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성국 헤르피아 (3)
* * *
“뭘요. 그런데 주인님, 저는 이길 수 있나요?”
검신, 엘리스가 상대라면 푸스탄트도 한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
“당연히 못 이기지. 진심으로 묻는 거야?”
아직 인간의 모습을 한 엘리스의 정확한 전투력을 파악하진 못했으나, 검신의 경지에 도달한 엘리스를 상대로 승리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신과 인간의 차이는 천지차이라는 표현으로도 전부 담아낼 수 없는 것이었으니.
“으음... 그럼 다른 건 어때요?”
엘리스가 장난기 서린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깨와 윗가슴이 드러난 짧은 검은색의 드레스를 입은 엘리스는 길고 날씬한 다리를 천천히 꼬았다
그와 동시에 턱을 괴어 저절로 상체가 숙여졌다.
볼륨감이 넘치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 사이에 형성된 가슴골이 더욱 깊숙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아... 최고야... 귀여워...’
1년간 함께 해온 강현은 흠잡을 곳이 없는 남자였다.
여러 번의 유혹에도 선을 넘지 않으려 했다.
아마 레이라는 여인때문이겠지.
매사에 보이는 사려 깊은 태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을 돕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 외 여러 가지 장점들을 열거하자면 끝도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도 남자였으며, 여자에 익숙지 않았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자신의 몸을 은근슬쩍 훑고 있는 강현의 시선을 즐거움과 동시에 평생 느껴보지 못한 짜릿함을 맛보게 해 주었다.
“다른 거라니, 뭐가?”
“예를 들어서 침대 위라던가?”
“... 또 이상한 소리 할래?”
강현은 질렸다는 듯이 게슴츠레한 눈을 뜨며 엘리스에게 말했다.
이미 엘리스의 성희롱에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상태다.
그리고 괜한 반응이 엘리스를 더 즐겁게 만들어줄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강현은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그치만 주인님이 너무 귀여운 게 잘못인걸요.”
하지만 강현은 엘리스를 속일 수 없었다.
겉으로 들어나는 반응이 줄어든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강현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부끄러움과 흥분이라는 감정또한 엘리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 무슨... 너 계속 그러면 앞으로 같이 못자게 한다?”
오랜 세월을 살라온 강현으로써 귀엽다는 평가는 그리 달가운 평가가 아니었다.
부끄러움을 느낀 강현은 순간적으로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아, 그건 안돼는데, 알겠어요.”
그리고 지난 1년간이라는 시간동안 간신히 건진 단 하나의 성과를 잃을 위험에 쳐한 엘리스는 곧장 꼬리를 내렸다.
몰래 침대에 올라오지 말라고 엘리스를 막았던 강현은 결국 엘리스의 동침을 허락했다.
가장 큰 이유는 유대감.
[신살자의 검]
[유대감: 100]
왠만해서는 잘 오르지 않는 유대감은 엘리스와 함께 한 침대에서 자고 일어날 때마다 쭉쭉 오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최대수치인 100을 달성했다.
그와 반대로 같이 자지 않는 날에는 5에서 10의 유대감이 쭉쭉 떨어졌다.
두 번째 이유는 포기를 모르는 엘리스의 집념이었다.
세 번째는, 솔직히 싫지 않았다.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잠에 들고 눈을 뜨는 것을 싫어할 만큼, 강현은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부드러운 가슴까지.
그리고 마지막.
엘리스는 사람의 형태로 변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신살자의 검이다.
물론 진짜 사람과 비교했을 때, 차이점은 전혀 없었다.
“하아...”
당연히 안돼는 일인데, 이걸로 엘리스를 협박해야 한다니.
강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고 그래요, 가끔 남자답게 거칠게 다뤄주셔도 괜찮지 않갰어요? 저는 주인님의 소유물인데.”
은근한 말투로 엘리스가 물었다.
장난 섞인 말이긴 했으나 솔직히 어느 정도의 진심도 있었다.
강현은 기본적으로 온화한 성격을 지녔다.
크게 티는 나지 않지만.
하지만 어떨 때는 다른 사람이 아닌가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거침과 난폭함을 보여준다.
강현과 푸스탄트의 대련에서 강현은 마치 푸스탄트를 죽일 기세로 마법을 쏟아보았다.
거친 야성이 느껴졌고 그 느낌은 엘리스가 다른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강현은 침대 위에서 어떨까.
평소처럼 상냥하고 부드러울까.
아니면 거친 맹수처럼 난폭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엘리스는 실수를 가장한 고의로 강현이 씻고 있던 욕실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어마 무시한 크기의 그것.
그것을 본 뒤로 약 1주일 동안 제대로 잠에 들 수 없었다.
물론 수면이 필요한 몸은 아니었지만.
“뭘 거칠게 다뤄, 그냥 푸스탄트나 기다리자.”
“좋아요.”
어차피 이 정도의 유혹이 통할 거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충분하다.
이미 하나의 성과를 얻었으며 그걸 토대로 조금씩 관계를 진전시키면 그만이었다.
∴
얼마 후, 푸스탄트의 방문이 열렸다.
방에서부터 나온 그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어떻게 됐어?”
“성녀님의 호위대에 참가시켜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하더구나.”
“뭐, 당연히 그렇겠지.”
충분히 예상했던 결과다.
성녀의 호위대는 일말의 화근이라도 남기지 않기 위해 무조건 성기사들로만 구성된다.
아무리 푸스탄트라 할 지라도 그 사이에 끼어들기란 불가능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즉위식으로 향하는 성녀의 이동경로도 철저히 비공개로 처리된다.
오직 교황과 성녀를 호위하는 수비대만이 알고 있다.
마차를 끄는 마부의 역할마저도 성기사가 직접 한다.
“즉위식까지 얼마나 남았어?”
“1개월 정도 남았겠구나.”
“으음...”
1개월.
성국 헤르피아까지의 마차를 탄다면 나흘, 도보로 이동한다면 열하루에서 열닷새가 걸린다.
“일단, 성녀와 관련된 해결법은 내일 일어나서 생각하자꾸나,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 자거라, 이른 아침부터 마차를 수배애햐할 테니.”
“응? 마차 타고 가려고?”
“그래, 걸어가지 못할 거리는 아니지만, 괜히 늦장 부려서 좋은 것 없지 않으냐.”
“알겠어. 할배, 잘 자.”
“너도 푹 쉬려무나.”
푸스탄트와 강현은 각자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씻겨줄까요?”
그리고 잠들기 전, 몸을 씻으려고 욕실에 들어가던 중 엘리스가 물었다.
“됐어.”
엘리스를 저지한 강현은 욕실에서 간단하게 씻은 후, 침대에 편히 누웠다.
“안녕히 주무세요. 주인님.”
“너도 잘 자.”
한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밤 인사를 나누는 게 일상이 되었고 익숙해져 버렸다.
이런 비적절한 상황을 어서 해결해야 하지만, 신살자의 검의 최대 효율을 뽑아내기 위해선 유대감도 절대 포기할 순 없었다.
“... 너무 가까이 오지 말고.”
“어차피 주무시다가 안겨오실 건데, 그냥 제 품에서 잠을 청하는 게 어떠세요?”
몸을 옆으로 눕힌 엘리스가 강현을 향해 양팔을 펼치며 물었다.
어느새 입고 있던 옷을 순백의 슬립으로 변환시킨 탓에 노출도가 더욱 올라갔다.
얇은 슬립 너머로 엘리스의 속살이 은근히 드러났고 누운 자세로 인해, 가슴골의 깊이는 더욱 깊어진 상태였다.
“됐으니까 빨리 자.”
강현은 엘리스의 유혹을 뿌리치고 엘리스의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스스로에게 최소한의 떳떳함을 유지할 수 있는 선은 딱 여기까지였으니.
그리고 매일같이 연락을 주고받는 레이가 있지 않는가.
“뭐, 좋아요.”
상관없다.
어차피 강현은 잠에 들고 나면 몸을 조금 뒤척거리다가 절로 안겨오니.
그리고 다음날 아침, 항상 그랬듯이 강현은 엘리스의 품 안에서 아침을 맞이했고 푸스탄트와 함께 마차를 수배하여 여행길에 올랐다.
덜컹덜컹.
애초에 싸구려 마차한테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수레바퀴가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마차의 내부는 격렬하게 흔들렸다.
격한 흔들림과 딱딱한 나무 좌석은 엉덩이에 점점 피로를 쌓아주었다.
하지만 이 땡볕 아래에서 주구장창 걷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에, 강현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계획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자꾸나.”
∴
“꽤 들떠보이네요, 히엘.”
성국, 헤르피아로 향하는 마차 안, 아멜리아는 자신의 호위기사인 히엘에게 말했다.
성국으로 여행을 떠날 예정이니, 동행하라는 명령을 들은 순간부터 히엘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 그렇게 티 났습니까, 죄송합니다. 공녀님.”
아멜리아의 말에 자신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히엘은 표정관리를 하며 대답했다.
세계 최고의 휴양지로 유명한 헤르피아로 떠나는 여행에 히엘은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아멜리아의 호위기사인 만큼 자신의 본업을 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과를 한 것이었다.
“죄송해할게 뭐가 있나요.”
후후, 아멜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저를 보좌해주시느라 많이 고생해주셨으니 마음 편히 쉬다 오도록 하죠,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경비는 제가 지출할 거랍니다.”
“... 네.”
히엘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대답했지만 들썩거리는 입꼬리를 주체하진 못했다.
평범한 여행이 아니다.
아멜리아와 ‘함께’하는 여행이다.
맛있는 음식과 고급진 숙소, 멋진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무려 무료에 즐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히엘은 소드마스터의 경지라는 출중한 실력과 충성심을 지닌 기사였지만, 속물적인 부분이 없다 하면 거짓 이리라.
자신을 원했던 수많은 귀족 가문들 중에서, 루이스플 가문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높은 연봉이었으니.
“후우...”
아멜리아는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본 채, 히엘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현 님...’
여행을 떠난 만큼, 여러 가지 일들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많은 사고들이 사라지니, 강현의 생각이 빠르게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강현 님과 함께 올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헤르피아라는 최고의 휴양지에서 강현과 행복한 시간을 즐기는 상상이 저절로 생겨났다.
그로 인해 아멜리아는 점점 우울해질 뿐이었으며, 순수하게 여행을 기대하고 있는 히엘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아니, 함께가 아니더라도 괜찮아요, 멀리 서라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충분할 텐데...’
그리고 아멜리아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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