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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겜 속 중간보스와 히로인들이 내게 집착함-64화 (64/148)

〈 64화 〉 소중한 사람 (2)

* * *

소녀가 소년을 죽인 뒤, 다시금 시야가 점멸했다.

또다시 익숙한 장소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어떻게 잊겠는가.

지금까지의 인생 중, 가장 황홀하고 행복했던 순간인데.

땅거미진 어둠 속 두 남녀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얼굴을 붉힌 소녀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소녀의 앞에 선 소년은 곧 소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레이, 자신의 기억이었다.

시간이 늦은 탓에, 일단 잠을 자고 아침을 맞이했다.

제대로 잠이 오지 않았던 탓에 너무 늦게 잠에 들었다.

그 탓에 다음 날 아침에는 약간의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어쨌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강현은 푸스탄트의 방을 찾아가 아리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속박의 목적이 무엇인지 속단하긴 일렀으나, 푸스탄트를 죽인 것과 큰 연관이 있다고 예상했다.

그렇기에 푸스탄트와 잠시간 레이에 관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뒤 원한관계를 지닌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 모르겠구나.”

하지만 전 세계에서 성인군자라 칭송받는 푸스탄트다.

남을 위해 노력과 희생을 아끼지 않는 사람인데, 도대체 어디서 원한을 산다는 말인가.

“정말 짚이는 것도 아예 없어?”

“그래, 그런 짓까지 해가며 나를 살해하려는 사람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구나.”

“끄으응...”

푸스탄트는 선하기만 한 게 아니다.

반신의 경지에 오른 만큼 그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

전 세계에서 엄청난 명성을 지닌 푸스탄트의 사회적 위치는 쉽게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 혹시, 첫 번째 제자는?”

푸스탄트는 이전에 한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해, 존재 자체만 알고 있었으나, 딱히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그 아이가 갑자기 왜 나오는 게냐, 그리고 내 첫 제자는 죽었다.”

“아… 그래? 미안.”

왜 항상 첫 번째 제자에 대해 말하기 꺼려하는지 궁금했었다.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그늘이 내려앉은 푸스탄트의 표정을 본 강현은 곧바로 납득했다.

“지금 머리를 싸매 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음을 알지 않느냐, 너무 마음고생하지 말고 레이가 깨어나길 기다리자꾸나, 성녀님께서 아침쯤에는 일어날 거라 하지 않았더냐.”

“그렇긴 하지….”

푸스탄트의 말은 정론이었다.

그가 짚이는 구석이 없다고 말한 만큼, 그와 머리를 맞댄다고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낼 순 없었다.

“알겠어, 그럼 다시 가볼게.”

“그래, 레이가 깨어나면 불러주려무나.”

강현은 곧장 레이의 방으로 향했다.

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왔어?”

약간의 연두색이 섞인 백발 녹안의 아름다운 엘프, 라비가 반겨주었다.

어제보다 더욱 부드러워진 미성의 인사를 받으며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인가요?”

“보다시피.”

몸을 살짝 피해 주며 라비가 말했다.

두 눈을 감고 작게 호흡하는 레이는 아직 꿈 속인 듯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레이를 치료해준 아리아가 아침에는 깨어날 거라 했으니, 금방 일어나겠지.

적당히 근처에 앉은 강현은 레이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마음고생시키기는.’

어차피 깨어날 거, 조금 빨리 깨어나 주면 좋겠는데.

별 의미 없는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레이가 몸을 뒤척이기 시작하고 서로를 바라본 라비와 시선이 마주했다.

서서히 감겨있던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강현 씨…?”

그리고 1주일 만의 기상은 싱겁기 그지없었다.

잠에서 일어나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겠냐만은, 1주일 동안 마음고생했던 것에 비하면 딱히 새로운 감회를 느끼진 못했다.

그냥 무사해서 다행일 뿐이었다.

“잘, 잤냐?”

그런데 왠지 목이 매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걱정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란 생각을 한 강현은 숨을 꾹 참았다.

“강현 씨 옆에 또 새로운 여자가….”

하지만 레이는 태평하게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정말 무사한 게 맞는구나.

안심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흐르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다행이라고 할까.

레이에게 간단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푸스탄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기절했으며, 우리가 구하기로 했던 성녀, 아리아의 도움으로 1주일이 지난 지금, 깨어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기절하기 직전의 순간까지는 온전히 기억하고 있던 레이는 아리아와 라비에게 허리 숙여 감사를 전했다.

새로운 여자라는 말을 듣고 열불같이 화를 내던 라비의 분노가 겨우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뭐가 그리 기분 나쁘다고 그렇게 화를 내는 걸까.

그래도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살짝 서운했다.

그 후, 푸스탄트의 방으로 이동한 뒤,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의자에 앉았다.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속박에 대해서 말해줘야 할지.

어쩌면 큰 충격에 빠져 망가지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도무지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말해주기로 결정했다.

본인의 일인 만큼, 본인이 알고 있을 권리가 있다.

큰 충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지만, 레이는 강인한 여인이다.

그리고 레이가 좌절과 실의에 빠지더라도 레이가 이겨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자신이 있었다.

“… 괜찮아?”

아리아에게 들은 영혼과 속박에 관해 레이에게 말해준 강현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생각 외로 평온한 그녀의 표정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억지로 참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제가 기절해있는 동안 꿈을 꿨어요.”

“꿈? 무슨 꿈.”

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꿈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강현과 푸스탄트는 가만히 레이의 말을 기다렸다.

“죄송해요, 잘 기억….”

사람은 언제나 아무런 의미 없는 꿈을 꾼다.

하지만 자신이 꿈을 꿨다는 사실을 자각해도, 꿈의 내용을 온전히 기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소한 거라도 좋아.”

기억하지 못해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그게…. 제가 감옥에 갇혀있었어요, 그리고 어떤 남자가 있었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안 나요, 다만 확실한 건, 제 기억의 일부라는 것 분이었는데, 저는 그런 기억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말을 마친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줄 수 있는 정보가 없다는 뜻이었다.

소중한 정보인 것은 분명했지만 영양가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다만 아리아의 예상이 현실에 더욱 가까워졌다.

레이의 속박에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으며 감옥이라는 환경을 고려해봤을 때, 분명 정상적인 상황은 아닐 것이 분명했기에.

그런데 기억의 일부임에도 그런 기억이 없었다.

모순적인 말이었지만, 속박과 관련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중인격, 또는 꼭두각시.

아리아는 그렇게 예측하였으니.

“죄송해요.”

“아니,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괜히 걱정만 끼치고…, 도움드리지도 못했잖아요.”

침울한 표정을 지은 레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솔직히 맞는 맞는 말이었다.

얼마나 걱정했던가.

레이가 영영 깨어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진심으로 절망했다.

그녀의 꿈과 옛날 기억이 별 도움이 되어주지도 못했고.

그나마 성녀의 예측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정도.

하지만 레이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잠깐 나갔다 올까?”

“네?”

침울해하는 레이를 위해 강현이 말했다.

“1주일 동안 누워있느라 몸도 찌뿌둥할 거 아니야, 산책이나 다녀오자 겸사겸사 밥도 먹고 오고. 할아버지, 괜찮지?”

지금의 레이에게 푸스탄트의 암살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도 별 의미 없을 거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기억에 무슨 문제가 있음을 확인한 이상, 오히려 그게 더 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 다녀오너라, 며늘아가 잘 달래줘야 하느니라.”

그렇기에 강현은 푸스탄트에게 부탁했다.

레이의 성격 상, 속박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도 굳이 내색하진 않겠지만 분명 큰 충격을 받을 거다.

그렇기에 강현은 푸스탄트에게 부탁했다.

만약 레이의 기억이 불안정하다면, 어차피 뭔가를 얻어낼 수도 없고 이미 그녀를 용서한 만큼, 과거의 일에 관해선 물어보지 말자고.

“며, 며늘아가…. 하지만, 푸스탄트님께 적어도 사과는 드리고 싶어요.”

레이가 푸스탄트와 만나려 했던 목적은 전생의 일을 사과하는 것이었다.

“괜찮다, 너는 오로지 너의 의지만으로 나를 죽였던 게냐?”

푸스탄트가 물었다.

당연하다.

레이는 돈을 위해 노예상의 의뢰를 받고, 그를 죽였다.

그렇기에 레이는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당연…?”

하지만 말이 다 나오지 않았다.

레이는 생각했다, 정말 오로지 자신 의지로 푸스탄트를 죽였던 걸까.

분명히 맞다.

하지만 아니었다.

머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분명, 푸스탄트의 심장을 꿰뚫었던 기억이 생생히 나고 있음에도.

처음 겪는 인지부조화였다.

“… 역시.”

격하게 떨리는 동공과 애매하게 벌어진 입을 본 강현과 푸스탄트는 잠시간의 시선을 교환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속박의 파편이 사라진 지금, 레이의 내적인 부분에 무슨 문제가 생겼으리라 예상했고 그 예상을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레이야, 굳이 대답할 필요 없어.”

레이의 등을 쓸어주며 강현이 말했다.

“그래, 그리고 그 일이 오로지 너의 의지라 해도 너는 이미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선을 행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더냐, 그저 새로이 얻은 기회를 부디 소중히 여겨주면 좋겠구나. 나는 그걸로 충분하단다.”

[5 위계 신성 마법: 마음의 평화가 시전 되었습니다.]

푸스탄트의 말과 동시에 발생된 마법에 레이의 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과거의 기억과 관련된 부분을 억지로 끌어내려하면 안 되는 모양이다.

“저, 정말인가요?”

“그래, 그리고 아직 많이 부족한 제자를 잘 부탁 하마.”

“다, 당연하죠!”

강현의 눈치를 한번 살핀 뒤, 오른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행동과 달리 서서히 촉촉해지기 시작한 레이의 눈동자를 본 강현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알겠으면 빨리 나가자 나 배고파 죽겠다.”

“네….”

강현은 레이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아리아와 라비에게 상황을 설명해주기로 약속했지만, 그녀들도 식사를 하고 온다 했으니 괜찮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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