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죽어야하는 성녀님 (1)
* * *
혼자 남은 엘리스가 방에 혼자 남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
방을 건너온 강현은 레이와 나란히 침대맡에 앉아 무의미한 시간을 축내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냐.’
엘리스와 동침했을 때는 이렇게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긴장하지 않았었다.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얇은 셔츠를 입은 채, 딱딱하게 굳어있는 레이.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저 레이에게 눕자고 권유하면 그만이었다.
후우.
긴장을 풀기 위해, 강현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레이가 몸을 움찔 떨었다.
“슬슬 눕자. 어서 자야지.”
긴장한 상대를 위해, 상황을 주도해줘야 한다.
의무는 아니었지만 남자로서의 책임감으로 강현이 말했다.
“네, 네...!”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레이가 답했다.
다소곳하게 모인 그녀의 두 무릎 위로 올라간 양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레이가 먼저 움직였다.
침대 위로 올라가 정자세로 누운 그녀는 마치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 긴장했어?”
절로 미소지가 지어졌다.
아까 당당하게 첫 키스를 가져갔던 여인은 어디 갔을까.
긴장한 레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강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당연하죠. 사랑하는 사람과의 동침인데... 긴장하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
굳은살이 박혀 거칠었지만, 따듯한 그의 손을 느끼며 레이가 오히려 되물었다.
“그, 그렇긴 하네... 하하...”
예상치 못한 레이의 직설적인 대답에 당황한 강현의 손이 멈춰 섰다.
“가, 강현 씨도 빨리 오셔서 누워요.”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과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지만 불순한 느낌을 억누르며 레이가 말했다.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강현은 침대 위로 올라갔지만, 눕진 못했다.
“잠시만요.”
“응? 왜?”
“그... 주무실 때 다 입고 주무시나요?”
“... 아, 그렇네.”
강현은 외출용 상하의를 입은 상태였다.
원래의 강현은 편한 반바지를 입고 자거나 속옷만 입고 잤다.
“...”
레이는 침묵한 채, 강현을 지그시 바라봤다.
분명 강현이 엘리스와 동침했을 때도, 수면복으로 갈아입고 잠에 들었을 거다.
자신에게도 똑같이 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벗으라고 직접 말할 수는 없었기에 무언의 시선을 보냈다.
“흠흠... 그럼.”
“잠시만요...!”
레이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강현이 옷을 벗기 시작하려고 할 때, 레이가 상체를 세우며 다급하게 말했다.
“왜?”
“제가 벗겨드리고 싶어요.”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레이가 당당하게 옷을 벗겨주겠다고 말했다.
이유는 없었으며 일종의 욕구일 뿐이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 그러니까, 왜?”
“그냥 하고 싶은데... 안될까요?”
“뭐... 안될 건 없는데.”
조금 부끄러운 게 문제일 뿐이다.
레이도 용기 내서 부탁한 것일 텐데,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부탁할게.”
“네...!”
기쁜 표정을 지은 레이가 침대에서 일어나 강현의 앞에 섰다.
레이의 손이 움직였다.
“그, 그럼 시작할게요?”
“응.”
조금 얼떨떨하긴 했지만, 강현은 가만히 서서 레이가 시작하길 기다렸다.
낯 뜨거운 상황 속에서, 기뻐하고 있는 레이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레이의 목울대가 한차례 껄렁인 뒤, 첫 번째 단추가 풀어졌다.
뒤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단추까지.
“하아... 하아...”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레이의 숨결이 뜨거워졌다.
그녀의 숨결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며, 모든 단추가 풀어졌다.
“와아...”
그리고 그 사이로 모이는 강현의 몸에 레이가 작게 감탄했다.
멋지게 조각된 복근과 가슴은 단단해 보였다.
“흠흠... 레이야?”
강렬한 레이의 시선을 느끼며 헛기침을 내뱉은 강현이 불렀다.
부끄러우니까 빨리 해달라는 일종의 요청.
“네, 넷...!”
넋을 놓고 있었단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레이는 급하게 대답하고 그의 셔츠를 벗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전히 노출된 그의 상체.
레이의 시선은 재빠르게 움직이며 강현의 몸을 뇌리에 새기기 시작했다.
“멋지네요... 예, 예전에는 키도 비슷했던 거 같은데.”
“그랬었나? 아무래도 한창 성장할 때니까 그렇겠지.”
한창 성장할 때.
레이는 그 표현에 집중했다.
지금도 이런데 더 성장한다면 얼마나 더 멋있어질까.
“그, 그렇죠.”
“응...”
다시금 레이의 손이 움직였다.
강현의 복부로 움직인 그녀의 손은 그의 복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점차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을 느끼며 강현의 눈치를 살폈다.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해 얼굴을 붉게 물들인 그는 먼 산을 바라보듯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막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몸을 조금 더 더듬어도 괜찮은 것이 아닐까.
레이는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따듯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그의 몸을 촉감을.
만약 상트리움에서 벗어나, 그와 헤어진다고 해도 이 날의 감각을 떠올리고 싶었다.
“읏...”
강현은 이를 꽉 깨물고 레이의 손이 멈추길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만지는 거야.’
이제 슬슬 충분히 허락해줬다 생각이 들 때쯤 강현은 레이의 손을 붙잡았다.
“레이야?”
“... 조, 조금만 더 만지면 안 돼요...?”
고개를 살짝 치켜세운 채 눈을 마주하며 레이가 물었다.
하지만 적당한 선을 그어야 하지 않겠는가.
레이가 자신을 좋아해서 그런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요구를 일일이 다 들어주는 건,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지 않다.
“안...”
레이의 요청을 거절하려 한 순간, 그녀가 보내는 간절한 눈빛을 본 강현이 말을 멈췄다.
“알겠어.”
뭐 조금 만지다고 닳는 것도 아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리고 약 5분 정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레이의 손이 멈춰 섰다.
“만족했어?”
“네.”
그리고 레이의 손이 바지를 내리기 위해 움직이려 할 때, 강현은 입고 있던 바지를 쑤욱, 내렸다.
바로 눈앞에서 바지를 벗겨줄 기회를 놓친 레이의 허망한 눈빛을 피하며 강현이 말했다.
“이건 안돼.”
그리고 급하게 침대 위로 올라간 강현은 이불을 덮고 자신의 하체를 가렸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 만큼 부끄러웠으니.
“... 알겠어요.”
레이는 아쉬워했지만 곧장 침대 위로 올라와 강현과 나란히 누웠다.
강현의 방향으로 몸을 돌린 레이는 양팔을 뻗었다.
“이리 와요.”
강현과 엘리스는 매일 밤마다 껴안고 잔다고 했다.
그렇기에 레이도 강현이 자신이 품 안에 안기길 재촉했다.
“... 알겠어.”
그리고 레이의 품에 안긴 강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와 함께 잠에 들었다.
∴
상트 리움엔 이상한 소문이 한 개 돌기 시작했다.
한 남자에 관한 소문.
여성편력이 심한 한 바람둥이가 매일 서로 다른 여자를 옆에 두고 데이트를 즐긴다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은 주인공은 누구인가.
‘... 억울한데 틀린 말이 아니네.’
강현이었다.
레이, 아멜리아, 엘리스.
그 셋은 한 가지 규칙을 정했다.
상트리움에서 보내게 될 1 달이라는 시간 동안, 한 명씩 번갈아가며 강현과 하루를 보내자는 일종의 평화 협정이었다.
정작 본인의 의견도 구하지 않고 맺어진 협정이었으나, 강현은 불만을 가질 처지가 아니었다.
단 하루 만에 두 여인과 키스를 하고 한 여인의 이마에 입을 맞춘 자신이었기에.
“오, 오늘도 즐거웠어요... 헤헤...”
해가 지고 늦은 밤.
사람들이 북적이던 거리는 오후에 비해 비교적 한산해졌다.
거기에 인적이 드문 골목길 사이.
강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아멜리아가 말했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무표정을 유지하는 능력이 특출 난 아멜리아였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개해 있었다.
강현의 앞에만 서면 그저 사랑에 빠진 소녀가 되어버리는 아멜리아였지만, 그녀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왜인가.
상트리움에 오고 강현과 만난 후 20일이 지난고, 총 8번의 데이트를 즐긴 끝에, 드디어 강현과 손을 잡은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고작 그의 손을 잡기 위해서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던가.
아멜리아는 그의 손을 잡을 수 있게 해 주었던 자신의 용맹함을 스스로 극찬하고 있었다.
지금도 강현과 맞잡은 손에서부터 따듯한 온기가 느껴져오고 있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공녀님.”
“네, 네에...”
싱긋, 미소 짓는 강현의 모습에 아멜리아의 시선이 절로 피해졌다.
어쩜 그저 미소를 짓는 것일 뿐임에도 저렇게 근사할 수가 있을까.
마치 강렬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착각에 눈이 부셔 제대로 마주할 수 조차 없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불편함을 느꼈다.
호칭.
이제 손도 잡고 이마에 입도 맞추었던 사이인데, 공녀라는 호칭은 너무 딱딱하지 않은 않은가.
레이와 엘리스처럼 아멜리아도 다정하게 본명으로 불리고 싶었다.
“저, 저기...! 강현 님!”
강현에게 부탁한다면 얼마든지 들어줄 거다.
용기를 낸 아멜리아가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 그게 있잖아요오...”
하지만 막상 말하려고 하니 말문이 막혀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앞쪽으로 모은 양손에 힘을 주며 아멜리아는 막힐 말문을 뚫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했다.
“아.”
강현은 그런 아멜리아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뭔가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공녀님.”
“네, 네에...?”
“실례하겠습니다.”
강현은 아멜리아의 이마에 손을 대고 정돈된 앞머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한번 맞춰주었다.
“이걸 원하셨던 거죠?”
다 안다는 듯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강현이 물었다.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좋았다.
그것도 엄청나게.
“그, 그.”
갑작스러운 강현의 행동에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격해진 심장박동은 속이 불편해질 정도로 강렬했으며 숨조차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두 번째 입맞춤.
아멜리아는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원래의 목적도 깔끔하게 잊어버린 채.
하지만 강인한 정신력은 이럴 때 빛을 발해주었다.
곧장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아멜리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요오...”
“... 네?”
아멜리아의 반응에 잘못짚었다고 깨달은 강현은 수치심을 느낌과 동시에 당황하며 물었다.
“아, 아니에요...! 좋은데... 아니, 엄청 좋은데... 그게 아니라...”
다행히 싫은 모양은 아니었던 지라 안심할 수 있었던 강현은 느긋하게 아멜리아의 말을 기다렸다.
“이,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눈을 질끈 감은 아멜리아가 물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한 심장을 느끼며 대답을 기다렸다.
“알겠습니다, 아멜리아 님.”
“흐읏...!”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강현의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숨을 삼켰다.
마치 세계수의 숲에서 서식한다는 정령들의 목소리를 집적 듣게 된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도 마침 호칭에 관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그렇군요...! 저, 저만 너무 딱딱하게 불러주시길래...”
“흐흐, 제가 먼저 말씀드릴 걸 그랬네요, 앞으로는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 아멜리아 님.”
“네, 네에... 헤헤...”
수줍게, 또한 밝게 웃으며 아멜리아가 대답했다.
“그, 그리고 한번 더 해주시면, 안될까요...?”
“뭘 말입니까?”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아멜리아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강현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저절로 장난을 쳐버리고 말았다.
“그거요...”
직접 말할 만큼의 용기는 없었던 아멜리아가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뽀뽀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당장 레이와 엘리스만 해도 매일 최소 한 번씩은 키스를 하지 않았던가.
강현은 다시금 아멜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슬슬 쌀쌀해지고 있으니, 얼른 들어가시죠 공녀님.”
“네에...”
몽롱한 눈을 뜬 아멜리아가 숙소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강현은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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