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성녀의 축복 (2)
* * *
대략 하루정도, 상자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인 엘리스는 충격적인 사실을 얻어냈다.
성녀는 한 가지 신탁으로 인해, 교회와 함께 위장 암살을 계획했다.
그녀는 위장 암살을 당함으로써, 자신의 과거와 이름을 버린 채, 새로운 사람으로서 살아갈 생각인 듯했다.
위장 암살은 대륙 어딘가에 존재하는 용사를 찾는 것과 스스로의 힘을 기른다는 두 가지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라비는 그런 아리아의 호위쯤으로 생각하면 편할 듯했고.
엘프가 어째서 성녀를 호위하게 되었는지 정확한 속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아리아와 가까운 사이이며 악인 또한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진정으로 엘프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털털한 성격이었다.
어쨌든, 성기사들을 뚫고 성녀를 암살한 엄청난 실력자도, 더러운 술수를 꾸미는 부패된 교회도 없었다.
성녀는 내려온 신탁을 자신의 결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했다.
그거 말고는 별 거 없었던 거 같아요.
… 그래?
늦은 밤.
여전히 괴로운 표정을 지은 채, 끙끙 앓으며 식은땀을 흘리는 레이를 간호해주던 강현은 엘리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2명의 성기사장과 18명의 성기사들을 뚫는 것은 푸스탄트와 같은 경지인 반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
위장 암살 계획을 보고받은 강현은 암살사건의 실체와 현실성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래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야.’
성녀가 암살당했단 사실이 거짓이란 건 다행으로 여겨야 마땅하지만, 강현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레이를 깨울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 방법.
1% 미만의 확률을 믿고 푸스탄트가 레이를 치료해주는 것과 성녀의 축복을 받는 것.
퀘스트는 성녀와 조우한 보상으로 성녀의 축복이란 보상을 약속했지만, 그저 만난다고 해서 그 귀한 축복을 쉽게 내려줄 리가 없었다.
성녀로 추대된 기간 동안, 1년에 한 번씩 사용할 수 있는 성녀의 축복은 귀하디 귀한 능력이었다.
그렇기에 강현은 한 가지 스토리를 떠올렸다.
암살의 위기에 놓인 성녀를 무사히 구해냄으로써 보상으로 축복을 요구한다는 일련의 스토리.
만약 계획대로 흘러갔다면 축복을 요구할 충분한 명분을 얻을 수 있었테지만….
‘이제 남은 건 퀘스트를 믿는 수밖에 없나.’
어떤 방식으로 성녀의 축복을 보상해주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남은 방법이 없었다.
수고 많았어, 그리고 도와줘서 진짜 고맙다.
뭘요, 주인님은… 좀 괜찮으세요?
엘리스에게서부터 걱정이 느껴져 온 강현은 약간의 미소를 머금었다.
남에게 걱정 끼치는 걸 싫어하던 강현이었지만, 엘리스의 따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아서.
당연히 괜찮지. 성녀랑 만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될 거니까.
성녀도 기본적으로 선인이다.
눈앞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자를 그냥 지나치진 못할 거다.
자신과 푸스탄트가 그러는 것처럼.
엘리스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눈 강현은 레이의 안색이 아주 조금은 가벼워진 것을 확인하고 짧게 잠을 청했다.
∴
어둡고 비좁은 쇠창살 안이었다.
퀘퀘하고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답답한 공기는 호흡을 꺼리게 만들기까지 했다.
한 소녀가 있었다.
붉은색의 짧은 머리를 지저분했고 입고 있는 천 쪼가리는 꼬질꼬질하기 그지없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붉은 눈동자는 그저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묵묵히.
“완벽해.”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중후함이 없으며 다소 얇은 목소리.
주변을 둘러봤다.
쇠창살 너머로 고급스러운 양복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쇠창살 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 그의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얼굴의 절반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불규칙하게 파여있는 반쪽 얼굴의 피부는 작은 무언가에게 뜯어 먹힌 듯, 울퉁불퉁했다.
“하, 하하... 나으리, 어떠십니까?”
겁에 질린 사내가 양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인 채 굽실대며 물었다.
그의 눈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양복을 차려입은 사내의 눈치를 살피듯이.
“잘했어, 아주 완벽해. 내가 시키는 대로 잘해줬어!”
약간의 흥분을 머금은 남자는 소리 높여 말했다.
양복의 사내의 마음에 들었음에도 사내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역시 흑마천(???)이야, 괜히 흑마법사들의 하늘이라는 칭호를 거머쥔 게 아니란 말이지.”
다시금, 자신의 흡족함을 나타낸 양복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 걸까.
궁금하던 찰나.
“기억은 완벽하게 지워졌습니다.”
“그래… 지 아비의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니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겠지.”
아비.
저 적발 적안의 소녀의 아비라는 걸까.
기시감이 느껴져 왔다.
동시에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어째서일까.
나는 누구고 어디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까.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거대한 분노라는 감정뿐이었다.
“어미는 어떻게 처리했지?”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으실 겁니다.”
“그래, 역시 훌룡하군.”
양복의 흑마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와 어조에는 만족감이 서려 있었고 흑마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
“드디어 나으리의 원대한 계획이 시작되겠군요.”
“계획… 하하하! 그래, 네 말대로야. 드디어 이 세계는 진정한 선(?)을 맞이함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겠지! 크흑, 큭큭!”
양복의 사내는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가 커지고 기분이 좋아질수록, 흑마천의 표정은 더욱더 어두워졌으며 손을 두려움에 덜덜 떨리고 있었다.
푸확! 피가 튀었다.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흑마천의 공허한 눈이 아래로 떨어졌다.
왼쪽 가슴에 큰 구멍이 뚫려있었다.
심장이 있어야 할 곳이 사라진 것을 그제야 인지한 흑마천의 눈이 천천히 올라갔다.
“어, 어째서…!”
흑마천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진 순간, 그의 몸이 쓰러졌다.
인지조차 불가능한 찰나의 순간에, 생명이 사라졌다.
“어째서긴, 입단속이지.”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은 양복의 사내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죽일만한 악의와 분노가 전무했다.
마치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이상을 못 느낀다는 듯이.
“대(大)를 위해서 희생 좀 해라, 너는 소(小)니까.”
킥킥, 즐겁다는 듯이, 설렌다는 듯이.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어두운 공간에 울려 퍼졌다.
끼리릭.
쇠창살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사내는 적발 적안의 소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낙인도 제대로 찍혀있고.”
소녀의 뒷목을 확인하며 말했다.
“별 반응도 없고.”
공허한 소녀의 눈앞에 손바닥을 흔드며 말했다.
“역시 사람 하나는 참 잘 골랐단 말이지.”
킬킬, 비웃음이었다.
“꼬마야.”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소녀의 고개가 움직였다.
“네 목적이 뭐니?”
“… 푸스탄트 죽이기.”
공허한 소녀의 눈과 마주친 사내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황홀함.
완벽함을 창조해낸 예술가들이 작품을 바라보는 눈빛과 유사했기에.
기계적인 대답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뇌, 각인….”
완벽하네,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시작해볼까.”
사내가 소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낡은 나무문 앞에 선 그는 문을 천천히 열었다.
악귀의 얼굴을 한 사내와 인형의 얼굴을 한 사내가 문 너머로 사라졌다.
짙은 어둠이 깔려 확인할 수 없는 문 너머로.
∴
오랜 시간 동안 땀을 흘리며 침대에 몸져누워있던 레이의 몸을 씻겨줄 사람이 필요했다.
강현은 남자였기에.
따로 사람을 불러야 할까 고민하던 중, 아멜리아는 자신이 레이를 씻겨주겠다며 나섰다.
“감사합니다, 공녀... 아멜리아 님”
레이의 목욕이 끝난 뒤, 아멜리아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려던 중.
공녀님이라고 부르려던 순간, 느껴진 아멜리아의 시선에 강현은 급히 말을 고쳤다.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주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아멜리아는 다시 밝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안에 숨은 어둠까지는 밝힐 수 없었다.
아멜리아도 레이를 걱정하고 있었으니.
“별말씀을요… 정말 괜찮으신 거죠…?”
걱정 섞인 목소리에 강현은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어른이기에, 아멜리아를 안심시켜줄 의무가 있었다.
“당연하죠, 오늘 즉위식이 끝나고 나면 멀쩡해질 겁니다.”
“그, 그런가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멜리아 님의 입장에선 레이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힘드실 텐데, 마음이 따듯하시네요.”
“다, 당연하죠, 레이 님이 연적이긴 하지만 친구… 인 걸요.”
연적이지만 어떻게 보면 고마운 사람이었다.
결국 강현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 준 것은 레이였다.
“그러십니까.”
“네, 네에….”
미소를 머금은 채, 기특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현의 시선을 도무지 견뎌낼 수 없던 아멜리아는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저렇게 다정하게 쳐다보는 건 역시 심장에 영 좋지 않았다.
“그, 그럼 먼저 출발하러 가볼게요. 함께 가고 싶었었는데….”
오늘은 성녀의 즉위식이 있는 날이었다.
당연히 아멜리아는 강현과 함께 즉위식에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강현은 레이를 보살핀다는 핑계를 대며 아멜리아만 즉위식으로 보냈다.
성녀와 관련된 일을 그녀에게 말할 순 없었기에.
“앞으로 시간은 많지 않습니까.”
강현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그렇긴 하죠…. 따, 딱히 아쉽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꽤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괜히 강현에게 걱정 끼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무심코 속마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예, 당연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그런가요오…. 그, 그럼 진짜로 가볼게요!”
어차피 즉위식이 끝나고 다시 만나러 오면 그만이었다.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 후 강현은 아멜리아를 배웅해준 뒤, 곧장 푸스탄트의 방에 들어갔다.
푸스탄 트는 얇은 천으로 자신의 지팡이를 닦고 있었다.
“준비됐어?”
“그래, 이제 성녀님께서 움직이는 것만을 기다리면 되겠구나.”
성녀가 성녀의 안식처에서 나와, 상트리움 외부로 빠져나가는 즉시, 엘리스가 소지하고 있는 표식으로 푸스탄트와 이동할 생각이었다.
“응.”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되어버린 레이를 깨우기 위해, 강현은 일이 순탄하게 풀리기만을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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