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개판 (2)
* * *
푸스탄트는 오랜 세월 동안 세계를 방랑하며 선행을 베풀어왔다.
당연히 그만큼 좋은 인연들을 수없이 맺어왔고.
그리고 성녀의 즉위식을 위해 성국의 수도, 상트리움으로 모인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다.
지난해, 슈레이츠 백작가의 몬스터 습격들 대비하기 위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였을 때보다 더욱 많은 인구밀도를 보이고 있었다.
“... 다행이다.”
숙소를 잡고 다음 날 아침.
푸스탄트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 수많은 인파에 휩쓸린 걸 보면 언젠가 만났던 사람들과 담소라도 나누고 있겠지.
강현은 자신까지 인파에 휩쓸리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푸스탄트의 유일한 제자라는 지위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으니.
기껏 세계 최고의 휴양지까지 와서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피곤함을 얻는 건 사양이다.
“그러게요.”
흐흥, 기분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엘리스가 답했다.
그녀는 유리상자 안에 진열된 아름다운 장신구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엘리스는 장신구로 변신하여 성녀의 이목을 끓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아름다운 장신구로 변해야만 하고, 보석상은 좋은 후보들이 즐비해있다.
“이건 어떠십니까? 서방에 위치한 작은 왕국의 세공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든 목걸이입니다.”
“어머, 이것도 엄청 예쁘네요.”
엘리스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하자 보석상의 주인이 얼굴을 붉혔다.
엘리스의 외적인 부분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우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겉껍질을 벗겨내면 변태가 숨어있는데.
“하하, 남성분은 어떠십니까? 아리따운 연인분께 드릴 선물로 이만한 게 없을 텐데요.”
“네, 뭐...”
보석상 주인의 착각에 대해서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강현은 그저 익숙한 상황에 지난날을 떠올렸다.
슈레이츠 백작가의 마을에서 박백화를 팔던 상인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때는 에밀리아와 함께였었지.
“...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올게요. 잘 봤어요.”
강현이 우울함을 느끼고 있단 사실을 깨달은 엘리스는 곧장 강현의 손을 붙잡고 가게에서 나왔다.
“갑자기 어디가?”
엘리스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강현이 물었다.
“주인님, 저 배고픈데 밥 먹으러 가요.”
엘리스에게 있어서 지금은 기껏 얻은 강현과의 데이트 기회이자 인간들의 축제를 즐길 기회다.
파트너의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것은 사양이었기에, 엘리스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 그래, 그러자.”
엘리스의 돌발행동에 잠시 당황했으나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즐겁게 놀고 휴식을 취하기로 한 건데, 혼자 우울해하고 있으면 같이 있는 사람에게도 예의가 아니겠지.
어차피 밥 먹을 필요도 없으면서,라고 생각한 강현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엘리스와 강현은 함께 점심을 해결한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아침부터 강현의 숙소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강현을 미행한 여인이 한 명 있었다.
“주, 주인님...?!”
그리고 엘리스가 강현을 부르는 호칭을 들은 아멜리아는 경악했다.
주인님이라니, 설마 강현이 노예를 사들인 걸까.
그것도 저렇게 미색이 뛰어난 노예를.
‘저는... 왜...’
노예에게 패배감과 굴욕감을 느낀 아멜리아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누군데 강현 씨랑 보석상에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아멜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아멜리아의 시야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마치 누군가를 미행하듯, 골목길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는 적발 적안의 아름다운 여인.
“... 레이 님?”
“공녀님?”
∴
여느 때처럼, 모험가 의뢰를 완수하고 고아원의 아이들을 만나고 길드로 돌아온 날이었다.
길드의 대문을 열고 들어온 레이는 교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모험가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항상 접수대를 지키고 있던 메르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레이, 왔냐?”
은색 모험가패를 목에 걸고 있는 중년 남성이 레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바르탄씨, 무슨 일인가요?”
“그게... 메르시가 또 잔뜩 화나서 뛰쳐나갔다.”
“... 또 요한이 문제예요?”
“메르시가 근무 중에 뛰쳐나가는 게 그것 말고 더 있겠냐.”
레이는 모험가 길드, 세이브리스 지부에서 약 8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다른 모험가들 중, 레이보다 더 오랜 세월을 보낸 이가 허다했다.
모험가 길드의 얼굴마담이다, 실질적인 업무들의 총책임자.
메르시의 분노는 우락부락한 모험가들조차 겁먹게 만들기 충분했다.
“... 이번엔 또 뭐예요?”
“마스터가 소개받았된다.”
“소개요? 무슨 소개를 요한이 받아요?”
“당연히 여자 소개지.”
중년의 모험가, 바르탄의 대답을 들은 레이는 상황의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평소대로 하면 여기쯤에서...
“레이야, 네가 둘 좀 잘 화해시켜봐.”
이렇게 요청이 들어오기에.
“... 죄송해요, 제가 들려야 할 곳을 깜빡해서.”
레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험가 길드에서 빠져나왔다.
지금 같을 때 메르시를 어설프게 위로해주려 해선 안된다.
잘못 걸리면 다음날 아침의 해가 뜰 때까지 억지로 술을 마시며 메르시의 푸념을 들어줘야 한다.
적어도 사흘에서 일주일간은 조심스럽게 처신할 필요가 있었다.
“하아...”
레이는 마을 공원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메르시와 요한이 티격태격, 다투는 모습도 레이에게는 부러울 따름이었다.
아무리 서로가 미워도 매일같이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니까.
“못 본 지 얼마나 됐지...”
벌써 1년이다.
슈레이츠 백작가에서 헤어지고 나서 단 한 번도 강현과 만나지 못했다.
매일같이 통신 스크롤로 연락을 주고받고는 있으나, 겨우 그 정도로 레이의 성이 찰 리가 없었다.
‘검술을 수련하시고 있다 하셨었는데...’
레이에게 있어서 검술이란 무엇인가.
이 세상 그 누구와 비교해도 절대 꿇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최고의 장점이다.
그런 만큼, 강현의 수련을 도와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레이는 강현에게 검술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항상 상상했다.
“앞으로 6년...”
레이는 어서 20살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면 매일 그와 함께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6년이란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져 슬플 뿐이었다.
“... 응?”
그렇게 혼자 사색에 빠져있을 때, 허리춤에서 마나가 느껴져 왔다.
강현과 연결된 통신 스크롤.
레이는 항상 통신 스크롤을 가죽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통신 스크롤에는 강현이 성국, 헤르피아로 향할 예정이라고 적혀있었다.
“... 성녀가 벌써?”
성녀의 탄생에 레이는 놀랐다.
성녀가 탄생하고 암살당하는 것은 4년 후의 이야기인데.
‘성국에 가면... 강현 씨랑 만날 수 있어.’
그리고 결정을 내리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현도 성녀가 암살당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대비해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즉위식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그를 돕는다면 함께 있을 수 있다.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한들, 1 달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에게 적어도 하루라는 시간 정도는 할애해줄 거란 확신을 지닌 채 헤르피아로 향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곧장 마차를 수배한 레이는 헤르피아로 향했다.
나흘이라는 시간에 걸쳐 도착한 레이는 곧장 거리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가능하다면 강현을 직접 찾아서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어떻게 반응하실까.’
설레는 마음을 품은 채, 미소를 지은 레이는 주변을 둘러보던 중, 발견했다.
“... 강현 씨...!”
1년 만의 재회.
반가움이 터져 나오며 곧장 강현에게 달려가려던 레이의 발이 멈춰 섰다.
“저건 누구지...?”
흑발 흑안의 성인 여성.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여성이 강현의 팔에 팔짱을 끼고 있었다.
“가족... 은 아닐 텐데...?”
강현은 말했다.
푸스탄트가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어째서 강현은 재회할 때마다, 새로운 여자를 옆에 두고 있는 걸까.
그리고 저 여자는 누구고 강현과 어떤 사이이길래, 저렇게 딱 달라붙어있는 것인가.
“... 좋아.”
레이는 섣불리 행동하기 전, 강현을 미행하여 정보를 얻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길가에 위치한 보석상.
30분 정도 흐르고 강현과 엘리스라는 여인이 보석상에서 함께 나왔다.
서로 손을 잡은 채.
“누군데 강현 씨랑 보석상에서...!”
그 다정한 모습에 엄청난 질투를 느낀 레이가 말했다.
아직 자신도 이마에 키스는 받았지만 강현과 손도 잡지 못했기에.
일단 그들을 따라 다시 이동하려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레이 님?”
“공녀님?”
∴
“거기서 뭐하고 계신 건가요?”
어색한 사이.
예상치도 못한 만남과 상황.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이였다.
“근처를 지나가던 중이었답니다.”
차마 강현을 미행하고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순 없었기에, 아멜리아는 능숙하게 거짓말로 대답했다.
“...”
물론 레이는 믿지 않았다.
드럼통 뒤에 숨어 있는 모습에서 강한 동질감이 느껴져 왔으니.
“그, 그렇다면 레이 님은 뭐하고 계신 건가요?”
“보시는 대로죠.”
레이는 당당하게 아멜리아의 질문을 일축했다.
“... 그렇군요.”
그런 레이를 보며 아멜리아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한때는 적이었다고 생각했고, 강현의 선택을 받은 부러운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했기에.
물론 착각이었다.
“따라오세요.”
“네?”
“이러다가 놓치면 어떡하려고요.”
슬픔에 잠긴 아멜리아와 달리, 레이는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자신이 없는 틈을 노려 강현의 옆자리를 꿰찬 엘리스에게 정실의 자리를 빼앗길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
레이는 아멜리아의 손을 붙잡고 강현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다급하게 레이에게서 벗어나려 했던 아멜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자연스럽게 레이에게 끌려간다면, 미행한 것이 아니라 끌려다닌 것이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 네!”
이대로 자연스럽게 끌려다니자, 아멜리아는 생각했다.
그렇게 레이와 아멜리아는 강현을 미행했다.
강현과 엘리스라는 여인은 마치 연인의 데이트처럼, 상트리움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식사를 하고, 여러 가지 공연들을 관람하고.
그리고 해가 지자 숙소로 되돌아갔다.
‘... 그렇게 위험하진 않아.’
오늘 하루 동안 미행한 결과, 데이트라기보다는 강현이 끌려다니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강현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지만.
레이는 엘리스의 위험도를 하향 조절했다.
적의 위험도를 판단하고 전투에 대비하는 것은 검사로서의 기본 소양이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반면 아멜리아가 느낀 감정은 그저 부러움과 그리움이었다.
자신도 강현과 함께 슈 레이츠 백 작가의 마을에서 데이트를 즐겼을 때가 있었으니.
물론 행복하고 즐겁기만 한 데이트는 아니었지만.
“그냥 각방 쓰자니까?”
하지만 강현의 목소리가 돌아가려던 아멜리아의 발검음을 멈춰 세웠다.
“뭐...?”
“방금...”
레이와 아멜리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각방이에요, 돈만 아깝잖아요.”
“그게 무슨 사이인데.”
“으음... 매일 한 침대에서 잠드는 사이? 그리고 주인님과 주인님의 검인 사이죠.”
그리고 엘리스의 말에 그녀들은 자신이 헛것을 들은 게 아님을 확신했다.
“... 들어가자.”
아무런 부정도 하지 않은 강현이 엘리스와 함께 숙소로 들어갔다.
“잘됐네요.”
아직 그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아멜리아는 그저 강현의 행복을 축하해주고 떠나려 했다.
더 이상 머물러봤자 마음만 더 아파질 것이 분명했기에.
히엘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장 공작가로 돌아가고 싶었다.
“... 레이 님? 어디 가시나요...?”
하지만 레이는 달랐다.
한 침대에서 잠드는 사이, 주인님의 검.
레이로써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저, 저기요...!?”
성큼성큼, 숙소를 향해 걸어가는 레이의 표정을 봐버렸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속, 눈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지독하리만치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무표정은 마치 폭풍 전의 고요가 절로 떠올랐다.
“놔.”
그 표정에 아멜리아는 위험을 느꼈다.
어쩌면 살인사건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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