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개판 (4)
* * *
엘리스의 말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물론 장본인인 강현과 엘리스의 입장에서.
엘리스의 본질은 신살자의 검이라는 검이고, 강현은 검의 주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제삼자의 입장에선, 한 여인이 어떤 남성의 소유물이라고 자신을 칭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다.
그것도 사랑을 고백했던 레이와, 어째서 레이와 함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때 마음을 품었던 아멜리아에게는 더욱.
‘이게 진짜...’
엘리스는 이 상황을 노렸다.
지금 엘리스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언제 어디서든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엘리스.
곧 폭발할 것만 같은 엄청난 분노를 품은 레이.
슬픈 눈으로 쳐다보다가도 엘리스에게 부러운 눈길을 보내는 아멜리아.
‘정신 차리자, 정신.’
처음 겪는 상황 속에서 강현은 정신줄을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강현 씨, 저랑 했던 약속은 기억해주고 계신 건가요?”
“응, 당연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진중한 표정을 지은 채.
레이와 나눈 약속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레이가 언급하는 약속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강현은 일단 레이가 무슨 말을 하지는 것인지 아는 척했다.
일단 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준다.
만사가 솔직하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괜히 레이의 화에 부채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무슨 약속이었죠?”
“...”
집중.
표정이 아주 약간이라도 일그러지면 안 된다.
아주 약간이 틈이라도 보인 순간엔 거짓말이 들켜버릴 거다.
“... 우리 둘이서 나눴던 소중한 약속이잖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는 좀 부끄러워.”
강현 음 마음속으로 레이에게 깊은 사과를 한 뒤 시선을 피했다.
부끄러운 척 하기.
“그, 그런가요...”
효과는 굉장했다.
레이도 부끄러웠던 것인지, 살짝 시선을 피했고 차가웠던 그녀의 표정에 다시 활기가 조금 돌기 시작했다.
물론 레이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엔 한참이나 부족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오며 얻은 지혜다.
분노한 상대와 대화하기 위해선 자신이 말할 틈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냥 상대가 말을 멈췄을 때 말한다고 괜찮은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진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괜찮으니까 말해주세요, 강현 씨의 입으로 듣고 싶어요.”
“... 응...?”
강현은 마음속으로 좆됐다라는 3개의 글자를 반복해서 생각했다.
“... 정말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궁지에 몰렸고 강현은 어떻게든 레이가 말하는 약속이 뭔지 기억해내야 했다.
강현의 기억력은 플레이어 능력의 보조를 받음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
기억해냈다.
레이와 나눴던 소중한 약속들과 사소한 약속들을 전부.
이 상황과 가장 연관성이 높은 약속을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레이, 네가 내 검과 방패가 되어준다 했었잖아.”
“그래요.”
‘나이스...!’
찍은 답이 다행히도 정답이었단 사실에 크게 안심할 수 있었다.
“어머...”
“그런...”
엘리스와 아멜리아의 반응은 재각각이었지만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오마주.
한 검사가 타인의 검과 방패가 되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은 당신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어줄 수 있다는 각별한 충성의 서약이었으니까.
아멜리아도 5살이 되던 해, 히엘에게 오마주를 받았었다.
“근데 강현 씨는 쌍검사라도 하실 생각이신가 봐요. 저 하나로는 부족해서.”
레이가 날카로운 말투로 말하며 째려보기 시작했다.
웃으면 안되죠?
웃는 순간, 용광로에다가 녹여버릴 거니까 그런 줄 알아라.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엘리스의 물음에 강현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제가 주인님께 레이에 관해서 자주 들었어요, 강현 씨는 절대 부족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을걸요?”
엘리스가 애틋한 시선을 강현에게 보내며 말했다.
적절한 지원에 강현은 엘리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아... 그래요?”
하지만 레이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엘리스의 말이 도발로 다가왔다.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자신과 엘리스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강현은 잠시 의아해했으나, 이제 말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사람의 손은 두 개... 으읍...!”
“그게 사실은...!”
강현은 다급하게 손을 뻗어 엘리스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 사실은?”
“엘리스는 검이야.”
한없이 진지한 강현의 말.
반응은 말할 것도 없이 차가웠다.
“가, 강현 님. 그건 저희도 들어서 알고 있는... 흐읏...”
소심하게 말을 이어가던 아멜리아는 강현과 눈을 마주치자 작은 신음을 내며 시선을 피했다.
여전하네.
강현은 씁쓸하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 그래서 저는 방패 하라는 말인가요? 제가 지금 역할놀이하고 싶은 걸로 보이세요?”
레이는 더욱 분노했다.
흥분한 것인지 높아진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움이 서려있었다.
“아니 말 그대로 검이야, 지금은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해있는 거고.”
“... 네?”
“엘리스 변신해봐.”
“... 그게 무슨 소리세요, 주인님.”
그리고 엘리스는 당황한 척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평생 같이 자기 싫으면 그렇게 해. 아니, 그냥 얼굴도 보지 말자, 다시 바다에다가 던져버리게.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이 상황에서 계속 장난이나 치는 네가 훨씬 너무하다는 생각은 안해봤어?
강현과 엘리스의 정신의 대화가 이어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둘의 표정을 본 레이와 아멜리아는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없어 의아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 알겠어요.”
결국 포기한 엘리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한 자루의 검으로.
“... 어?”
“뭐, 뭐죠 이게...?”
“말했잖아, 엘리스는 검이라고. 말 그대로 검이 변신한 게 엘리스거든. 이제 다시 돌아와도 돼.”
“말했죠? 주인님의 검이라고.”
흐흐, 엘리스가 잘게 웃으며 말하자 어안이 벙벙해진 레이와 아멜리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레이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진짜 검한테 강현의 검이라는 자리를 빼앗겼다고 질투하고 있었던 것인가.
엄청난 수치심이 몰려왔다.
‘... 부럽다.’
그에 반해 아멜리아는 큰 심경의 변화가 없었다.
검이면 뭐 어떤가.
아니 검이라서 더 좋은 거다.
그만큼 강현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 테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 검신 엘리스가 사용했던 신살자의 검이야, 그리고 이 검에는 엘리스의 영혼이 깃들어져 있는 거고.”
“그, 그게 말이 되나요?”
“몰라. 사람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게 신이 아니겠어?”
검신 엘리스.
검사들의 칭송받는 검술의 신인만큼, 레이가 모를 수가 없었다.
아멜리아 또한 여러 가지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해온 만큼 잘 알고 있었고.
“... 제, 제가 무슨 오해를... 죄송해요.”
“괜찮아, 당연히 오해할 수도 있지.”
다행히도 상황이 좋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안심한 강현은 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으나.
“... 그런데 말이에요.”
레이의 분위기가 다시 되돌아왔다.
무겁고 날카로운 분위기와 눈빛.
서리가 서린 목소리.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무, 무슨 상관이긴. 레이, 네가 생각하는 만큼 별 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거지.”
“흐으응... 그런가요?”
침음을 흘린 레이.
긴장한 강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딱 검과 검의 주인의 관계라고 하기엔 좀 이상한 거 같은데요.”
그리고 강현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깨달았다.
“별 관계가 아닌데, 매일 밤마다 한침대에서 잠드시나요?”
“그, 그건...”
“그리고 서로 다정하게 음식도 먹여주시던데요.”
차가운 레이의 눈빛을 도저히 마주할 수 없었던 강현은 고개를 돌렸다.
이건 오해가 아닌 확실한 사실이니까.
“맞아요, 매일 잠에 드실 때마다 제 품에 안겨오신 건 주인님이시면서.”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엘리스가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냐는 의미가 담긴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강현이 엘리스를 노려봤다.
흥.
그리고 머릿속에서부터, 뾰로통한 콧방귀 소리가 들려왔다.
‘별 관계가 아니라고?’
매일같이 자신에게 선을 긋고 철저하게 지키던 그였지만 은근히 즐기고 좋아하고 있단 사실을 엘리스는 느낄 수 있었다.
매일 밤마다 잠에 들고 안겨들 때마다 아랫배를 찌르던 단단한 물체의 감촉까지.
엘리스는 강현의 말이 너무 불만스러웠다.
“그건 또 어떻게 안거야...?”
하지만 강현에게 있어서 지금은 엘리스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알긴요, 1년 만에 다시 만난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여자한테 주인님이라 불리면서 다정하게 팔짱 끼고 다니길래 미행했거든요.”
“그, 그렇구나...”
강현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쳐나갈지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얻을 수 있었던 결론은 없었다.
레이가 불만스러워하는 점들은 전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 따로 얘기 좀 할까요?”
“응, 알겠어.”
그냥 지금은 레이가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직 숙소를 잡지 못했거든요, 잠깐 내려갔다 올게요.”
“같이 갈까?”
“... 아뇨.”
잠시 망설인 레이는 동행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레이가 떠나고 방 안에는 3명만 남게 되었다.
“... 그, 공녀님은 어쩐 일로 여기에...”
“저, 저도 따로 오...”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란 아멜리아는 고개를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레이는 같은 여관에 숙소를 잡았다.
강현은 맞은편 방.
레이를 따라 맞은편 방으로 이동한 강현은 레이와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강현은 정자세를 취한 뒤, 레이의 말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직 애매한 그와의 관계.
불만스럽고 질투 나긴 했지만, 그의 행동을 질책할 만한 입장이 되지 못했기에 더욱 신중하게 할 말들을 골라야 했다.
결국 더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무조건 자신이며 더 아쉬워할 사람은 자신이다.
주제넘지 않게, 강현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했다.
메르시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엉뚱한 요한에 대한 원망이 생겨났다.
“강현 씨.”
“응, 말해.”
“혹시,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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