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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겜 속 중간보스와 히로인들이 내게 집착함-57화 (57/148)

〈 57화 〉 죽어야하는 성녀님 (3)

* * *

뜬금없지만, 레이는 아름답다.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그녀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주보고 있을 때면, 그 생명력을 나눠 받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이따금씩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 대화도 없이 지그시 시선을 마주하고만 있어도 행복했다.

한때, 수많은 죄를 저지르며 살아왔지만, 새로운 기회를 얻은 그녀는 세이브리스의 영웅이라 칭송받을 정도로 선한 인물이 되었다.

강현이 소중하다고 여겼던 인물은 푸스탄트 단 한 명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레이도 강현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됐다.

아멜리아와 엘리스도 마찬가지고.

또한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일깨워준, 고마운 사람이다.

강현은 그런 레이가 마음에 들었지만 아직 단 한 가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푸스탄트 암살과 관련된 이야기들.

“… 갑자기 왜 이런데냐.”

감작스러운 상황 속, 곧장 레이를 침대 위로 눕혀 상태를 확인해본 강현은 약간의 두통을 느꼈다.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오히려 너무나도 건강한 상태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픽하고 기절해버릴 만한 이유가 없었기에 강현은 푸스탄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뭔가 짚이는 것이라도 없냐는 의미였다.

의학에 관해선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푸스탄트가 잘 알고 있었으니.

하지만 푸스탄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기절했을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무슨 문제가 없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푸스탄트의 신경은 온전히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자신을 죽인 핏빛 칼날, 레이.

반신의 경지에 오른 푸스탄트는 직감적으로 상대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푸스탄트는 자신이 모종의 이유로 레이에게 죽어줬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레이와 만나게 된다면 그 모종의 이유가 무엇인지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얼굴조차 처음 보는 레이는 그저 어여쁜 소녀일 따름이었다.

‘… 다행이라고 해야 할꼬.’

일단 단서를 얻진 못했으나, 죽을 일은 없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그거 말고, 할배 집작 가는 거 없어?”

“… 뭣을 말하는 게냐?”

“뭐긴 뭐야. 할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거 전부.”

강현은 레이가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푸스탄트와 비교했을 때, 레이는 그저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이는 작은 별에 불과하다.

작을 별이 아무리 환하게 빛을 내뿜더라도, 온 세상을 밝게 비추는 태양보다 환할 수는 없는 법이다.

“방금 만나보고 뭐 떠오르는 건 없어?”

레이는 푸스탄트에게 사과하길 원했고, 강현도 레이의 제안을 환영했다.

또한 지금까지 시시해왔던 푸스탄트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왜 하필 푸스탄트를 암살하라는 의뢰를 받았으며 그를 어떻게 죽인 것인지.

푸스탄트가 너무나도 소중했다.

강현이 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푸스탄트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강현은 생각했다.

뭔가 특수한 방법을 이용하여 푸스탄트를 살해한 것이라고.

예를 들어 신격을 베어내는 검인 신살자의 검과 같은 아티팩트를 사용해서.

만약 그 방법을 사전에 미리 파악해둔다면, 혹시 모를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 미안하지만 전혀 모르겠구나.”

푸스탄트의 부정에, 강현은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강현은 차가운 물에 담가 두었던 수건을 꽉 짜낸 후, 다시 레이의 이마에 덮어주었다.

식은땀이 맺히고 이따금씩 앓는 소리를 내는 것으로 봐선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으리라.

이번 기회에 지금껏 함부로 말을 꺼내기조차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려 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강현과 푸스탄트는 봤다.

레이는 푸스탄트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 정신을 잃었으며.

그렇기에 무의식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레이와 푸스탄트 사이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분명 존재하리라고.

다음날 아침의 해가 떠오를 때까지.

레이를 그녀의 방으로 옮긴 강현은 밤새 그녀의 옆을 지키며 간호를 해주었다.

깨어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레이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질 뿐이었다.

만약 몸에 이상이 생긴 거라면 약과 치유 마법을 통해 레이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었다.

강현에겐 그만큼의 능력이 충분히 있었으니.

하지만 심적, 정신적인 문제는 강현이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저 심신 안정에 효과가 있는 약을 그녀의 입으로 흘려주는 것이 전부.

효과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한스러울 뿐이었지만.

강현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물수건을 수시로 갈아줄 수밖에 없었다.

“왜 계속 한숨을 쉬고 그래요, 그러다가 복 달아난다고요?”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말투로 나란히 앉은 강현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엘리스가 말했다.

고뇌와 답답함, 아쉬움과 미안함.

강현에게서 느껴지는 부정적 감정들은 엘리스의 입장에선 그리 반가운 감정들이 아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뭔 소리야, 한숨 쉬면 폐에 좋아.”

강현은 남에게 걱정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렇기에, 태연한 척 엘리스의 말을 반박했다.

“얘는 뭐가 문제길래 주인님 속을 이렇게 썩이는 거람.”

하지만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엘리스가 모를 리가 없었다.

빨리 감정 공유를 막는 법을 익혀야 할 텐데.

강현은 생각했다.

엘리스는 레이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의학에는 연이 없었으나, 그녀도 신격을 지닌 검신.

혹시라도 레이의 갑작스러운 기절과 관련된 뭔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마, 말도 안 돼…….”

그리고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엘리스의 얼굴에 짙은 경악이 물들었다.

엘리스는 자신이 느낀 것이 정말 맞는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기에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봤다.

“… 뭔데, 너 왜 그래?”

심상치 않은 엘리스의 반응에 강현이 긴장한 채로 물었다.

마치 기름칠이 덜 된 기계처럼 목을 돌리며 강현과 레이를 번갈아본 엘리스는 입을 열었다.

“영혼에 속박이 새겨졌던 흔적이 남아있어요. 그것 아주 강한 속박.”

“… 뭐라고?”

속박.

푸스탄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체와 영혼에 속박을 부여함으로써, 힘의 천칭에 대가를 지불한다.

지불한 대가만큼, 천칭의 수평을 맞추기 위한 힘을 얻게 된다.

마치 사람을 벨 수 없지만 사람을 지켜내는 수호의 검처럼.

그리고 그 속박은 레이의 영혼에 새겨져 있었다.

“… 엘리스의 말대로구나. 영혼에 새겨져 있던 속박이 파괴된 흔적이 남아있어.”

레이의 가슴에 손을 얹고 그녀의 영혼을 살펴본 푸스탄트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영혼의 새겨져 있던 속박의 파괴.

섬뜩한 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혹시라도 레이의 영혼에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강현이 푸스탄트에게 물었다.

“설마 영영 깨어나지 못한다는 건 아니지?”

강현은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힘을 기르겠다고 푸스탄트에게 말했었다.

레이는 소중한 사람이다.

강현에게 있어선 푸스탄트 다음으로 소중한 사람.

순서를 매기자면 2번째다.

상실의 고통.

외로움, 허전함, 무력함.

다시금 그 고통들을 느끼고 싶지 않았던 강현은 간절함을 담아, 푸스탄트에게 물었다.

“… 모르겠구나.”

잠시 신중하게 고민한 뒤, 푸스탄트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모르겠다는 건 무슨 말인데…?”

강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물기가 서린 두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푸스탄트와 엘리스는 그런 강현의 모습을 바라보며 괴로운 표정을 지은 채 침음을 흘렸다.

“최소한 지금 레이가 무슨 상태인지는 말해줘 봐. 나도 뭘 알아야지.”

푸스탄트 암살과 관련된 이야기.

속박의 정체.

지금 신경 쓸 것들이 아니었다.

반드시 레이를 다시 깨워내야만 한다.

“여기 물이 가득 담긴 수통이 있다. 또한 영혼이 담긴 그릇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할 게다.”

[1 위계 수 속성 마법: 워터 볼을 사용했습니다]

[시전자: 푸스탄트]

“그리고 레이에게 걸려있던 속박은 마치 수통을 담아둔 유리상자와 같은 게다.”

푸스탄트가 사용한 워터볼 주위에 정육면체의 모래가 생성되었다.

“그 속박은 지금 날카롭게 산산조각 난 상태.”

그리고 정육면체의 모래가 산산조각이 났다.

모래는 마치 깨진 유리파편처럼, 날카로운 파편의 형태를 취하고 워터 볼 주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 그리고 조금 잘못 건드는 순간.”

파편이 흔들렸다.

날카로운 파편은 워터볼을 찔렀고 찢어진 수통에서는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금 이게 레이의 상태다. 또한 속박이 산산조각 나버린 이상, 그 정체를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지.”

“그럼 죽는 거야? 레이는?”

“아니, 지금 당장은 죽지 않을 게다, 영혼을 담은 그릇에 약간 흠집이 생기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다.”

지금 당장 죽는 것이 아니라면 괜찮다.

이렇게 갑자기 레이를 떠나보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시간이 남은 만큼 기회는 충분히 남아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깨울 수 있는 거야?”

“속박의 잔재를 전부 제거한 뒤, 손상된 그릇을 수리하면 아마 깨어날 게다.”

영혼과 연혼의 그릇.

속박의 잔재.

이미 강현이 어찌해볼 수 있는 범위를 한참이나 벗어났다.

하지만 푸스탄트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할 수 있어?”

안심과 기대가 담긴 눈빛으로 푸스탄트를 올려다보며 강현이 물었다.

그런 강현의 눈빛에 괴로운 표정을 지은 푸스탄트는 고개를 저었다.

엘리스는 실망한 강현의 표정을 보기 두려워 고개를 돌리고 감정 공유를 끊어냈다.

“시도조차 못해볼 건 없겠지만, 성공률을 1푼도 되지 않을 게다. 제 아무리 신격을 지닌 존재라 할지라도 타인의 영혼을 건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뿐더러 영혼을 치유한다는 건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니.”

1푼, 1%도 미치지 못하는 성공률을 들은 강현은 앞이 깜깜해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에, 엘리스는…?”

“아시잖아요…….”

강현의 시선을 피하며 엘리스가 답했다.

검신의 경지에 오른 그녀는 진정한 신으로서 푸스탄트보다 더 높은 격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엘리스는 어디까지나 본체에서부터 떨어져 나온 영혼의 파편.

그중 검술만을 기억하고 있는 파편인 만큼, 영혼을 고치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엘리스는 본질은 신이 아니라 검에 불과하다.

그런 그녀가 인간의 영혼에 손을 댄다는 것 자체가 어불 성설이라는 뜻이었다.

“… 씨발.”

짧지만 많은 감정이 느껴지는 욕설이 작은 방 안에 메아리치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멀쩡히 잘 살다가, 속박의 파편이 갑자기 움직일 리는 없잖아.”

“… 네 말이 뭔지 안다, 분명 나와 레이의 연관성을 찾고자 하겠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나는 강현이 네가 아는 만큼 알고 있느리라.”

푸스탄트에게 반응한 속박의 파편들.

분명 구려도 너무 구린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럼 어떡해야 하는데…….”

절절한 강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어차피 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기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푸스탄트와 엘리스는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레이를 바라보며 더욱 깊은 좌절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을 때쯤.

하늘색의 창이 강현의 시야에 나타났다.

[서브 퀘스트: 성녀의 축복.]

[퀘스트 창을 열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십시오.]

스탯 창, 스킬창, 인벤토리가 아닌 새로운 알림 창은, 퀘스트의 탄생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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