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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겜 속 중간보스와 히로인들이 내게 집착함-49화 (49/148)

〈 49화 〉 개판 (3)

* * *

분노, 질투.

둘 중 무엇이냐 묻는다면 질투에 의한 분노라고 말해야 타당하리라.

호칭으로 미루어 보아, 강현은 엘리스라는 노예를 들였다.

레이는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은 것을 서운해했으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강현이라면 분명 사연이 딱한 노예를 거둬들인 것일 테니까.

물론 그 노예가 아름답고 몸매도 좋은...

‘생각해보니 화나네?’

갑자기 이해할 수 없어졌다.

그냥 귀띔이라도 해줄 순 있는 게 아닌가?

비록 연인 사이는 아니지만 매일 통신 스크롤로 연락을 주고받고, 미래를 약속한 사이다.

아카데미에 함께 가자는 약속이었지만.

레이는 회귀 후, 그와 재회했던 13살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20살이 되기 위해 6년이라는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만날 때마다 새로운 여자를 옆에 두고 있는 걸로 모자라서 매일 밤마다 한 침대에서 잠에 드는 사이라고?

‘내가 있는데?’

그 생각에 내면에서부터 깊은 빡침이 끓어올랐다.

다른 여인을 품는 거?

괜찮다.

그렇게 해서 강현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귀족들은 하나같이 전부 여러 명의 아내와 남편을 두는 데, 강현이라고 안될 게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순서라는 게 있다.

자신은 아직 손도 잡지 못했고 딱 한번 이마에 키스를 받은 것이 전부인데 매일 밤마다 다른 여인을 침대 위에서 뒹군다고?

용납할 수 없었다.

차마 헤픈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내색할 순 없었지만 얼마나 그에게 안기고 싶었던가.

그의 밑에 깔려 하나가 된 후, 사랑과 쾌락을 탐하고 싶었다.

매일 밤마다 그를 떠올리며 달아오른 몸을 외로이 해결하던 자신이 너무 안쓰러워졌다.

‘거기다 뭐라고?’

주인님의 검?

그 한마디가 기폭제가 되었다.

강현의 검이 되겠다.

회귀하기 직전부터, 회귀한 이후.

지금까지 총 8년.

강현을 위해 싸우는 검이자 그를 지켜주는 방패가 되겠다고 다짐한 레이에게 있어서 강현의 검이라는 자리만큼은 절대 양보해줄 수 없는 자리였다.

강현과 그의 검이 되기로 약속했다.

아카데미든 지옥이든 따라가겠다고.

그런데 고작 1년 사이에 자신의 자리를 처음 보는 여우가 꿰차고 있다는 사실을 레이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 레, 레이 님? 어디 가시나요?”

당황한 듯, 아멜리아가 물었다.

“저, 저기요...!?”

레이의 손을 붙잡은 아멜리아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레이를 멈춰 세울 순 없었다.

“놔.”

레이의 단호한 말투에 아멜리아는 순간 넋을 잃었다.

공녀인 자신에게 반말을 했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라앉은 레이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분노와 살벌한 적의 때문이었다.

“가, 가서 뭐하시려고!”

아멜리아는 표독스럽게 외쳤다.

같은 처지에 놓인 동지로써, 더 이상 추해지는 것만큼은 막아주고 싶었기에.

“... 몰라요, 그런데 이대로 그냥 가면 안 될 거 같다는 확신이 들어요.”

끌어 오르는 분노.

최고 단계로 조정된 엘리스의 위험도.

이대로 손이나 빨면서 기다렸다가는 첫 번째의 자리를 빼앗기고 만다는 확신이 들었다.

레이는 위험한 순간을 위해 안배해둔 최후의 수단은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작정 명, 구멍 뚫린 고무막.

강현의 숙소를 덮친 뒤, 상황이 위급하다면 강현을 덮쳐버리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냥 강현 씨의 행복을 빌어주고 떠나는 게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아멜리아는 레이의 손을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하나의 질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냐는 질문이었다.

“... 그건 강현 씨를 향한 공녀님의 마음이 딱 그 정도일뿐인 거죠.”

“...!”

레이의 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고백도 못해보고 거절당한 제 마음을? 지금 이 순간 저도 당신만큼이나 엘리스라는 노예의 자리가 제 자리면 좋겠다고요...!”

하지만 불가능하다.

자신은 강현에게 있어서 이성으로도 볼 수 없는 존재이기에.

더 이상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잘 알고 계시네요, 그래서 제가 지금 가려하는 거예요. 그게 공녀님과 저의 차이고요.”

“...!”

레이의 말에 아멜리아는 두 눈을 크게 뜨고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간절함이 달랐다.

사랑을 쟁취하겠다는 투지가 달랐다.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나약한 사람이 되었던가.

그 사실을 깨달은 아멜리아의 손에 담겨있던 힘이 점점 풀려갔고 레이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물론 공녀의 손을 뿌리치는 건 쉬운 일이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 무슨 의미시죠?”

“비록 고백도 못하고 차였지만, 저 아직 강현 씨를 사랑해요. 이대로 끝내고 싶진 않다고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찾은 첫사랑이란 말인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신랑감을 찾아봤지만 강현만큼 자신을 떨리게 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

“좋아요.”

“... 그럼 가죠.”

레이와 아멜리아는 강현이 머문 숙소로 발을 옮겼다.

“오늘 진짜 재밌었어요.”

싱긋, 눈웃음을 지은 엘리스가 의자에 앉은 강현의 무릎 위로 살포시 앉으며 말했다.

“재밌긴 했지, 근데 뭐하냐?”

그런 엘리스의 행동에 당황한 강현이 최대한 침착을 유지한 채 물었다.

그리고 엘리스가 신살자의 검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미행당하고 있었어요.

“그게 무슨...”

그리고 더욱 뜬금없는 엘리스의 말에 놀란 강현은 주변을 살피며 신살자의 검을 집어 들었다.

“아니, 누가 미행하고 있던 거야?”

강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미행을 당했다면 미행하고 있는 이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지만, 사람이 많은 상트 리움의 거리에서 기척을 느끼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2명이었어요. 처음에는 저도 그냥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숙소로 들어오려던 중에 엄청난 적의를 보내더라고요.

­아니, 적의보단 살기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려나.

“... 한가한 소리 말고, 그래서 지금은 돌아갔어?”

­아뇨, 지금 숙소로 다가오고 있어요. 싸울 준비를 하셔야 될 거 같아요.

“무슨...”

강현은 곧장 검을 빼들고 마법을 사용할 준비를 한 채 방문을 바라봤다.

기척을 느꼈다.

두 명의 발걸음이 방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후우...”

강현은 계획을 세웠다.

미행자들이 방에 들어온 순간, 이 방안에 결계를 친 다음 상대의 전투력을 파악한다.

생명이 위험해지는 순간, 축복을 사용해서라도 적을 격퇴하고 목적을 심문한다는 일련의 계획.

점점 가까워진 발걸음을 느끼면 강현은 자세를 잡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쾅! 쾅! 쾅!

세 차례에 걸쳐 문을 두들기며 소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강현 씨, 레이에요, 문 좀 열어주실래요?”

미행인의 정체는 레이였다.

“... 응?”

­누구야?

당황한 강현에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엘리스가 물었다.

“통신 스크롤.”

­아.

강현의 짧은 대답에 엘리스도 미행인의 정체와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쾅쾅쾅!

“강현 씨,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응, 잠깐만!”

다급하게 대답한 강현은 상황이 절대 좋지 못함을 깨달았다.

엘리스는 숙소에 들어올 때쯤, 엄청난 적의와 살기를 느꼈다고 했다.

왜인가.

강현은 숙소에 들어오기 전 엘리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좆됐다.’

상황 파악을 끝낸 강현은 자물쇠를 열려던 손을 멈칫하고 세웠다.

“... 너는 뭐하냐?”

“뭐긴 뭐예요, 주인님의 오랜 동료분께 인사라도 드리려 하는 거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엘리스가 물었다.

“그냥 검으로 있어주면 안 돼?”

“어차피 들을 거 다 듣고 볼 거 다 봤을 텐데, 지금 숨는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 그렇긴 한데...”

“강현 씨? 없는 척하지 마세요.”

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잔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짙게 깔려 있었다.

‘도망갈까?’

진지하게 고민해봤지만 설마 살해라도 당하겠는가.

“절대 이상한 소리 안 하겠다고 약속해, 무조건 협조적으로 행동해준다고.”

“당연하죠.”

“...”

너무 쉽게 수긍한 탓에 오히려 더 못 미더웠지만, 결국 강현은 방의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고, 공녀님...?”

방문을 열고 강현은 레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방문 너머에는 레이와 아멜리아가 함께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얼굴을 붉힌 아멜리아가 강현의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받아주었고.

“아뇨, 잘 못 지냈어요.”

차가운 말투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지독한 무표정을 짓고 있는 레이가 대답했다.

“들어가도 될까요?”

“으, 응... 어서 들어와.”

강현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저는 엘리스라고 해요. 레이라고 하셨죠? 주인님께 자주 들었어요.”

엘리스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눈은 웃지 않은 채 레이에게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레이도 엘리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인사를 건넸다.

“... 다들 한잔씩 마셔.”

방에 배치된 테이블을 중심으로 의자에 앉은 여인들의 앞에 홍차를 한잔씩 내어주며 강현이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아...”

아멜리아는 총자를 받으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괜히 왔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숨통을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존재했다.

강현과 마주 보고 말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모든 감정들이 사라지고 오직 행복함 많이 느껴졌으니까.

‘이렇게 쉬우면 어떡하나요...!’

아멜리아는 너무나도 쉬운 여자인 자신을 자책하며 강현이 내어준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는 홍차에 놀란 아멜리아는 감탄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강현 씨.”

레이가 말했다.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팔짱을 끼고 있는 레이의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게 강자의 위압감이구나, 강현은 실감했다.

위압감만 놓고 본다면 푸스탄트의 영역 내부에서 느껴지던 위압감과 동등한 수준이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절로 나고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응, 왜?”

강현은 최대한 평점심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왔으나 강현은 그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이 아니다.

“... 저는 강현 씨에게 무엇인가요?”

“그, 그건...”

상상 이상으로 묵직한 레이의 질문에 강현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은 잘못된 대답은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날카로웠기에.

“소중한 사람이지.”

“... 그래요?”

대답이 맘에 들었던 듯, 레이의 표정이 아주 잠시 동안 누그러졌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는 택도 없었다.

레이의 분노가 100이라면 겨우 1 정도 줄지 않았을까.

“그럼 이 엘리스라는 분과 어떤 관계신가요?”

“그건...”

잠시 고민했다.

검과 검의 주인의 관계였지만 그걸로는 정확한 설명이 될 수 없었으니.

“미행하시면서 들으신 거 아닌가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엘리스가 레이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다리를 꼬는 행동이 도발로 느껴져 왔다.

“뭐, 그리 대단한 관계는 아니에요, 저는 주인님의 소유물이자 검이죠.”

“...”

엘리스를 바라보는 레이의 눈빛이 더욱 차갑고 날카로워졌다.

레이가 테이블 밑의 손으로 바지를 꽉 쥐었다.

올라오는 분노를 겨우겨우 참아내고 있는 듯, 레이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당장 검을 뽑아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아니, 너는 무슨 말을... 레이야, 일단 진정해봐. 내가 지금 설명해줄테니까.”

99가 되었던 레이의 분노가 200정도 되었음을 깨달은 강현이 다급하게 말했다.

“강현님...”

아멜리아는 슬픈 표정을 지은 채 강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 개판이네.’

차라리 오늘 아침에 사람들에게 끌려간 푸스탄트나 따라갈 걸.

강현은 진심으로 후회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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