비록 신분을 감추고 살아야 할지라도 약자들을 돕는다는 것 또한 제 사명이랍니다.”
“그렇군요.”
아리아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푸스탄트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어느 정도 목적도 일치한다.
‘강현이 용사라….’
하늘이 내린 재능과 특별한 힘들.
만약 그가 용사라면 자연스럽게 용사의 곁에는 성녀가 있어야 한다.
여태까지 난세에서 탄생한 용사들은 성녀와 함께 난세를 극복해나갔으니.
“강현아 너의 생각은 어떠냐.”
“나는 뭐…, 괜찮지 않겠어? 안 그래도 자주 일손도 부족했는데.”
푸스탄트와 강현이 아무리 일당백이라 할지라도, 손과 눈을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굳이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데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애들이 싫어할 거 같은데….’
딱 하나의 걱정거리를 뺀다면.
뭐 괜찮겠지, 강현은 생각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성녀님.”
“네!”
푸스탄트와 아리아가 악수를 나눴다.
그들은 바라보고 있는 강현과 라비의 얼굴은 앞으로의 기대감과 걱정이 깃들었다.
∴
방으로 돌아왔다.
레이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엘리스가 있었다.
“강현 씨 어떻게 됐어요?”
강현을 발견하자마자 레이가 물었다.
“뭐가?”
“성녀님과 동행하실 거라 들었거든요.”
“아, 응. 안 그래도 말해주려 했어.”
밝게 미소 짓고 있지만 차갑기 그지없는 레이의 시선에 소름을 느끼며 강현이 말했다.
아마 엘리스가 말해준 거겠지.
강현은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아리아가 자신을 용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앞으로 동행하게 될 거란 이야기들을.
“어머, 매번 한 명씩 여자를 더 데려오시더니 이번엔 두 명이시네요?”
후후, 장난이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지만 저게 정말 웃음일까.
그 웃음 속에서 느껴졌다.
이뤄 형언할 수 없는 두려운 무언가가.
“그러게, 우리 주인님이 잘난 건 알겠는데, 너무 잘나셔서 우리로는 부족한 걸까요?”
미소를 지은 채 비꼬는 엘리스의 말에 강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차라리 화라도 내면 괜찮을 텐데.
‘정신 차려야 한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선.
“애들아, 너희도 알다시피 그냥 목적이 일치해서 동행할 뿐이지 별 특별한 관계가 아니잖아? 다른 지역으로 가려고 마차를 탔다고 쳐보자? 같은 마차에 다른 사람이 동승했다 해도 그냥 남일뿐이지, 안 그래?”
“흐응, 그렇죠.”
레이는 납득하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성녀랑 엘프의 눈빛이 심상치 않던데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엘리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이가 물었다.
‘아니, 눈빛은 또 무슨 얘긴데.’
“봐봐, 말해줬다시피 성녀는 내가 용사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애초에 무슨 눈빛인데.”
레이와 엘리스는 동시에 생각했다.
뭐긴 뭐야, 사심이 잔뜩 담긴 눈빛이지.
푸스탄트의 제자로 알려진 강현의 외모는 유명하다.
강현이 언급될 때마다 반드시 언급되는 특징이 네 가지 있다.
흑발, 흑안, 특이한 이름.
마지막으로 엄청난 미남.
그와 함께 길거리를 거닐 때면 강현을 바라보는 대부분의 여성들의 시선은 예사롭지가 않다.
설마 눈치채지 못한 걸까.
평생 동안 그 시선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왔으니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만했다.
“그리고 그 성녀잖아? 순결함의 상징, 너희가 걱정하는 그런 관계가 되고 싶어도 안된다니까?”
“그럴 리가요, 성녀와 함께했던 역대 용사들 대부분이 과업을 완수하고 성녀와 아이도 낳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다던데요?”
수많은 시간 동안, 역사 속에서는 수많은 용사들이 존재해왔다.
그들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과 책으로 전해져 왔으며.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레이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엘리스가 쳐다봤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강현 씨가 원하시면 얼마든지 다른 여자를 품어도 상관없어요, 너무 과해서 저에게 할애해주시는 시간이 줄어들고 첫 번째가 아니게 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지만요.”
“으응? 레이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일까? 첫 번째라니?”
레이의 말에 반응한 엘리스가 웃으며 말했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레이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대화의 흐름이 급변한 것을 깨달았다.
‘도망칠까.’
“주인님, 도망치시면… 알죠?”
잠시 동안의 고민은 엘리스에게 딱 걸려버렸다.
“뭔지 아시잖아요.”
싱긋, 웃으며 레이가 답했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주인님이랑 제일 오랫동안 같이 있었던 거 난데, 당연히 첫 번째는 내 거지.”
엘리스도 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레이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사실…, 오늘 강현 씨가 말해주셨거든요, 제가 너무 소중하고 정말 좋아한다고.”
너무와 정말.
그런 강조 부사를 넣어 말했던 기억은 없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엘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 하아…? 그으래……?”
분노와 불만이 장작이 되어 엘리스의 눈빛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혹시 엘리스 님도 강현 씨께 이런 말씀을 들으신 적 있으신가요?”
“하, 하하…!”
당황한 엘리스의 모습은 꽤나 낯설었다.
‘재밌네.’
그냥 포기하고 머리를 비우기로 한 강현은 멍하니 불난 집이나 구경하고 있었다.
여기서 무슨 방식으로든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화를 입을 게 뻔히 보였으니.
비록 이 상황의 당사자인 강현이었지만, 그냥 다른 사람일로 마음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
엘리스가 고개를 휙 돌린 순간 레이가 말했다.
“아무래도 강현 씨께 그런 말을 들은 건 제가 첫 번째인 거 같네요.”
“뭐, 뭐 겨우 그 정도 가지고…?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한 엘리스였으나, 이미 그녀의 완패였다.
“어차피 내일이면 헤어질 거잖아? 또 1년 뒤에 다시 만나려나?”
하지만 금세 여유를 되찾은 엘리스가 말했고, 레이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나는 주인님 옆에 딱 달라붙어 있을 건데.”
“… 괜찮아요.”
정말 괜찮을 걸까.
솔직히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약속만 지켜주신다면야.”
아니, 괜찮아 보였다.
“무슨 약속인데?”
“강현 씨가 말해주지 않았나요?”
“….”
“뭐, 강현 씨가 비밀은 원하시면 저는 그렇게 해드릴 수밖에 없으니까.”
첫 번째 성관계는 레이와 갖기로 한 약속.
솔직히 엘리스에게 비밀을 만든다는 것이 편치 않았으나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대단한 약속일 진 모르겠지만, 고작 좋아한다는 말 먼저 들었다고 첫 번째라고 속단하기엔 이를 걸?”
“그럼 강현씨한테 여쭤볼까요?”
“하, 좋아. 맘대로 해.”
레이와 엘리스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갑자기 왜 화살이 나한테 돌아오는 건가.
억울했지만 대답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나는….”
둘 다 똑같이 소중하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분명 둘 다 만족하지 못할 거다.
그렇다면 둘 중 한 명을 선택했다가.
‘상상도 하기 싫네.’
진퇴 양 나의 상황 속.
둘 다 미소를 잃지 않고 차분한 상태로 말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서운 싸움이 또 있을까.
끼익.
“계시나요오…?”
“아멜리아!!”
“꺄흣…!”
“보고 싶었어, 어서 와!”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구원자가 나타났다.
“강현님, 가, 갑자기 이러시며언…!”
강현은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아멜리아를 끌어안아 버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멜리아가 강현의 아름다운 여신님이었다.
∴
하루가 지났다.
이별의 시간이 찾아왔다.
다 함께 상트 리움의 정문에서 나와 작별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레이의 목에 펜던트가 걸려있었다.
푸스탄트의 표식이 새겨진 펜던트.
그녀의 뒤에 흑막의 존재가 드러난 이상, 언제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르기에 강현이 푸스탄트에게 부탁했다.
“강현 씨. 연락 자주 해줘요.”
앞으로 또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
레이는 솔직히 침울했다.
강현을 노리는 여자는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데, 그의 옆에 있을 수 없었기에.
그나마 약속 덕에 불안함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당연하지.”
“약속 잘 지킬 거죠?”
“흠흠, 알겠다니까.”
“꼭 무조건 참으라는 건 아니에요, 솔직히 참아주시면 좋겠지만, 못 참게 되더라도 첫 경험은 반드시 저랑 가져주세요. 저도 메르시한테 밤일에 관해서 열심히 배우고 있으니까.”
“그, 그렇구나…. 흠흠….”
부끄럽지도 않을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만큼 간절한 탓에 부끄러움을 무릎 쓴 것이겠지.
강현은 대답하며 다른 사람들이 혹시라도 들었을까, 주변을 살폈지만 아마 못 들은 듯했다.
“그럼 됐어요.”
그리고 레이는 물러났다.
다음 차례.
“강현 님.”
“네.”
“다음에…, 뵐 수 있겠죠?”
“당연하죠, 통신 스크롤도 나눠가졌으니 자주 연락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공작령에 들려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럼 혹시…, 제가 찾아봬도 실례가 되진 않을까요…?”
아멜리아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뭐가 실례입니까, 오히려 저는 기쁠 겁니다.”
“그, 그렇군요.”
상트리움에 오길 잘했다.
휴식을 취하고 오라는 자신의 아버지, 브라함에게 무한히 감사할 뿐이었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럼 다음에 뵈요.”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물기가 서렸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꾹 참아냈다.
“네, 살펴가십시오.”
레이와 아멜리아는 각자의 마차를 타고 공작령과 세이브리스 백작령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