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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겜 속 중간보스와 히로인들이 내게 집착함-60화 (60/148)

〈 60화 〉 성녀의 축복 (3)

* * *

시야가 점멸했다.

달라진 환경을 살펴본 후의 감상은 익숙함이었다.

퀘퀘하고 역겨운 악취가 코를 찌르고 차가운 바닥과 맞닿은 발에서 냉기가 느껴져 왔다.

어두운 뒷골목.

남자는 소녀에게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소녀는 사람을 죽였다.

누추한 꼴을 한 소년이 삶을 구걸하고 있었음에도, 소녀가 들고 있던 단검이 소년의 심장을 관통했다.

소녀의 눈은 여전히 공허했으며,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낸 것처럼.

아니, 그저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그리고 기이한 형상이 일어났다.

꿰뚫린 소년의 심장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생력이었다.

생력은 단검을 타고 흘러, 소녀에게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이제 출발했어요.

머릿속에서부터 엘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스의 미성은 요염하며 매혹적이었기에, 이따금씩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지금도 강현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번 계획이 실패한다면 레이는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엘리스가 소지한 표식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푸스탄트는 언제든지 텔레포트를 시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녀와의 조우는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하고 있지? 상트리움에서 벗어난 뒤에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했을 때쯤, 다시 말해줘.

­알겠어요.

엘리스와 짧은 텔레파시를 나눈 강현은 푸스탄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행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신호였다.

빛의 천막을 뒤집어쓴 아리아와 라비는 상트리움의 정문에 인파가 쏠린 틈을 타, 후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취임식 전까지, 성녀에 관한 모든 것은 철저히 비공개로 처리된다.

일상복을 입고 빛의 천막을 뒤집어씀 아리아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 수가 없단 뜻이었다.

“빨리 가자.”

라비는 아리아를 재촉했다.

끝내 모든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걸까.

상트 리움에서 멀어질수록 아리아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질 뿐이었다.

고향 땅을 벗어나 낯선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두려운 일임을 알고 있었기에, 라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 네.”

아리아는 한차례 뒤를 돌아봤다.

상트리움과 꽤 떨어진 위치였으나, 높은 대교회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시 고개를 돌린다.

성녀로써 선택한 운명이다.

후회 없는 선택은 아니었으나, 선택을 후회하고 싶진 않았기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아리아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에휴, 라비는 요즘따라 부쩍 늘어버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렇게 30분 정도 걸었다.

마차를 타기 위해 근처 마을로 향하던 그녀들은 숲 속을 가로질러 가기로 정했다.

엘프는 대자연의 가족이자 동지이며, 친구다.

무성하게 자라난 풀잎들과 울창한 나무들이 엘프의 눈, 코, 입이 되어주기에 아리아를 호위하는 데에 있어선 제격인 동선이었다.

숲을 가로지르던 중이었다.

마나와 기척을 느끼며 걷던 라비가 이변을 눈치챈 것은.

주변의 마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아리아!”

심상치 않은 뭔가가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은 라비는 급하게 아리아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라비의 전방에 소용돌이치던 마나가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뭉치던 마나는 술식이 됨으로써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텔레포트?’

장수종 엘프.

마법이란 학문은 끊임없는 탐구를 요구한다.

당연히 인간보다 몇십 배나 긴 수명을 가진 엘프는 마법진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다.

“내 뒤에 딱 붙어있어, 알겠지?”

7 위계 마법인 텔레포트.

인간의 척도로 바라보자면 최소 현자 이상일 것이 분명했다.

빛의 천막이 있음에도 어떻게 성녀의 위치를 특정한 것인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텔레포트의 시전자는 상당한 강자다.

아리아를 지키는 것이 최우선.

라비는 자신의 정령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네, 네…!”

갑작스러운 상황.

마법진과 라비의 정령들을 바라보며 아리아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언제든지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마법진이 새하얀 순백의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강렬하던 빛이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하고, 빛 안에서 한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흑발 흑안의 소년.

확실한 것은 적의나 살의는 전혀 없었다.

“너 누구야.”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며 라비가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소년이 가슴의 손을 얹고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기품이 느껴지는 인사와 귀를 홀리는 듯한 부드러운 미성에 아리아와 라비의 경계심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저는 이강현이라고 합니다. 이름보다는 푸스탄트의 제자라는 칭호로 더 유명합니다.”

강현은 오랫동안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지 성녀의 축복을 얻어낼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자연스러움을 빙자한 채.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답이 없었으니.

애초에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성녀와 조우한다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빛의 천막을 뒤집어쓴 채, 상트리움에서 몰래 빠져나가고 있는 성녀라면 더더욱.

그렇기에 강현은 얼굴에 철면피를 깔기로 했다.

괜히 어설프게 연기할 바에는 그냥 당당한 것이 더 나을 거 라 생각했기에.

‘정신 차리자.’

성녀와 조우했음에도 퀘스트가 완료되었단 알림창이 나타나지 않았다.

퀘스트는 그저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줬을 뿐이었다.

이제부터 성녀의 축복을 얻어내는 것은 온전히 강현의 몫이었다.

혼자 오길 잘했을까.

강현은 고민했다.

어쩔 수 없었다.

레이를 보살펴주고 있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 이강현?”

라이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소년의 이름을 곱씹으며 아리아를 바라봤다.

저 말이 사실이냐는 듯이.

“흑발 흑안에, 맞아요.”

소문대로, 조각한 것같이 흠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였기에 아리아는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성녀의 눈’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녀의 눈은 그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거짓과 진실을 구별해낼 수 있으니까.

또한 강현은 회귀한 이후, 전생과는 달리 자신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퍼트렸다.

유명인이 되어 피곤해지는 것은 딱 질색이었지만, 그만큼 여러 상황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었기에.

본격적으로 힘을 기르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익이 더 클 거라고 계산했다.

“그 푸스탄트의 제자가 여긴 무슨 일로 찾아온 건데?”

누구냐고 물었을 때의 말투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아직 경계심이 서려있었으나, 조금 사그라졌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적대감은 여전히 강렬했다.

저게 정령들인가.

라비의 주변을 둥둥 떠다니는 형형색색의 5개의 광원을 바라보며 강현이 생각했다.

“성녀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건 말 안 해도 알아, 무슨 목적으로 찾아온 거냔 뜻이지.”

다시금 질문하여 라비는 강현을 살폈다.

옷 너머로도 느껴지는 다부진 근육과 넓은 어깨는 그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실력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마법뿐만이 아닌, 전투술에도 일가견이 있을 거다.

라비는 확신했다.

그와 동시에 전투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적의와 살의가 느껴지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다.

푸스산트의 제자가 성녀를 습격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그의 자세와 말투 하나하나에서 정중함이 느껴져 왔다.

또한 선과 악, 거짓과 진실을 판별하는 ‘성녀의 눈’을 가진 아리아에게서부터 별 반응이 없다.

그런 만큼, 경계심을 풀어도 상관없었지만 정령들은 달랐다.

각 속성을 대표하는 5마리에 정령들은 강현이라는 인물에게서부터 두려움을 느끼고 덜덜 떨고 있었다.

아리아를 지키기 위해 라비는 경계를 절대 늦추지 않았다.

“먼저 갑작스럽게 찾아온 점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성녀님의 도움을 얻고자 이렇게 직접 뵈러 왔습니다.”

“제, 제 도움이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 강현의 모습에 아직 상황 정리를 끝내지 못한 아리아는 얼떨떨할 뿐이었다.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와서 도움이 필요하다 말해도 곤란할 뿐인데.”

성녀는 이 세게에서 소멸해야 한다.

위장 암살을 연극하고 도망치던 와중에 성녀에 대해 알고 있는 강현은 곱게 볼 수 없다.

아리아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만큼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라비는 생각했다.

“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곳에 찾아왔는지, 성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부터가 의심스러우시겠죠.”

“잘 알고 있네. 그럼 아리아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야 되는 것도 알고 있겠지? 아니면 자신이 넘쳐흘러서 협박이라도 하러 온 걸까?”

라비는 허리춤에 매고 있던 칼을 꺼내 강현에게 겨눴다.

“라, 라비. 왜 그러세요!”

아리아가 다급하게 말렸음에도 라비의 자세는 여전했다.

아리아는 이제 용사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야 한다.

성녀로써 성국과 교회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만약 아리아의 대한 정보가 퍼진다면?

언제 어디서든 성녀를 노리는 불한당들에게 습격당할 위험이 생긴다.

엘프인 라비는 강하다.

날고 긴다는 인간들이 떼거지로 몰려와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하지만 결국 몸은 하나뿐이었다.

아리아를 지키는 입장인 라비로서는 도움이 필요하든 말든, 위험요소를 좌시할 순 없었다.

“협박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적대적인 라비의 모습에 잠시 당황한 강현이었지만 위협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평온한 모습에 라비가 더욱 경계하기 시작할 때쯤, 아리아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라비! 진정해요. 좋은 분이니까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성녀의 눈’은 상대의 선과 악의 카르마를 볼 수 있다.

이강현이라는 사내가 보유한 ‘선(?) 카르마’는 1만 이상.

14살이 되기까지의 매 순간마다 선을 행하며 살아왔다 하더라도 쌓을 수 있는 수치가 아니었다.

그런 만큼 아리아는 강현이 보통의 인물이 아님을 직감했다.

“… 알겠어.”

칼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은 라비였으나, 경계심은 여전했다.

자신이 나서야 할 때임을 직감한 아리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도움이 필요하신 가요?”

아리아에게 질문을 받으며 강현은 ‘대현자의 눈’을 발동했다.

[아리아 글라디우스]

[사랑과 평화의 신, 헤르피아의 성녀]

[선(?) 카르마: 912]

대력 1천에 달하는 선 카르마.

거기에 자신의 신변보다 남의 도움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까지.

아리아라는 성녀가 어떤 사람인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아리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라비는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아무런 불만도 생기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이었다.

“라비, 저는 성녀예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다,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랍니다.”

물론 다른 문제도 아주 중요하지만요, 말을 덧붙인 아리아가 강현의 눈을 응시했다.

우수에 잠긴 눈빛은 그가 얼마나 도움이 급한지를 알리고 있었다.

“성녀님의 축복이 필요합니다. 영혼에 상처를 입은 소중한 사람을 깨우기 위해서.”

영혼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

심지어 성녀의 축복이 영혼조차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도.

“좋아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성녀는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게 승낙했다.

조금 더 과정을 거칠거라 생각했기에 조금 당황하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일이 잘 풀렸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잠깐만, 그 대신 조건이 있어.”

하지만 아리아와 라비의 입장은 달랐다.

“네가 어떻게 우리의 위치를 알고 텔레포트를 사용했는지, 아리아가 성녀란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전부 말해.”

이번만큼은 아리아도 말리지 않았다.

라비의 조건은 타당하며 당연했다.

“네, 알겠습니다. 다만 지금 1분 1초가 급한 상황인지라, 부디 양해 해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현의 대답을 들은 라비는 아리아를 바라봤다.

결정은 네가 하라는 뜻이었고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감사합니다. 위치는 상트리움에 있는 여관입니다. 텔레포트로 이동할 테니,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퀘스트 완료]

[메인 퀘스트의 해금률이 20% 상승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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