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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겜 속 중간보스와 히로인들이 내게 집착함-58화 (58/148)

〈 58화 〉 성녀의 축복 (1)

* * *

­잘 부탁할게.

­저만 믿으세요.

숙소에서 나온 강현은 곧장 대교회 1층, 선물 접수창구로 향했다.

비취색 빛을 은은하게 내뿜는 에메랄드로 변신한 엘리스가 담긴 상자를 접수원에게 건네준 뒤, 곧장 숙소로 향했다.

강현은 자신과 레이의 기구한 운명에 쓴맛을 삼켰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퀘스트가 나타났다.

그것도 레이가 지닌 영혼의 그릇이 손상된 탓에 위험하던 순간에 딱 맞춰서.

스텟 창과 스킬창, 인벤토리와 퀘스트를 준 스텟 창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고민 끝에 강현은 시스템과 신의 연관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흑적초.

회귀한 이후, 흑적초의 씨앗을 선물해준 시스템은 강현이 그토록 바라던 생력을 치료하는 약제사가 될 수 있게 해 주었다.

두 번째, 퀘스트가 등장한 타이밍.

전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는 듯이, 완벽한 타이밍이 아니던가.

그저 사람들의 믿음으로 불분명하게 존재하는 현대의 신들과 달리, 이 세계에는 신들이 실존하고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헤르피아와 신목, 세계수처럼.

이 세계는 SF도 사이버펑크의 세계도 아니다.

검과 마법의 판타지.

하지만 홀로그램 창과 생김새가 상당히 유사한 이 시스템의 알림창들은 절대 마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신들의 축복, 또는 기적, 권능.

어쨌든 신과의 연광성이 아닌 이상,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일단 행운으로 여기기로 했다.

기본적으로 강현은 시스템에게 감사해하고 조력자로서 신뢰하고 있었다.

플레이어와 대현자의 눈이라는 신급 특수 능력을 두 개 준 것으로 모라자, 흑적초와 신살자의 검, 엘리스를 선물해주었으니.

[퀘스트: 성녀의 축복]

[조건:성녀와 조우하십시오.]

[보상: 성녀의 축복.]

[성녀의 축복이라면 레이의 영혼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이르러서는 퀘스트를 내려줌으로써, 레이를 치료할 방법을 제시해주었다.

심지어 퀘스트 끝부분에 추가로 적힌 추신을 읽어봤을 때, 분명 작금의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상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누구신지는 몰라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강현은 자신의 시야 정중앙에 나타난 퀘스트 창을 향해 진심이 담긴 감사인사를 전했다.

당연히 시스템을 묵묵부답이었고, 기대도 안 했지만.

‘오랜만에 한 대 필까.’

하지만 답답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의 영혼에 새겨진 속박.

푸스탄트와의 연관성.

머리가 지끈거리며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던 순간, 그의 시야에 잡화점이 하나 들어왔다.

강현은 애연가였다.

현대에서 20살, 성인이 되자마자 흡연을 시작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원에서 독립한 뒤로 마땅히 기댈 곳이 없었던 강현에게 흡연시간은 잔잔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담배를 피우는 순간만큼은, 무거웠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었다.

잡화점에 들어가 볼까.

제자리에 서서, 잠시간 고민했던 강현은 다시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레이는 키스하는 것을 좋아했다.

흡연은 입냄새의 주범이다.

‘… 어떤 새끼인지 몰라도.’

레이의 영혼의 같잖은 속박을 걸어둔 녀석을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강현은 다짐했다.

‘분명 신, 또는 레이가 모친의 배 속에서 잉태되는 순간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고 했지….’

속박에 대해 알려주던 푸스탄트의 말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사흘이 지났다.

오랜 세월 동안 심해에 봉인되어있던 엘리스에게 사흘은 찰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강현과 함께하던 생활이 너무나도 익숙해진 탓일까.

사흘이라는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져 오기 시작했다.

빨리 끝내고 강현이 보고 싶다.

서둘러 레이를 치료해준 뒤, 다시 밝은 표정을 짓는 강현을 잔뜩 놀려주고 싶었다.

이미 말단으로 보이는 성기사들이 몇 번이나 검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성녀의 안식처 내부로 들어가는 것뿐.

그렇게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엘리스는 자신이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디어 가는 건가.’

딱히 긴장되지는 않았다.

즉위식까지 나흘이나 남았다는 사실을 조금 아쉬웠을 뿐.

그렇게 잠시 기다린 뒤, 이동이 멈추었다.

땅바닥에 내려둔 상태인 듯했다.

그리고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상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엘리스는 자신이 잠입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상자의 뚜껑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와아...”

한 소녀가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반지의 아름다운에 매료된 청색 눈동자에서는 신비로움과 신성함이 느껴져 왔다.

잔잔한 웨이브가 담긴 고운 머릿결을 지닌 여인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금색과 흰색이 섞인 드레스와, 다양한 보석이 박힌 황금의 로자리오를 목에 걸고 있는 여인.

성녀, 아리아였다.

“왜? 뭔데 그래?”

그리고 곧장 주변에 성녀뿐만이 아닌 또 다른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간의 연두색이 섞인 백발과 길쭉한 귀.

청록색 눈동자와 가볍지만 다소 노출도가 있는 상의와 치마.

엘프였다.

“라비, 이것 좀 봐보세요,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성녀의 이목을 끈다는 첫 번째 목적은 완수했다.

아리아의 반응에 흥미를 보인 라비가 그녀 옆에 앉아 상자 속 반지로 변신한 엘리스를 바라봤다.

“뭐, 예쁘네.”

제 나이에 맞게 아름답고 반짝이는 귀금속을 좋아하는 아리아와는 달리, 엘프인 라비는 귀금속에 별 관심이 없었다.

상자에 담긴 반지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세세하게 조각된 에메랄드와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는 반지의 디자인은 딱 봐도 장인의 손을 거친 장신구가 분명했으니.

하지만 무성한 잎이 솟아있는 상록수가 더 라비의 취향이었다.

인간이 아름답고 반짝이는 보석을 좋아하듯, 엘프는 뿌리 깊은 나무를 좋아했다.

‘… 분명 성녀 혼자 있을 거라 했는데.’

강현은 성녀의 안식처에 성녀 혼자 있을 거라 말했다.

또한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 방.

암컷 엘프가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원래 예상과 다른 상황인 것은 분명했다.

강현에게 텔레파시를 보내기 전, 엘리스는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누가 보내주신 걸까요?”

신비로운 눈동자를 반짝인 성녀는 상자에 함께 들어있던 작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강현… 푸스탄트님의 제자분이신가요?”

“그런 거 같은데? 그런 이상한 이름이 또 있겠어?”

이상한 이름?

엘리스는 순간 불쾌함을 느꼈다.

주인님의 이름이 얼마나 예쁜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강현의 이름이 특히 특이하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렇게 말하시면 안되죠. 저를 위해 아름다운 선물을 보내주신 감사한 분인데.”

“어… 음, 미안.”

성녀는 이미지에 걸맞게 상당히 꽤나 착실한 성격인 듯했다.

라비라고 불린 엘프 또한 별 의미 없이 내뱉은 말에 꾸중을 들어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빠르게 사과했다.

“아리아, 그게 제일 맘에 드나 봐?”

옅은 미소를 머금은 라비가 물었고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네….”

하지만 아리아의 표정은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은 소녀라고 말하기엔 거리감이 존재했다.

슬픔의 빛이 들어선 그녀의 눈동자는 살짝 처졌다.

“이강현이란 남자도 진짜 아깝네, 원래대로면 축복도 받았을 텐데.”

“그러게요….”

그 둘 사이의 대화에서 기이함을 느낀 엘리스는 ‘원래대로라면’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즉위식의 이벤트.

성녀가 가장 마음에 드는 선물을 보내준 사람을 선택해 직접 축복을 내려주는 이벤트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그 이벤트를 진행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즉위식이 제대로 치러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안타까워하는 그녀들의 말투를 봤을 때,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이거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일인데.’

강현과 푸스탄트는 두 가지의 경우의 수를 생각해뒀다.

전생처럼 성녀가 암살당하거나, 전생과 상황이 바뀐 지금, 그저 즉위식이 평화롭게 진행되거나.

하지만 지금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일단 조금 더 기다려보자.’

강현에게 상황을 보고하기 앞서, 최대한의 정보를 모으기로 한 엘리스는 숨을 죽인 채, 상황을 살폈다.

반지로 변신한 상태에서 숨을 죽인다는 것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아리아는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자신의 중지에 꼈다.

딱 맞는 크기의 아름다운 반지는 뽀얀 피부를 후광으로 달아둔 것처럼, 아름다움을 더욱 자랑하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

신탁을 받은 뒤, 항상 침울해져 있던 아리아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미소가 내심 기뻤던 라비는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가요?”

아리아는 은은한 미소를 품은 채, 자신의 손을 뒤집어가며 반지를 구경하고 있었다.

“… 축복해드릴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고, 아리아의 표정에는 다시 그늘이 드리웠다.

에휴, 라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잖아.”

“그러게요…. 이 선물들도 전부 돌려드려야겠죠.”

성녀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준 선물이다.

하지만 선물을 받은 성녀가 소멸한다면, 선물들도 전부 원래 주인들에게 돌아야 정상이다.

“뭐... 그렇긴 한데, 하나 정도는 몰래 들고 가도 괜찮지 않겠어?”

“당연히 안 괜찮죠.”

아리아가 라비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라비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받아내고는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너무 착실해서 탈이라니까?”

잘난 신 때문에 비정상적인 운명을 걷게 됐음에도 한결같이 착실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까지 작은 욕심조차 부리지 않았다.

사실 선물들을 일일이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어차피 즉위식의 이벤트인 성녀의 축복은 진행될 수 조차 없으니.

하지만 감사한 사람들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다면서 선물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라비는 그런 아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수록 점점 더 괴로워질뿐일 텐데.

물론 모든 인간들이 이기적이라는 편견을 지니고 있던 라비는 그런 아리아가 마음에 들었다.

지금도 그 편견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착실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랍니다.”

끝내 미련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잠시 동안 끼고 있던 반지를 다시 상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상자를 닫은 아리아가 다른 선물들을 살펴보고 있는 틈을 타, 라비는 반지가 담긴 상자를 몰래 챙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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