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성녀의 축복 (5)
* * *
언제 나가죠?
… 나도 몰라.
아직 여러 개의 과제가 남아있다.
라비가 매고 있는 가죽 가방 안에 있는 엘리스 꺼내 줘야 한다.
아리아와 라비에게 상황을 설명해줘야 하며 레이가 기절한 이유와 속박에 관해 알아봐야 했다.
당장 떠오르는 3가지의 과제들은 하나같이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아…, 머리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낀 강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도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레이가 무사히 깨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 일단은 기뻐하기로 했다.
“그 여자애가 많이 소중한가 봐?”
한숨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걸까.
나름 진중한 태도로 라비가 물어왔다.
참 이상한 엘프였다.
고고하며 고상하고 우아하며 신비롭다.
엘프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라비는 뭐하고 해야 할까.
베틀 엑스를 등에 짊어지고 있는 여전사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투박하며 거칠고 사나웠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강연에겐 오히려 라비 같은 성격이 더욱 상대하기 편했기에 더욱 선호했다.
“뭐, 그렇죠.”
강현은 잠시 고민했다.
많이 소중하다면 반대로 조금 소중한 것도 있는 걸까.
그렇다면 레이는 그 사이에 정확히 어느 지점에 위치해있을까.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어쨌든 소중하면 그만이지.
“흐응…. 그래.”
이내 곧, 흥미가 사라졌다는 듯이 다시 두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 정령들이 돌아다니는 걸로 보아, 정령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봤다.
“라비 님도 성녀님이 꽤나 소중하신 모양입니다.”
강현과 라비는 맞은편, 강현의 숙소로 들어가 시간을 축내고 있었다.
어색하기도 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보아 괜히 말을 걸어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치유는 막연히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무료했다.
복잡한 머릿속 생각에서부터 신경을 돌릴 곳이 필요하기도 했고.
마침 라비가 먼저 입을 열었겠다.
이 틈을 놓치지 않은 강현은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소중하지. 살면서 봤던 인간들 중에서 제일 좋은 애였으니까.”
라비의 어조에 애정이 묻어났다.
세계에서 소멸해야 하는 아리아의 호위로 붙은 만큼 그 둘이 각별한 사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습니까.”
“너도 오늘 봐서 알 거 아니야?”
“확실히 좋으신 분이시더군요, 헤르피아님의 선택을 받은 이유가 확실한 모양입니다.”
“흥, 당연하지.”
콧방귀를 뀌며 라비가 대답했다.
대답이 맘에 든 모양이었다.
물론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녀의 입장에선 그저 위험요소일 뿐이다.
굳이 경계심을 풀 필요는 없겠지.
“다른 인간들이랑은 달라, 멍청할 만큼 순수하고 이기적이지도 않고. 하도 어수룩한 탓에 어디 가서 이용당하기 딱 좋지만.”
칭찬과 악담, 그 사이에 애매하게 위치한 말들이었지만,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라비의 표정을 봤을 때는 칭찬에 가까웠다.
강현의 입장에서는 호구에 관한 설명으로 들려왔지만.
나도 한 호구하는데 조금만 덜 경계해주면 안 되냐.
강현은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다.
이런 쓸데없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보려 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어수룩해서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과도 거리가 있었고.
“걱정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뭐… 그렇지.”
어깨를 으쓱이며 라비가 대답했다.
혹시 라비는 아리아가 쉽게 보증을 서주는 사람, 또는 비슷한 무언가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도 참 멍청하단 말이야? 뭘 믿고 저런 애한테 이상한 짓을 시키는 건지. 참.”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턱을 괬다.
우수에 찬 눈빛은 먼 산을 바라보는 듯했다.
약간의 연두색이 섞인 백발과 비취색의 눈동자.
뾰족한 귀와 뚜렷한 이목구미를 지닌 그녀의 모습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치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 말 하다가 성녀님께 혼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크크, 강현의 말을 들은 레비가 뭐가 웃기는지 크게 웃었다.
“그렇지? 안 그래도 자주 혼… 흠흠.”
헛기침을 내뱉은 라비는 풀어지려던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아주 짧은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긴장과 경계가 순간적으로 풀릴 뻔했다.
“대단하시네요.”
강현은 자신의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뭐가?”
“성녀님 말입니다. 아직 나이도 어리시고 성녀가 되신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희생할 용기를 낸다는 것 자체가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건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억은 곧 과거의 사건들이다.
죽음을 꾸며 과거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린다는 게 얼마나 괴롭고 힘든 일일까.
강현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하, 뭘 좀 아네.”
라비조차 아리아의 고뇌와 괴로움, 두려움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고작 갑자기 나타난 타인이 잘 안다는 듯이 떠드는 게 어이가 없기에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용기의 대단함을 잘 알고 있는 모습은 꽤 마음에 들었다.
“신탁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저러는 건지, 난 절대 저런 거 못할 거 같은데.”
자조 섞인 미소를 머금으며 라비가 말했다.
라비는 아리아가 신탁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소멸을 선택한 순간,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동질감을 느꼈다.
라비도 세계수의 숲에서 뛰쳐나왔다.
과거와 연을 끊고 산다고 해도, 세계수의 숲으로 돌아가면 동지들이 자신을 여전히 기억해주고 있을 거다.
그 차이는 간단하면서도 복잡했다.
확실한 건,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다.
죽은 사람이 된다.
그럴 용기는 전혀 없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사납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유한 것을 보고 의외로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지금도 무사히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라비 님은 세계수의 숲에서 어쩌다가 인간들의 나라로 넘어오게 된 겁니까?”
강현의 질문에 라비는 잠시 고민했다.
더 대화를 나눠도 괜찮을지.
그의 부드러운 미성과 절제된 몸짓, 점잖으면서도 편안한 말투 때문에 계속 경계심이 풀어지려 하고 있었다.
괜찮겠지.
몇 시간 동안 계속 무료하게 앉아있는 것보다야.
그렇게 생각한 라비는 경계심을 풀지 않는 선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뭐…. 대충 보면 뭔지 알잖아?”
딱히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인 듯, 라비는 애매하게 대답함으로써 회피했다.
“제가 아직 보는 눈이 부족한지라,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라비는 다른 엘프들과 비교했을 때, 성격적인 부분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거 개성의 차이기에, 문제로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보는 눈이 부족하기는.”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상대를 꼼꼼히 살피며 항상 진지함이 느껴져 온다.
그런 그가 사람 보는 눈이 없다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모르긴 뭘 몰라, 오늘 봐서 알 거 아니야?”
시큰둥한 태도로 말해도 강현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늘 본 게 뭐가 있다는 겁니까. 제가 본 건 라비 님께서 성녀님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밖에 못 봤습니다.”
뭔가 세계수에 숲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오늘 봤던 라비의 모습과 그 문제의 연광성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성녀님과의 신의를 지키셨던 거 아닙니까?”
“… 다른 엘프들이랑 다르잖아. 뒤에서 잘도 씹어대더라, 돌연변이니 망나니니 하면서.”
“확실히 고상한 이미지가 강한 다른 엘프들과 다른 건 사실이지만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개개인의 개성일 뿐이죠, 그리고 저는 차라리 라비 님 같은 시원시원한 성격이 훨씬 더 좋습니다.”
“개성…. 다른 엘프들은 너처럼 생각하질 않아서 말이야.”
강현의 말을 곱씹은 라비는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약간의 미소가 서려있었다.
어느 정도 경계심이 풀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겸사겸사 약간의 호감도도 얻고.
“그런데 너 진짜 이상하네.”
턱을 괸 체, 강현을 지그시 바라보며 라비가 물었다.
도대체가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잠시간의 대화를 나눴을 뿐임에도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아리아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빛의 천막을 뚫고 텔레포트까지 사용했다.
그리고 말하는 걸로 봐서는 몰라야 할 정보들까지 알고 있었다.
만약 좋지 못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면 단칼에 베어버렸을 테지.
“뭐…, 이상하다는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만 독종이라는 말은 자주 들었습니다.”
마법과 검술을 수련할 때, 푸스탄트와 엘리스는 이따금씩 강현에게 독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딱히 좋은 뜻의 단어는 아니었지만, 강현은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혹시 제가 보냈던 선물은 어떻게 됐습니까?”
강현은 화제를 돌렸다.
엘리스를 다시 가져오기 위한 초석을 깔기 위해서.
“성녀님의 마음에 들었을지 궁금하군요.”
“엄청 좋아하더라, 원래대로였으면 네가 축복을 받았을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행입니다, 결국엔 축복도 제가 받게 되었고요.”
“뭐…. 그렇지.”
엘리스는 켕기는 부분이 있었지만 잠시 뜸을 들은 뒤, 대답했다.
“그런데 성녀님께서 받으신 선물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강현의 물음에 라비의 표정이 굳어졌다.
계획된 위장 암살.
즉위식은 그저 사람들을 속여내기 위한 일종의 장치에 불과했다.
성녀의 즉위식을 축하하고 축복을 받기 위해 보내준 사람들의 선물은 다시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이 맞았다.
“그, 그게….”
이걸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라비는 고민했다.
강현이 보낸 반지는 자신의 가방 속에 몰래 숨겨왔으니.
“내가 가지고 있어.”
잠시 고민한 라비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레이의 치료가 끝난 뒤에 물을 예정이지만 강현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른다.
‘괜히 거짓말을 해서 밉보일 이유는 없지.’
또한 어차피 선물 아니던가.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강현은 어설프지만 연기를 시작했다.
“뭐가?”
“혹시 반지가 담긴 상자를 잠시 주실 수 있습니까?”
“응? 왜?”
강현의 행동에 의아해하며 라비가 되물었다.
“그게 실은…, 제가 금화 한 닢을 잃어버렸습니다.”
어설픈 핑계였지만 강현은 플레이어 스킬을 믿기로 했다.
모든 거래와 의사소통, 계약에서 상당한 이득을 보게 해주는 플레이어 스킬을.
“금화? 그게 반지랑 무슨 상관인데.”
“아무리 찾아봐도 안 나오길래, 혹시 반지가 담긴 상자에 들어간 게 아닐까 싶어서 그럽니다.”
“뭐….”
선물을 도로 가져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원래 주인은 그였기에 딱히 상관은 없었다.
“알겠어, 근데 내가 몇 번 열어봤을 때, 금화는 전혀 없었는데?”
“혹시 솜털 밑도 확인해보셨습니까?”
“당연히 아니지.”
라비는 가방에서 반지 상자를 꺼내 강현에게 건넸다.
그녀가 건넨 반지 상자를 열고 안을 확인했다.
‘인벤토리.’
그리고 인벤토리를 연 뒤 금화 한 닢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꺼냈다.
엘리스와 진짜 반지를 바꿔치기한 후, 뚜껑을 닫고 라비에게 돌려주었다.
“찾았어?”
“네, 진짜로 솜털 밑에 깔려있더군요.”
“아니, 그렇게 큰돈을 왜 하필 그런 데다가?”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부끄럽군요.”
강현의 대답을 들은 라비가 피식, 웃었다.
“너 은근히 허당이구나?”
“흠흠, 차라도 내어드릴까요?”
“좋지.”
허당이라는 오해를 사버렸지만 엘리스를 되찾는다는 첫 번째 목적은 성공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현은 홍차를 끓여 라비에게 내어줬다.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라비는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강현과 홍차를 번갈아봤다.
“맛있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채 강현이 물었고 라비는 떨떠름한 듯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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