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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겜 속 중간보스와 히로인들이 내게 집착함-56화 (56/148)

〈 56화 〉 죽어야하는 성녀님 (2)

* * *

성녀의 안식처.

아리아는 사람들의 소중한 마음이 담긴, 하지만 보답해줄 수 없는 소중한 선물들을 하나씩 확인하고 있었다.

“죽고 나서 어디로 갈 거야?”

그런 아리아에게 라비가 물었다.

자기가 한 말임에도 라비는 작게 웃었다.

죽어서 어딜 가겠는가.

가봤자, 저세상 말곤 없을 거다.

“으음… 모르겠네요.”

“벌써 1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아무런 계획도 안 세워둔 거야?”

아리아에 대답에 어이없어하며 라비가 다시금 물었다.

“아, 그냥 때려치워야 할까.”

장난스럽게 말하는 라비에게 아리아가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너무해요.”

아리아가 볼맨 소리를 내며 말했다.

신탁을 받아들인 것은, 함께하기로 한 라비의 존재가 가장 큰 이유였기에.

“흐흐, 농담이야, 농담.”

아리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라비가 대답했다.

“막상 계획을 세우려고 해도… 너무 힘들더라고요.”

1주일이 지나고, 더 시간이 흐른다면 아리아라는 소녀이자 성녀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암살당한 불쌍한 여인이 되어야 한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전부 사라진다는 거였다.

존재의 소멸.

너무나도 두렵고 무거운 책임을 감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성녀로써, 신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만큼, 자신의 소명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그래?”

장수종, 엘프인 라비에게 있어서 아리아와 함께한 시간들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기준에서 보자면, 긴 시간을 함께 해온 만큼, 아리아의 고뇌와 고통을 모를 수가 없었다.

“으음, 제국은 어때?”

“페론티아 말인가요?”

“응, 아무래도 용사를 찾을 거면 사람이 제일 많은 제국이 제일 낫지 않겠어?”

“… 그렇네요.”

잠시 고민한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껏, 많은 용사들을 배출해낸 제국이 가장 가능성이 높을 것이 분명했기에.

“아카데미도 있고. 모험가 길드는 제국이 제일 세력이 크지 않아?”

“네, 저도 그렇게 알고 있답니다.”

용사를 찾아라.

그것이 성녀에게 주어진 신성한 임무의 주된 목적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그 목적이 전부는 아니었다.

용사를 찾음과 동시에 성녀로써의 신성력과 힘을 길러라.

무엇을 위해 힘을 기르라는 신탁을 내려주신 건 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아리아는 묵묵하고 성실하게 따를 뿐이었다.

여러 일이 있었으나, 강현이 푸스탄트와 함께 옆 나라인 성국, 상트 리움까지 온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암살당하는 성녀의 구출.

그리고 엘리스를 위장시켜 푸스탄트의 표식을 지닌 채, 성녀의 장신구로 변하여 언제든지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선물로 위장한 엘리스가 성녀에게까지 도달하기 위해선, 선물을 넘겨야 한다.

그리고 마감일은 즉위식 1주일 전인 내일.

“다녀왔느냐.”

“응.”

내일을 위해, 푸스탄트의 방에 강현과 엘리스가 모였다.

“선물상자는?”

“여기 있다.”

푸스탄트가 건네준 나무상자를 받아 든 강현은 상자를 열고 안을 확인했다.

나무 상자를 가득 채운 솜털의 중앙에는 원형으로 얇은 홈이 파여 있었다.

반지로 변신한 엘리스를 놔둘 자리였다.

“딱 좋네.”

확인을 마친 강현은 상자를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잘해줄 수 있지?”

“당연하죠, 보상받으려면 열심히 해야죠.”

성녀를 살리겠다는 진지한 목적을 지닌 강현과 푸스탄트와 달리, 엘리스의 관심은 오직 다른 곳으로 쏠려있었다.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을 때, 강현에게 받기로 한 보상.

그 보상을 위해서 엘리스는 무려 1주일이라는 시간을 강현과 떨어져 지내야 함에도 역할을 받아들였다.

“…응.”

보상에 관해서는 명확히 정해둔 것이 없었다.

엘리스는 소원권 같은 느낌으로 사용할 생각인지, 일단 킵해두겠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 말이 있는데.”

강현은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흐음, 말하려무나.”

“이번 계획에 누가 도와주기로 했거든.”

“… 핏빛 칼날 말이냐?”

“응.”

강현의 말을 들은 푸스탄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불쾌감이 아닌 고민 때문에.

반신인 자신을 암살할 힘이 없을 것이 분명했지만, 자신을 암살한 핏빛 칼날.

분명 그녀에게 죽어줘야만 했던 이유가 존재할 것이 분명했으며, 아직 강현이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보지 못한 푸스탄트는 죽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슈 레이츠 백 작가, 상트 리움.

최대한 그녀와 동선이 겹치지 않게끔, 심혈을 기울였다.

“그냥 의견을 물어본 거야. 암살자가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여태까지 강현은 푸스탄트에게 레이를 자주 칭찬했다.

푸스탄트는 자신에게 있어서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레이는... 훗날 더욱 가까운 관계가 될지도 모르는 여인이었기에.

‘역시 좀 그렇겠지.’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암살했던 여인이다.

푸스탄트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제안일 것이 분명했다.

“… 확실히 네 말이 맞구나, 든든한 조력자가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

핏빛 칼날은 이미 전생과 180도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또한 아들이라 여기고 있는 소중한 제자와 예사롭지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 여인이며, 언제까지고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푸스탄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강현의 제안을 긍정했다.

“… 정말 괜찮은 거야?”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레이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엔 이견이 없었으나, 푸스탄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강현에게 있어서 그 누구보다 푸스탄트가 제일 중요하다.

뒷골목 거지의 삶을 벗어나게 해 준 은인이다, 처음으로 자신의 가족이 되어주고 많은 것들을 알려준 스승이니까.

“괜찮으니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겠느냐.”

푸스탄트 또한 걱정과 불안함에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라도, 소중한 강현을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겪어야 했을 상황이다.

이미 마음에 준비는 얼마든지 해둔 상태였다.

“그럼 데리고 올게?”

푸스탄트가 레이를 꺼려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다녀오려무나.”

강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레이의 방으로 향했다.

레이에게 푸스탄트란 인물은 어떠한 존재인가.

가장 먼저, 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똑같이, 이 시대의 성인군자라고 생각하며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또한 강현에게 있어선 그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인 만큼, 중요한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의뢰를 받고 자신의 검에 희생당한 피해자들 중 하나였다.

그런 레이에게 있어서, 푸스탄트와 다시 만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강현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 이상, 푸스탄트를 멀리할 수도 없으니.

‘용서받을 수 있을까…….’

푸스탄트를 왜 죽였을까.

레이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자신은 멍청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의뢰의 보상이 엄청나다고 해도, 푸스탄트를 죽이는 것은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돈을 위해 푸스탄트의 심장을 꿰뚫고 그를 살해했다.

강현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고통을 남겼으며 그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푸스탄트에게 사죄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이며, 강현과 함께 있기 위해선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힘내자.”

푸스탄트의 앞에 서기 너무나도 두려웠으나, 레이는 스스로를 격려했다.

만약 용서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그에게 속죄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강현 이리라.

“들어오세요.”

문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를 들은 강현은, 야심한 밤에 언제든지 찾아와 달라면서 건네준 여분의 열쇠를 자물쇠에 꽂은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준비됐어?”

“네.”

레이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앞으로 자신이 만나야 할 인물은 자신이 죽인 사람이자, 강현의 아버지 같은 존재니까.

“그럼 가자.”

마찬가지로 강현도 상당히 긴장한 상태다.

“…네.”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레이는 강현과 함께 푸스탄트의 방으로 들어왔다.

레이는 푸스탄트와 만나게 되었다.

여전한 백색의 머리카락과 수염, 그리고 청색 눈동자.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의 기억임이 분명한데도, 낯설기만 한 기억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눈동자를 지닌 적발 적안의 소녀가 검을 쥔 채로 자세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아무런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감정’ 그 자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인형처럼.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은 백발 청안의 노인의 심장을 관통했다.

‘미안하구나, 용서해다오.’

칼에 심장이 꿰뚫려,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푸스탄트였다.

누군가를 죽였음에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었다.

‘이게 무슨…….’

낯선 기억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할 때쯤.

“으윽...!”

엄청난 현기증, 어지러움, 두통이 한 번에 몰려왔다.

시야가 점멸하고 몸에 힘이 풀리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털썩.

“레, 레이야...?!”

갑작스렇게 제자리에서 쓰러진 레이는 보며 다급하게 강현이 외쳤다.

그리고 레이는 정신을 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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