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성국 헤르피아 (2)
* * *
성국 헤르피아.
신의 축복을 받은 넓은 영토는 젖과 꿀이 흐른다.
헤르피아의 영토 내에서는 한 마리의 몬스터조차 찾을 수 없다.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헤르피아는 바다와 연결된 넓고 긴 강을 지녔으며 제국과 수많은 왕국들과 영토를 맞대고 있기에 무역의 요충지로써 상당한 부를 축적해왔다.
또한 신의 축복을 받은 성기사단의 무력은 헤르피아라는 노른자 땅이 절대적인 중립국가이자 하나의 중립지대가 되도록 만들어주었다.
헤르피아를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모든 마을과 도시에서는 신을 찬양하는 감미로운 찬송가가 들려오며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물론 어느 정도 과장된 부분이 있었지만.
또한 사랑과 평화의 신, 헤르피아를 최고신으로 섬기는 국가인만큼 교황이 국정을 운영한다.
그리고 성국이 건국된 이후, 총 20명의 수녀들이 세대를 교체해왔다.
원래 교회의 수녀였던 성녀들은 신탁을 받음으로써 성녀로 추앙된다.
성녀가 된 그녀들은 개개인마다 품고 있던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성녀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고.
아쉽게도 강현은 이번에 탄생한 성녀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다.
게임 속에서도, 전생에서도 성녀의 암살에 관한 정보는 아예 없었다.
범인에 대한 단서 또한 마찬가지였고.
전생에선 게임의 기억을 잊어버린 탓에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성녀가 암살당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강현의 말에 푸스탄트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해졌다.
믿을 수 없었지만 강현의 말은 믿지 않을 수가 없었기에.
“무슨 말이긴. 말 그대로 암살당해서 죽어, 즉위식으로 향하던 마차가 습격당해서.”
성녀가 암살당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성기사들의 호위를 받지 않은 게냐?”
일단 첫 번째로 신탁을 받고 성녀가 된 순간부터 성기사들의 호위를 받게 된다.
1명의 성기사장과 9명의 성기사로 이루어진 2개의 분대가 12시간 주기로 교대하며 성녀를 호위하는 데 암살이 가능할 리가 없다.
성기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검성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성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검의 주인,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아니, 호위는 그대로였어. 그리고 성녀를 호위한 성기사들이 다치거나 죽었단 얘기도 없었고.”
“... 그렇다면 로자리오를 받지 못한 게냐?”
그리고 두 번째.
성국의 로자리오.
평범한 수녀였던 여인에게 전투력이 있을 리가 없다.
드넓은 대륙에는 수없이 많은 사상이 존재하고 있다.
그중, 성녀를 노리는 세력도 적지 않게 있었다.
그렇기에 성녀로 추대됨과 동시에 성국, 헤리프아의 국보, 성국의 로자리오를 수여받게 된다.
모든 악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성국의 로자리오는 착용자에게 엄청난 힘을 준다.
그 힘은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목에 건 것만으로도 소드마스터, 현자의 경지와 동등한 힘을 갖게 해 주니까.
“아마 그럴 수도. 성녀가 암살당했다고 난리 나던 중에도 로자리오가 사라졌단 말은 없었으니까.”
성국의 로자리오는 헤르피아의 왕국의 상징과도 같다.
초대 황제가 헤르피아에게 하사 받은 신물.
로자리오의 상징적 가치는 어찌 보면 성녀보다 훨씬 높다.
로자리오는 새로 생기지 않지만, 성녀는 신탁을 받음으로써 여러 번의 세대를 교체해왔으니까.
“흐으음...”
그렇다 하더라도 성기사들의 호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2명의 검성과 18명의 소드마스터를 뚫고 성녀를 암살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심지어 성기사들을 죽이거나 상처 입힌 것도 아니고.
그 소설 같은 일을 실현시키려면 최소한 반신의 경지에 올라야지 가능할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부활은 어떻게 된 거냐.”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어.”
성녀들은 딱 한번, 죽음에서부터 살아 돌아올 수 있다.
육신이 파괴되고 생력과 마나가 소멸하고 영혼을 잃더라도.
헤르피아의 수도, 중앙 대교회의 최상층, 성녀의 안식처에서 육신과 생력, 마나와 영혼을 재생성하여 부활한다.
그리고 강현은 전생에서 성녀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도보도 못했다.
“... 이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불행이라 여겨야 할지...”
성녀가 암살당한 다는 사실을 불행으로 여겨야 한다.
하지만 미래를 알게 된 이상, 암살당할 성녀를 지켜낼 수 있다.
푸스탄트와 강현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근데 이번엔 암살당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 그러고 보니.”
성녀가 탄생했다는 말을 들은 강현은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가 했던 말과 보인 방응을 토대로 추론해보자면, 전생에서의 성녀는 지금 이 시기에 탄생하지 않은 모양이다.
“전생에선 3년 후에 성녀가 탄생했어. 왜인진 모르겠지만.”
성녀가 암살당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는 강현에게 있어서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전생보다 이른 성녀의 탄생과 자신의 회귀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가 더 의문이었다.
‘나로 인해 성녀가 탄생하는 시기를 바꾸는 게 가능한 걸까.’
신이라는 영적인 존재가 선택하는 성녀다.
나비효과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강현이었지만, 전생과 달라진 자신의 행동이 신의 선택을 뒤바꿀 만큼 큰 파급력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무슨 행동이 이 결과를 가져온 걸까.
애초에 회귀했다는 사실은 신이 알고 있는 걸까, 모르고 있는 걸까.
회귀로 인해 결과가 바뀐 걸까.
또다시 절대 답을 얻을 수 없는 사고의 연쇄가 시작되었다.
강현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고의 연쇄를 억지로 끊어냈다.
어차피 답을 얻을 수 없기에.
“그렇다고 해서 성녀가 암살당할 수도 사실을 절대 좌시할 수 없다.”
“당연하지.”
어차피 푸스탄트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당장 교황님께 연락을 보내야겠구나.”
“응.”
푸스탄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교황과 연결된 통신 스크롤에 성녀 호위단에 합류시켜달라는 요청을 적기 위해서.
“큰일 인가 봐요.”
검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엘리스가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했다.
“그렇지, 큰일이 아니면 좋겠지만.”
기왕 성녀가 탄생하는 시기가 3년이나 앞당겨진 만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평화롭게 끝나길 희망했다.
“성녀라...”
엘리스는 성녀라는 한 단어를 곱씹었다.
당연히 성녀에 관한 기억은 전무했지만, 어째서인지 동료애와 애틋함이 느껴져 왔다.
“그런데 성기사가 얼마나 강한가요?”
정체불명의 동료애에서 관심을 돌린 엘리스는 성기사에 대해 물었다.
“성기사장은 검성, 성기사는 소드마스터야, 거기에다가 신의 축복까지 받은 놈들이라서 엄청 강해.”
“그런데 성녀를 어떻게 암살했을까요?”
“그러니까, 내가 알기론 성기사장 2명이랑 성기사 18명이서 성녀를 호위하고 있을 텐데.”
중립국이라는 지위는 그리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인님보다 강해요?”
“당연하지, 난 아직 검기도 못쓰잖아.”
기사는 마법사와 달리, 등급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법사는 심장을 두른 서클의 개수에 따라 등급이 나뉘지만, 기사는 검기를 사용하기 전까진 순수한 무력을 통해 등급을 나눈다.
강현은 스스로를 잘 쳐줘야 중급 기사 상위권의 수준이라고 여기고 있다.
고작 1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상급 기사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경악할만한 속도의 성장이었지만, 성기사를 이기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그럼...”
엘리스가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녀는 무언가를 기대하듯, 강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싸우면 이길 수 있어요? 검술만 사용해서.”
상대보다 약하면 당연히 이길 수 없다.
당연한 이치다.
“... 으음.”
강현은 고민과 동시에 능력을 사용했다.
[특수 능력: 이미지 트레이닝(B)을 사용합니다]
[이강현 vs 성기사]
강현은 지난 1년간 한 가지의 기술을 연마했다.
상상 속 공간에서 임의의 상대와 가상의 대결을 펼치는 이미지 트레이닝.
상대방의 전투 스타일에 따라 공격을 예상하고 그 공격에 대처하는 자신을 상상하는 수련으로, 전투 감각을 기르는 중요한 기술 중 하나였다.
그리고 약 1개월 전, 5개월간 이미지 트레이닝을 연마한 강현은 특수 능력을 하나 얻게 되었다.
바로 B등급의 특수 능력, 이미지 트레이닝.
눈을 감으면 어두웠던 시야가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강현이 지정한 2명의 인물이 전투를 치르는 능력이었다.
“성기사랑은 해볼 만할 거 같은데, 신의 축복을 무조건 파훼한다는 전제조건 하에.”
잠시간의 고민과 이미지 트레이닝을 끝마친 강현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오만도, 낙관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엘리스도 잘 알고 있었다.
“승률은 3할 이하지만.”
‘역시 대단한 남자란 말이야.’
강현은 마치 와인 같은 남자였다.
하루하루 숙성시킬수록, 더욱 깊은 풍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강현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했다.
‘그냥, 확 잡아먹어 버릴까.’
날이 갈수록 근사해지는 강현을 보고 참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아니, 조금만 더 참자.’
더욱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도록.
엘리스는 강현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성장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저는 주인님이 무조건 이길 거라고 생각해요.”
엘리스가 말하자 강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성기사를 이겨서 뭐해, 내가 성기사랑 싸울 것도 아니고.”
성기사라는 기준을 세워, 강함의 척도를 구별하는 것일 뿐, 성기사를 무조건 이겨야 할 필요는 없다.
“왜요, 성녀를 암살한 게 성기사들일 수도 있잖아요.”
“...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지 않아요? 검성과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성기사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성녀인데.”
엘리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무런 부상도 없었던 성기사들.
그 사이에서 감쪽같이 암살된 성녀.
“...”
성녀는 신탁을 받아 성녀가 된다.
성기사들은 신의 축복을 받음으로써 성기사가 된다.
성기사들의 신실함은 전 세계에 유명한데, 그런 성기사들이 성녀를 죽인다는 것은 말도 안됐다.
그리고 성기사들은 교황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성기사단의 최고 지휘권을 가진 교황이라면 그들에게 성녀의 암살을 지시할 수는 있지만 강현은 교황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푸스탄트와 함께해온 죽마고우이자 신실한 신도.
은혜로운 교황이자 인자한 지도자.
‘...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아니라고도 단언할 수 없었다.
발상의 전환.
성기사들의 호위를 받고 부활이 가능한 성녀를 죽일 방법이라고 한다면 성기사들에 의해 죽은 뒤, 성녀의 안식처에서 부활과 동시에 또 한 번의 죽음을 맞이한다, 이 방법밖에 없었다.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고 생각했지만, 염두해둬서 나쁠 건 없으리라.
“확실히 가능성을 베제 할 순 없겠네, 고마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