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소중한 사람 (3)
* * *
상트리움은 며칠 전과 비교해보면 눈에 띄게 한적해졌다.
즉위식을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돌아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평범한 일상 속에서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원래의 계획대로, 성녀는 암살당했으며 축복스러운 즉위식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으니.
전생의 성국은 깔끔하게 성녀의 암살을 수습했다.
정확한 사정을 모르겠으나, 이번에도 어련히 잘할 것이 분명했다.
“몸은 좀 어때?”
나란히 걸으며 레이에게 물었다.
“오래 누워있던 탓에 굳은 거 같긴 한데, 괜찮은 거 같아요.”
잠시 길가를 산책한 뒤, 식당으로 들어가 강현이 레이에게 물었다.
몸을 살짝 움직여본 레이가 답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네, 진짜 잘못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원망 섞인 말투였지만, 다행이었기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걱정만 끼치고.”
침울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숙이며 레이가 말했다.
라비의 말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강현이 엄청나게 걱정했다.
잠도 못 자더라.
이런 쓸데없는 사족을 붙인 탓에, 레이는 아까 전부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도대체 그런 쓸데없는 말은 왜 해서.’
불만스러웠지만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레이가 먼저였다.
“고개 숙이지 말고. 네가 일부로 그런 것도 아니잖아.”
강현은 기가 죽은 레이를 달래줄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든 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걱정하는 게 뭐가 문제인데. 이미 충분히 사과도 했고, 소중한 사람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 그건….”
맞는 말이었다.
레이도 당장 강현이 몸져누우면 당연히 걱정할 거다.
소중한 사람이니까.
또한 강현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인 레이가 얼굴을 붉혔다.
“내 말은 무슨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그러고 있냐는 거야. 레이야, 난 네가 소중해. 든든한 동료고, 같은 회귀 자라는 관계를 떠나서도 소중한 사람이야.”
성녀의 치료가 시작되기 전, 생각했다.
이대로 레이가 영영 깨어나지 못해, 그녀의 고백에 대한 답을 해주지 못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나를 좋아해 주고 위해주잖아, 연락을 주고받을 때면 여러 가지로 신경 써주고, 이따금씩 나한테 애정표현도 하고. 그런 만큼 네가 소중하고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걱정 좀 끼쳤다고 왜 이렇게 침울해하고 있는 거야. 걱정한 내가 잘못한 거 같잖아.”
“아, 아니에요…!”
레이가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답했다.
얼굴을 붉힌 그녀는 눈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
당연히 남에게 걱정을 끼친 만큼, 미안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강현이 모를 리가 없었지만, 레이는 정도가 지나치다고 해야 할까.
일종의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듯이.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나름대로 추측해본 강현은 입으로 옮겼다.
“저는 그저….”
뭐라 말할지 고민하는 걸까.
다음 말이 곧바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알아, 그냥 내가 너무 소중해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 거잖아? 내 검과 방패로써.”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오글거림을 꾹 참아내며 강현이 말을 이어갔다.
자신을 향한 레이의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마 무시하게 거대한 감정이라는 것만을 알고 있었다.
또한 검과 방패가 되겠다는 건 평생 상대를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는 말이다.
그런 자신이 그 상대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거겠지.
“혹시 헛짚었나?”
만약 잘못된 생각이었다면 엄청 쪽팔릴 것이 분명하기에 약간 긴장한 채, 강현이 물었고 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맞아요.”
“그래.”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도했다.
“물론 그런 점까지 다 고맙다고 생각해, 날 그렇게까지 위해줘서 좋기만 하고. 그런데 레이 너는 결국 내 애인이 되고 싶은 거잖아?”
“네….”
강현의 애인이 되고 싶다.
그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행복하게 살고 싶다.
아들 한 명 딸 한 명.
이미 2세 계획도 미리 세워둔 레이였다.
“그럼 뭐... 애인이 돼서 잘 되면 결혼도 할 테고 가정도 꾸릴 거야, 평생을 함께하게 될 수도 있단 말이지. 그런데 그 사이에 나한테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나한테 미안해하기만 할 거야?”
“그건….”
레이는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그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든 간에, 그가 말한 대로 생각할 거라고.
그를 위해서 살고 모든 걸 내어주기로 했으니까.
“부정은 못하네?”
레이는 침묵했다.
긍정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지.
“다 너한테 내가 소중해서 그런 거 알아, 그런데 레이야,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너 자신도 소중하게 생각해주면 좋겠어. 나한테 걱정 끼쳐서 미안한 건 알겠는데, 지금 이 순간에 그 누구보다 힘들 사람은 너잖아. 나 솔직히 지금 화가 많이 난 상태야.”
“왜, 왜 화가 나셨나요…?”
화가 났다는 강현의 말에 놀란 레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를 화나게 만들어 미움을 사버린 걸까, 두려웠기에.
“당연히 너한테 속박을 걸어둔 그 씹새... 가 아니라 못된 놈 때문이지.”
걱정해주고 소중한 사람이라 불러줬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화를 내주고 있었다.
레이는 그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감정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 말고는 없으리라.
“그리고 피해자는 너인데, 기죽지 말고, 미안해하지도 마. 그냥 평소대로 내 머리 잡아당겨서 마음대로 키스도 하고, 손도 잡고 팔짱도 끼라고. 솔직히…, 나도 네가 좋으니까. 여자로서.”
“가, 강현 씨...”
사실 기억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까지만 해도 무서웠다.
자신이 정말 자기 자신인지 모르겠어서.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강현의 말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감동과 고마움, 기쁨이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리고 격렬한 충동이었다.
“그럼 제 마음대로 덮쳐도 될까요?”
“으, 응…?”
갑작스러운 레이의 말에 벙찐 강현이 되물었다.
“아니, 레이야. 조금 진정해봐. 우리 약속했었잖아?”
“농담이에요, 헤헤.”
레이의 얼굴이 다시 밝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었음에 안도한 강현은 절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나온 식사를 먹고 함께 숙소를 돌아갔다.
다정하게 손을 잡은 채.
∴
숙소로 돌아온 강현은 아리아와 라비에게 향했다.
마지막 과제.
상황설명의 시간이었다.
“저는 미래를 한차례 경험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성녀님이 암살당할 거라 예상하고 구출할 계획을 세우던 중, 위장 암살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강현은 자신이 회귀 자임을 밝히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당연히 믿지 않을 거라 예상했으며 그 예상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믿을 수밖에 없을 거다.
라비는 말도 안 된다며 따짐과 동시에 아리아를 바라봤으니.
“아니, 진짜로…?”
아리아의 안색을 살핀 라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강현을 바라봤다.
진실과 거짓은 판별해내는 ‘성녀의 눈’이 있었기에.
“어쩐지 이상하더라.”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이 됐으리라 생각합니다.”
강현은 자신이 회귀자라는 사실에 관해서 아주 조심스러웠다.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가치는 엄청났기에 누군가에게 노려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녀와 성녀의 호위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회귀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이상, 이 상황을 넘길 방법도 없고.
레이를 구할 수 있었다는 것에 비하면 훨씬 싸게 먹혔다.
“그럼 하나만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죠,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부분이라면 전부 답해드리겠습니다.”
레이를 치료해주기 위해 1년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성녀의 축복을 선뜻 걸어준 아리아다.
이 정도 대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혹시…, 그 미래에서 저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적 있으신가요?”
“일단 저는 25살까지의 미래만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제가 14살이니 11년 후의 미래까지죠.”
성녀는 용사를 찾기 전까지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간다.
성녀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다는 것은 곧, 용사를 찾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성녀님에 관한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즉위식 이후로 계속.”
“… 역시 그런가요.”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녀는 생각했다.
“강현 님.”
“네.”
“푸스탄트님과 세계를 방랑하고 있다고 들었답니다.”
“그렇죠…?”
뭔가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혹시 그 여행을 함께할 순 없을까요?”
“뭐? 아리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리아는 라비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강현을 바라봤다.
역대 용사들 모두 3가지의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무력과 성품, 신비한 힘.
강현은 어떠한가.
라비는 그가 같은 나이대를 아득히 넘어선 무력을 지니고 있을 거라 단언했다.
또한 푸스탄트의 제자로써 명성이 자자한 만큼, 성품에 관해서는 따로 논할 필요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신비한 힘.
그는 자신이 미래를 경험한 회귀자라 밝혔으며 진실이었다.
그렇기에 아리아는 강현이 용사라고 어느 정도 확신한 상태였다.
아직 자(?)의 힘이 발현되진 않았지만.
또한 그 3개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건 푸스탄트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너무 고령의 나이였다.
“안될 건 없고 스승님의 동의를 구하셔야겠습니다만….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녀가 함께해서 안될 건 딱히 없었다.
그렇다고 좋을 게 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떨떠름할 뿐이었다.
“저는 강현 씨가 용사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혹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계시를 받으신 적 없으신가요? 추상적이고 애매하더라고 괜찮답니다.”
“으음...”
강현도 게임을 즐겼던 만큼 용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뭔가 짚이는 부분.
솔직히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시스템과 메인 퀘스트.
그리고 검신, 엘리스가 신살자의 검, 엘리스에게 내렸던 전란의 시대라는 예언.
“솔직히 몇 가지 있긴 합니다만… 이게 용사와 관련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역시…!”
아리아는 오른손을 가슴 위로 올려 불끈 쥐며 말했다.
상당히 기쁜 듯했다.
“아니, 진짜…?”
라비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떨떠름할 뿐이었기에 강현과 아리아를 번갈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용사 찾으러 떠난 날에 나타난 얘가, 용사라고?”
“아니…. 확실한 건 아니라 하지 않았습니까.”
“아뇨, 확실해요!”
아리아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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