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소중한 사람 (1)
* * *
고향이 절로 생각나는 맛이었다.
홍차의 따스한 맛이 몸을 사르르 녹여주는 것만 같았다.
삼키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깊은 풍미와 혀 끝에서 아련하게 느껴지는 달콤함은 정녕 여태껏 마셔왔던 홍차와 같은 홍차인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그 맛에 놀라며 라비가 물었다.
비법이 궁금한 건 아니었고 그저 감탄의 표현일 뿐이었다.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강현이 답했다.
“뭐... 흠흠, 괜찮네.”
헛기침과 함께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인지조차 못한 사이에 또 긴장이 풀릴 뻔했다.
“정성을 담아서 만들어서 맛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좋아해 주시니 기쁘군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름다운 여인이 놀라며 극찬해주는 데, 기뻐하지 않을 남자는 없다.
“좋, 좋아하다니, 그냥 괜찮은 수준이거든?”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강현은 라비의 틱틱거림을 자연스럽게 받아주었다.
대충 상대가 어떤 성격인지 파악했으니.
홍차를 한모급 마셨다.
언제 마셔도 정말 맛있는 홍차였다.
약 말고 홍차를 팔아서 돈을 모아도 꽤 짭짤하기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의아해하며 강현이 물었다.
“… 아니야.”
턱을 괸 채로, 고개를 휙 돌리며 그녀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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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말을 튼 덕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신경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었다.
우울함과 불안함에 빠져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감시니 뭐니 하면서 푸스탄트한테도 못 가게 한 만큼, 적어도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서 말동무 정도는 해줘야 마땅하지, 강현은 생각했다.
엘리스도 휴식을 취하겠다고 대답이 없는 지금이기에 더더욱.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했다.
황혼의 시간이 지나고 깊은 밤을 지나 새벽이 되었다.
“안 자?”
시간이 늦어졌음에도,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강현에게 물었다.
“네, 성녀님께서 고생해주시고 언제 깨어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어떻게 먼저 자겠습니까. 그러는 라비 님은 안 주무십니까?”
“나야 뭐… 엘프잖아?”
엘프잖아.
그 한마디로 모든 설명이 끝났다.
마나 감응력, 육체 능력, 감각, 수명.
출산율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분에서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것이 엘프라는 종족이었다.
또한 엘프는 인간처럼 많은 수면이 필요하지 않다.
알려진 바로는 하루 30분 정도 수면을 취해도 충분.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언제 무슨 일이 갑자기 생길지도 모르고.”
라비는 아리아의 호위라는 역할에 굉장히 충실했다.
성녀를 따르는 사제도.
돈을 받고 일하는 기사나 용병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의리와 믿음, 신의였다.
“흐흐, 그렇습니까?”
“그 기분 나쁜 웃음은 뭐야.”
직설적인 말에 조금 상처를 입을 뻔했지만 말과는 달리 라비는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성녀님은 좋겠습니다, 이렇게 멋진 분을 친구로 두고 계셔서.”
“… 뭐, 뭐라는 거야.”
어이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며 라비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런 라비의 모습에 강현은 한번 더 웃음을 흘렸다.
“말은 더럽게 잘하네?”
“말 말고 다른 것도 잘합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홍차를 마시며 식사를 한 덕에 가벼운 농담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라비의 적대감과 경계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며.
“뭐, 홍차 하나는 잘 끓이더라, 그건 인정하는데 다른 거는 글쎄?”
여유로운 강현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일부로 자존심을 자극하며 얘기해봤지만.
“인정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미소를 지으며 능글맞게 대답할 뿐이었다.
분하기도 했지만 편안했다.
정말 자신이 14짜리 소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맞는지 착각이 들 정도로.
그리고 그때쯤이었다.
“왔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라비가 말했다.
“뭐가 왔다는 겁니까?”
“아리아가 부르고 있어.”
“… 그렇습니까?”
성녀가 언제 불렀다는 말인가.
잠시 의아했었지만 마나가 느껴지기 시작한 라비의 귀걸이로 인해 알 수 있었다.
“응, 가자. 드디어 끝났네.”
강현과 라비는 아리아와 레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오셨나요.”
그리고 방 안에는 어두운 표정을 한 아리아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강현은 가장 먼저 레이의 안색을 살폈다.
확실히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끙끙 앓지도 않으며 식은땀을 흘리지도 않았다.
창백했던 안색에는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성녀의 축복이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 있어?”
그리고 아리아의 안색을 먼저 살핀 라비가 물었다.
어두운 표정을 본 그녀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라비, 잠시 강현 님과 단 둘이서 얘기를 나눠야 할 거 같아서요. 잠깐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그제야 안심하고 있던 강현은 아직 안심하기 이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 좋은 소식인가요…?”
잔뜩 긴장한 강현이 물었다.
“그게…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시냐에 따라 다를 거 같아요.”
시선을 피하며 답하는 아리아의 모습은 일단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시해줄 뿐이었다.
“알겠어. 필요하면 불러.”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자신은 빠져야 할 때라는 사실을 눈치챈 라비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방에서 나갔다.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축복에 문제가 생긴 겁니까?”
“아뇨, 축복은 제대로 걸렸어요, 아마 내일 아침쯤에는 일어나실 거 같아요.”
일단 축복의 문제는 아니었다.
레이가 다시 깨어날 수 있게 된 이상 최악의 문제는 아닌 듯했다.
“일단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 겁니까?”
선뜻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며 망설이고 있다.
“저는 괜찮으니 말씀해주세요.”
강현은 성녀를 미약하게나마 안심시켰고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 강현 님은 이 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 건가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카르마에 대해서 알고 계신가요?”
“예, 알고 있습니다.”
태초에 12 주신들이 세계와 인간, 영혼을 창조하며 생겨났다는 카르마.
그 개념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강현은 대현자의 눈을 통해 타인의 카르마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카르마가 문제였구나.’
레이의 카르마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
강현은 아마 회귀로 인한 공존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레이 님은 지금 두 개의 카르마가 공존하고 계세요.”
“그렇군요….”
레이의 카르마는 선에 비해 악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전생에 수많은 죄를 저질러왔기에.
강현은 곧바로 아리아가 설명을 요구할 때 뭐라 말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인데 들어보실래요?”
“네.”
“일단 그전에 속박에 관한 것부터 말씀드릴게요.”
후우, 아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 중앙에 손을 얹고 쓸어내리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모양이다.
“레이 님께 걸려있던 속박은 일종의 명령이었어요.”
“명… 령이요?”
“네,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지 않는 이상, 절대 풀리지 않는 속박이죠. 그리고 그 속박은 또 레이 님의 영혼을 집어삼킴으로써 새로운 영혼이 되었을 거예요.”
“네…? 잠시만요, 이해할 시간을 좀.”
강현이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머나먼 이야기였다.
아득한 거리감을 부유하고 있는 느낌.
영혼을 집어삼켜 새로운 영혼의 역할을 하는 속박이라니.
영적인 상관관계를 이해할 만큼의 사전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일단 대충 무슨 얘기인지는 알아들었습니다.”
강현의 대답을 들은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현재는 본래의 목적은 완수한 것인지, 속박이 부서져있었어요. 혹시 레이 님은 이중인격자 거나 세뇌당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강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자신의 속박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그럼 역시 타인의 의지로 걸린 속박이겠네요.”
“… 그 말은 레이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했다는 말입니까?”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확률이 제일 높을 거예요. 제가 생각하는 과정은….”
아리아가 설명을 시작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레이를 이용하고자 속박을 걸었다.
완벽한 조종을 위하여 그녀를 세뇌했다.
그로 인해 의지의 힘이 약해진 본래의 영혼을 속박이 집어삼켰으며, 속박의 영혼이 새로이 탄생되었다.
그 후, 레이는 이중인격자, 또는 꼭두각시가 되어 살아갔을 거다.
그러던 중 본래의 목적을 완수함으로써, 속박이 파괴되고 본래의 영혼이 되돌아왔다.
“… 그로 인해 영혼에 새겨지는 카르마가 두 가지로 나뉜 상태라 생각해요. 하나는 속박의 영혼에 새겨져 있던 카르마, 나머지는 본래의 영혼에 새겨져 있던 카르마죠. 지금도 속박의 파편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레이 님의 악 카르마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어떤 놈이 레이에게 몹쓸 짓을 했으며 속박을 걸어놨을 거라고.
하지만 원래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아리아의 말에 인지가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게 사실입니까…?”
“확실하지 않고 가설에 불과하지만…, 지금 레이 님의 상태를 보면 그것 말고는 다른 가정이 생각나지 않네요.”
무거운 마음으로 아리아가 대답했다.
충격받은 강현의 얼굴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치료는 다 끝난 겁니까?”
“일단 지금 당장은 괜찮으실 거예요, 속박의 파편도 전부 제거한 상태거든요.”
강현은 대현자의 눈을 사용했다.
[레이]
[핏빛 칼날, 검귀, 대륙 제일 검, 세이브리스의 영웅]
[선(?) 카르마: 581]
아리아의 말대로 레이의 악 카르마는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네….”
무겁게, 하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숙인 강현의 인사에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혼자 있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다,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맞은편 방이 비어있으니 거길 사용하시면 됩니다.”
“네, 그럼.”
아리아가 방에서 나가고, 혼자 남은 강현은 곧장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전생에서의 핏빛 칼날과 관련된 기억들을.
강현이 이 세계의 나이로 12살이 되던 해, 레이는 음지에서부터 양지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제국과 모든 왕국에게서부터 수배자가 된 후 강현이 20살이 되었을 때, 푸스탄트를 암살했다.
그리고 푸스탄트가 죽은 후, 핏빛 칼날에 대한 사건 사고에 관한 소식들은 일절 들려오지 않았다.
강현은 생각했다.
그 푸스탄트와 전투를 벌인 만큼 무사하지 못했을 거라고.
실제로 전생에서 레이와 만났을 때, 그녀는 거의 죽어가고 잇던 상태가 아녔는가.
하지만 만약 핏빛 칼날에 대한 소식이 끊긴 것이, 속박이 파괴되고 원래의 영혼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라면?
충분히 그럴 싸 했지만….
‘푸스탄트한테 원한은 품을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는 건데. 심지어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정도인 놈이.’
정확한 건 레이가 깨어나야지 알 수 있을 듯했다.
강현은 몇 시간 전과는 달리, 편안한 얼굴로 잠에 든 레이의 손을 꼭, 붙잡았다.
“… 씹새끼가.”
강현은 푸스탄트와 다르다.
죄인은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며 사람을 고쳐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아리아의 가설이 진실이 되고 레이에게 속박을 건 놈을 찾는다면.
“넌 뒤졌어.”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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