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개판 (5)
* * *
강현에게 할 말을 떠올리고 입에 담으려 할 때쯤, 머릿속에 한 풍경이 절로 그려졌다.
창문 너머로 은은한 달빛이 흘러들어는 작은 방안.
입고 있던 옷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나체가 된 강현과 엘리스.
하나가 된 그들은 쾌락을 탐하며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내면에서 화가 끌어올렸다.
아쉽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 뭐를 해?”
주어가 생략된 레이의 물음에 강현이 되물었다.
“성관계요.”
레이는 만약 강현이 엘리스와 관계를 맺었다고 답한다며 지금 당장 그를 억지로 덮쳐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그건 왜...?”
“만약 하셨다고 하면 선수를 뺏기기 전에 제가 먼저 임신해버리게요. 아니면 벌써 엘리스 님과 아이를 가지셨나요?
공허한 눈으로 지그시 낯 뜨거운 말을 내뱉은 레이의 모습에 강현은 신중히 말을 골랐다.
정조의 위기를 넘어선 인간으로서의 위기였다.
신체나이, 14살을 임신시킨 쓰레기가 될 위기.
물론 정신적인 나이는 아니지만.
“아니. 전생이랑 회귀한 이후에 단 한 번도 성관계를 가져본 적 없어, 엘리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여자랑.”
강현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은 적이 없는 처녀가 좋다.
잘은 모르겠지만 대다수의 남자들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다.
특히 이 세계는 여성의 처녀성을 현대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여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라는 생각에 강현은 은근슬쩍 자신이 동정이라는 사실을 어필했다.
“그, 그런가요.”
‘다행이야...!’
그리고 강현의 대답을 들은 레이는 크게 안심하며 속으로 환호했다.
아직 그와의 첫 경험을 빼앗기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었다니.
엄청난 정보라는 의외의 소득.
곧장 터질 것만 같았던 화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음을 느꼈다.
“못 믿겠어요.”
하지만 바로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후의 일이 어떻게 될 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혹시라도 첫 번째의 자리를 빼앗길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레이는 이 상황을 이용해 강현에게 한 가지 약속을 받아내기로 했다.
“못 믿어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물론 바로 믿어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이성과 매일 밤마다 같은 침대에서 잠에 드는데, 성관계는 맺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강현은 상대의 입장에서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강현 씨 저는 처녀예요, 다른 남자랑 손도 잡아본 적 없고 이성과 단 둘이 모험가 의뢰를 수행한 적도 없어요. 유부남을 제외하면요.”
요한의 동생, 요루.
레이는 요루와 함께 파티를 맺고 가끔씩 의뢰를 해결했었다.
물론 요루는 올해로 6살이 된 딸을 가진 유부남이다.
“강현 씨가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제가 처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드릴 수 있어요.”
레이의 말은 너무 낯 뜨거운 말이었지만 한없이 진지했다.
여자는 처녀막이 있다.
물론 성관계가 아닌 다른 이유로 찢어진다고 하지만.
“... 괜찮아, 굳이 확인시켜주는 게 아니라도 믿을 수 있으니까.”
“언젠가 강현 씨에게 제 처녀를 드리고 씨앗을 받아 아이를 배고 싶어요.”
“그, 그렇구나.”
동정성에 관한 이야기 하던 중, 갑자기 바뀐 주제에 당황한 탓에 절로 말이 더듬어졌다.
강현은 레이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고 얼마나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지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평생 강현 씨한테만 안기고 싶어요, 다른 남자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돼주신 분이니까.”
“... 고마워.”
“전 강현 씨가 아니면 안돼요.”
... 강현 씨 옆에 있을 수 없다면 그냥 죽어버릴 거예요.
레이는 이으려던 말을 삼켰다.
지금 강현을 협박하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강현 씨는 제가 아니어도 괜찮잖아요.”
레이는 입장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강현을 생각하는 것과, 강현이 자신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달랐다.
“... 그건.”
강현은 레이의 말을 부정하려다가 멈췄다.
레이의 감정은 자신이 가진 감정과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레이가 그랬던 거처럼.
다른 여성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가?
아니다.
선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엘리스에게 이성적인 매력과 성적 흥분을 느꼈단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오직 레이를 위해 살며,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가?
아니다.
레이가 좋은 여자고 호감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저 허울 좋은 소리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쓰레기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강현은 레이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신중하게 할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만날 때마다 매번 새로운 여자를 옆에 두고 계시잖아요.”
뉘앙스의 차이였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슈레이츠 백작가에선 아멜리아.
상트리움에선 엘리스.
“레이야, 네 말대로야. 하지만 다른 여자들보다 네가 제일이라고 생각해.”
레이가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할 수 없었다.
강현은 레이를 사랑하지 않았기에.
좋아한다고도 말하기 힘들었다.
딱 호감을 지닌 정도.
하지만 방금 했던 말은 무엇보다 진심이었다.
“... 그런가요.”
강현의 진심에 레이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크게 기뻐했다.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괴로운 과거를 주었던 여인에서 이만큼 올라왔다는 사실이었으니.
“흠흠,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상관없다는 거예요.”
“... 응? 뭐가 상관없어?”
“강현 씨를 독점하고 싶지만, 강현 씨가 다른 여자를 품겠다고 하셔도 상관없어요, 강현 씨의 옆에만 있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서 괴로워하지 않고 행복해하실 수만 있으시다면요.”
슈레이츠 백작가에서 봤던 강현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아멜리아의 마음을 거절했던 날의 레이는 결심했다.
강현이 괴로워하지 않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고.
어차피 첫 번째, 정실의 자리는 그 누구에게도 내어줄 생각이 없으니까.
“그건...”
이 세계는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의 세계다.
다른 여인들을 품는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의 차이는 있었지만 인간에겐 기본적으로 독점욕이 존재한다.
그리고 레이는 그 욕구까지 포기할 수 있다고 하는 중이었다.
그만큼 간절하다는 걸까.
아니면 지난 슈레이츠 백작령의 일이 문제일까.
아마 두 개 다라고 강현은 예상했다.
“저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강현 씨의 곁에서 힘이 되어주면 좋겠고요.”
“알겠어.”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은 강현은 일단 대답했다.
다른 여인과 인연이 생길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엘리스만큼은 강현에게 있어서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다.
신살자의 검인 엘리스와는 아마 평생을 같이하게 될 테니까.
검의 성능을 떠나서 1년간 매일같이 함께하며 쌓아온 정들도 있었다.
“그런데, 딱 한 개만 약속해주시면 안 될까요?”
진지한 말투로 레이가 물었다.
“무슨 약속?”
“강현 씨와 가장 먼저 관계를 갖는 건 저였으면 좋겠어요.”
20살이 되기 전까지, 강현과 함께 있을 수 없다.
서로 각자의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언제 어디서 어떤 여자가 강현을 낚아채갈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에 레이는 이 방법을 떠올렸다.
아직 애매한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제안.
이 역 속이 맺어진다면 강현의 첫 경험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이를 가장 먼저 갖게 될 것이 분명했기에.
“아... 관계... 말이지?”
갑작스러운 레이의 부탁에 당황한 강현의 눈동자가 떨리고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네.”
강현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으니.
나는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제가 없는 동안 다른 여인과 성욕을 해결해도 괜찮아요, 딱 첫 관계만 저랑 맺어주신다고 약속해주신다면.”
“아니, 레이야. 너무 극단적...”
“지금 당장 저를 안아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레이가 말을 끊었다.
레이는 극단적이고 일방적이었다.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듯한 말투.
강현은 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레이의 눈동자에선 더 이상의 한기와 날카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오히려 덜덜 떨리는 동공과 붉어진 얼굴에서는 부끄러움과 긴장감이 느껴져 왔다.
“아직 제 몸은 14살의 몸이니까, 성적으로도 흥분하실 수 없을 거고요.”
강현은 아멜리아의 마음을 거절했을 때, 그녀가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레이도 지금은 14살의 신체일 뿐.
“제가 강현 씨가 만족하실 수 있을 만큼 성장할 때까지만 기다려주세요, 그러면... 강현 씨가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얼굴이 붉어질수록, 레이의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헤, 헤픈 여자라고 생각하시면 안돼요...!”
“당연하지. 그만큼 나를 좋아해 준다는 거잖아?”
강현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레이의 마음이 고마웠으며 이 상황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기에.
“저, 회귀하고나서, 8년 동안 강현 씨만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강현 씨랑 같이 있기 위해서 매일매일 빨리 20살이 되길 빌고 있어요, 그러니까... 딱 한 번만 약속해주세요.”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이것만큼은 안된다.
강현이 지금껏 단 한 번도 관계를 맺지 않았단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레이는 간절함을 담아 이야기했다.
“응, 당연하지.”
어차피 그 정도 약속쯤이야, 얼마든지 지켜줄 수 있다.
“... 고마워요.”
“응.”
어째선지 모르겠으나, 레이의 화도 풀렸다.
“나야 믿어줘서 고맙지.”
“... 뭘 믿어요?”
“... 응?”
뭔가 이상함이 느껴졌다.
약속을 함으로써 이 상황이 끝을 맞이한 게 아녔던가?
“뭐, 뭐긴 엘리스랑 아무 일도 없었다는...”
“저는 아직 못 믿겠어요.”
“그, 그렇구나...”
확실히 레이가 그 사실을 믿어준다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강현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함을 느꼈다.
“저랑도 한 침대에서 자주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만약 저한테 절대 손대지 않으시면 믿어드릴게요.”
레이는 사실 강현의 말을 믿었다.
그가 절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겠지만.
그런데 솔직히 부럽지 않은가.
레이도 강현과 한 침대에서 다정하게 서로를 껴안고 잠에 들고 싶었다.
어디서 굴러온 한 여우가 한 짓을 왜 자신은 못해야 하는가.
“... 알겠어.”
“좋아요.”
담담하게 대답한 레이였지만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었다.
마치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억누르듯이.
그리고 강현은 레이의 술수에 말려들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유대감은 뭐...’
나중에 채워도 괜찮겠지.
“그리고 엘리스 님과 어디까지 하셨나요?”
“...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요, 절대 화 안 낼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뭐... 예를 들어서?”
“스킨십이요.”
솔직히 켕기는 것은 딱히 없었기에 강현은 잠시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네가 오늘 하루 동안 봤던 거 이상으로 한 적은 없는데?”
“아... 그래요? 손잡고, 팔짱 끼고, 뒤에서 끌어안고, 서로 음식을 먹여주고, 머리 쓰다듬어주는 거 정도네요?”
별거 없다는 듯이 당당하게 말하는 강현의 모습에 다시금 화가 느껴져 왔다.
“... 레이야?”
레이의 분위기가 다시 어두워졌다.
입만 웃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서 섬뜩함이 느껴져 왔다.
“혹시 키스는 하셨나요?”
“당연히 아니지. 애초에 엘리스가 아니라... 읍...!”
대답하던 중, 레이가 강현의 뒷목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끌어당기고 강현의 입에 입술을 맞댔다.
“하움...”
눈을 감고 입술에서부터 따듯하고 축축한 레이의 혀가 느껴져 왔다.
다물어진 입술 사이를 누비는 그녀의 혀는 마치 문 열어달라고 두드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잠시 당황했던 강현은 천천히 입술을 열어주었고, 레이의 혀가 자신의 입 속으로 들어론 것을 느끼고 혀를 움직였다.
첫 키스.
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강현도 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입 속에서 서로의 혀가 얽히고설키기 시작했다.
능숙치못하고 어색한 키스.
“하움... 쪼옥...”
하지만 가슴을 간지럽히는 애틋함이 키스를 더욱 격렬하게 만들어갔다.
“하아...”
“가, 갑자기... 뭐해.”
레이의 입술이 멀어졌다.
서로의 입술 사이에서 한가닥의 투명한 실이 쭉 늘어다가 뚝하고 끊겼다.
“혹시 뺏길 수도 있잖아요, 강현 씨의 첫 키스.”
“그, 그렇구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상기된 레이의 얼굴이 요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젠 제 거지만요.”
레이는 만족스러운 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