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성국 헤르피아 (1)
* * *
시간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상대성 이론 같은 과학적인 이론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인식하는 주관적인 차이에서부터 개개인마다 느끼는 시간의 속도가 현저히 달라진다.
학창 시절 수업시간 50분과 게임을 즐기는 50분을 비교해보자.
모든 사람이 똑같진 않겠지만 최소한 강현에게 있어선 그 두 상황 속 체감되는 시간의 속도는 상당히 달랐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때 더욱 높은 집중력을 보인다.
높은 집중력은 체감되는 시간을 더욱 빠르게 만들어주고.
“완벽하다, 이제 자세는 흠잡을 곳이 없느니라.”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푸스탄트는 1개월에서 반년의 시간이라 말했다.
엘리스는 나흘에서 엿새라고 말했다.
둘의 예상을 깨고, 강현은 사흘이라는 시간 만에 자세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강현은 사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느꼈는가.
순식간이었다.
강현은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가 넘쳐흘렀다.
전생에서 푸스탄트를 잃었던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상황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비통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강현은 자신의 재능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데미갓인 푸스탄트와 검신의 경지에 도달한 엘리스에게 인정받은 재능을.
재능이라는 이유로 높아진 자존감은 강현의 의욕을 불태우기 충분했고 사흘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애초에 한번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흐르는 걸 모르는 강현이다.
물론 흥미를 갖지 못한 일에는 집중조차 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존재했지만.
“응.”
자세의 완성.
그 마지막 과제.
수호의 검, 기본자세를 유지하고 3시간을 버티는 것이었다.
호흡과 자세가 절대 흐트러져선 안된다.
마치 페론, 중앙공원에 세워진 초대 황제의 석상처럼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라도 용납할 수 없는 과제였다.
그리고 강현은 그 상황 속에서 자신에 한 가지의 과제를 더 부여했다.
엘리스에게 자신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는지 지켜봐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3시간이라는 목표가 생긴 이상, 사람의 심리상 시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강현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중간중간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라는 잡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강현은 완벽함을 추구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런 강현에게 있어서 자세만 완벽하게 유지했다는 사실은 납득할 수 없는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강현은 성공했다.
푸스탄트와 엘리스가 예상했던 기간보다 더욱 이른 시간에.
다시금 자신의 재능을 체감한 강현은 그저 운이 좋았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재능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노력하지 않는다면 재능을 꽃피울 수도 없어요, 주인님이 항상 최선을 다한 결과니까 조금 기뻐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감정을 공유하는 건 그리 좋은 능력은 아니었다.
엘리스는 곧장 생각을 읽고는 장난을 쳐왔으니까.
하지만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행운이 아닐까.
네가 도와준 덕분이지, 고마워.
훈련 중 엘리스에게 받은 조언과 요령은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엘리스가 해주는 안마는 몸의 모든 피로를 말끔하게 해결해주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훈련에 임할 수 있었다.
알아주니까 기쁘네요.
힘에 대한 강현의 집착은 두려울 정도였다.
단순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닌, 목숨을 걸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처음 강현의 훈련을 지켜봤을 때, 그는 내일의 훈련을 대비한 것인지 적당한 체력을 남겨두었다.
물론 마지못해 하는 타협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안마를 받고 나서부터는 타협도 없었다.
집까지 간신히 돌아갈 체력만 남기고 훈련의 매진했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신체는 한계에 몰아붙일수록 더욱 빠르게 성장한다는 것을.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자꾸나.”
“응? 벌써? 나 아직 괜찮은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고 있던 옷은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런데 뭐가 괜찮다는 건가, 푸스탄트는 생각 했다.
강현의 ‘괜찮다’의 기준은 어딘가 이상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 힘으로 걸을 수 없게 되기 전까지 괜찮은 상태라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열심히 하는 건 좋다만...’
강현은 원래 이랬다.
당장 몇 년 전, 마나 흡수에 난황을 겪고 있던 강현은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새벽이 될 때까지 숲의 바위 위에 앉아 마나 흡수를 수련했었다.
더욱 정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제자를 둔 것은 스승으로써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푸스탄트는 7일을 예상했고 강현은 사흘 만에 자세를 완성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몸을 혹사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물론 신살자의 검이 몸의 피로를 회복시켜준다 하더라도 정신의 피로는 회복시켜줄 수 없다.
강현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푸스탄트는 생각 했다.
‘누가 누구한테 고집이 세다고 하는 건지 원...’
쯧쯧, 푸스탄트는 혀를 차며 생각했지만 미소 지은 표정은 고가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니, 강현이 너는 지금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
“으으음...”
지친 상태다.
하지만 지난 사흘간 훈련을 끝 맞췄을 때와 비교하면 생생한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뭘?”
마나가 움직였다.
오른쪽.
엘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0 위계의 기본 마법 매직 미사일이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어...?”
고작 매직 미사일.
저런 건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마나를 조금 조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막지 못했다.
옆통수를 강타하려던 매직미사일은 공중분해되고 사라졌다.
“이제 알겠느냐?”
“... 응.”
푸스탄트의 물음에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저 지극히 평범한 매직 미사일이었다.
딱 수습생들이 사용할 만한.
그렇게 빠르지도, 강한 위력이 담기지도 않았으나 반응하지 못했다.
강현은 자신의 육체에 비해 정신은 크게 지친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 빨리 가서 쉬자, 내일부터는 초식 알려줄 거지?”
“그래, 그럴 테니 어서 가자꾸나, 아직 점심도 먹지 못했다.”
강현은 푸스탄트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곧장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편히 쉴 수 있도록 배려라도 해준 것일까.
평소라면 장난을 쳐왔을 엘리스는 조용히 있었다.
∴
낙엽이 떨어지고, 세상이 순백으로 뒤덮인 후, 꽃이 피어나고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어 지상을 뜨겁게 달궜다.
계절의 순환이 이루어지고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아멜리아에게는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에 불과했다.
지난날의 상처를 잊기 위해서 자신을 몰아붙였다.
더욱 멋지고 유능한 여인이 되고 루이스플 공작가의 가주 자리를 상속 받음으로써 자신을 거부한 그를 후회하게 만들고 싶어서.
1년이면 지난날을 잊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와의 추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 추억 속에 항상 존재했던 약초의 씁쓸한 냄새가 항상 풍겨져 오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숨 돌릴 틈조차 없이 바쁠 때면 잠깐이라도 강현을 잊을 수 있었기에.
“...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니냐.”
식사시간, 잠시 동안 고민한 브라함은 아멜리아에게 말은 건넸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버님.”
“열심히 하는 모습은 보기 좋다. 하지만 너 자신을 너무 혹사시키는 것 같구나.”
브라함을 아멜리아에게 실패를 경험하게 만들었었다.
또한 실패를 경험한 아멜리아가 한층 성장했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위태로웠다.
이전에 보여줬던 강인함 모습은 여전했지만, 어딘가 절박해 보였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이.
“... 괜찮아요, 저는 제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일만 하고 있답니다.”
“그러냐.”
아멜리아의 대답을 들은 브라함은 짧게 대답하고 주제에서 관심을 거두었다.
괜찮다고 했으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스스로 이겨낼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이겨낼 수 있어야 루이스플의 가주가 될 수 있다.
“얼마 전에 영지로 넘어왔던 이민족들은 어떻게 처리했느냐.”
“알고 보니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 머물 곳을 찾던 중에 영지를 넘어오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마침 목공업에 종사할 일손이 부족한 상태였기에 머물 곳을 마련해주고 인력으로 활용하려고 했어요.”
“음, 훌륭하다.”
그 후로 더 이상이 대화는 없이 식사시간이 진행되었다.
식사가 끝나고, 식당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들이 빈 접시를 빠르게 치우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헤르피아 왕국에서 편지가 한통 도착했다.”
“무슨 편지인가요?”
성국, 헤르피아.
대륙 중앙에 위치한 중립국가.
아멜리아는 브라함의 대답을 기다렸다.
“성녀가 탄생했다고 하더군.”
“그러고 보니... 전대 성녀의 임기가 끝난 뒤로 벌써 10년이 흘렀군요.”
“잘 알고 있군, 성국에서부터 성녀의 즉위식에 참석해달라는 초대장을 보내왔다.”
아멜리아는 생각했다.
브라함이 갑자기 자신에게 초대장에 관한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인가.
“제가 다녀와야 하나요?”
“그래, 성국이 말한 즉위식 날에는 용무가 있어 황성에 다녀와야 한다. 그러니 네가 대신 다녀오너라. 다녀오는 김에 여태껏 쌓아왔던 피로도 풀고.”
브라함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멜리아는 확신했다.
아멜리아는 공작가의 가주인 브라함의 업무를 돕는 보조인의 입장으로 브라함의 일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그의 일정 중, 황성으로 향한다는 일정은 아예 없었다.
또한 자신이 기억하는 한에서, 그가 황성으로 직접 향한 적은 딱 세 번이었다.
황성에서는 4년마다 제국회의라는 이름의 회의가 열린다.
황제와 황후, 육각 성의 장로들과 4대 공작가의 가주들이 모여 페론티아 제국의 향후 4년간의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로, 브라함도 4년마다 참석해왔다.
그리고 마지막 제국회의가 실행된 날이 재작년 겨울이었으니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배려해주시는 걸까요.’
아마 자신이 혹사하고 있다고 생각한 브라함이 휴식을 취하고 오라는 뜻으로 건넨 제안이겠지.
성국 헤르피아는 휴양지로써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니까.
“네, 알겠어요.”
“그래, 그럼 이만 물러가보고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거라, 이 편지는 초대장이다.”
브라함이 편지를 건넸고 아멜리아는 편지에 적힌 즉위식의 날짜를 확인했다.
즉위식은 무려 1달 뒤에 실행된다.
1달 이상은 쉬고 오라는 뜻이었다.
∴
“성녀가 벌써 탄생했다고?”
푸스탄트가 말한 다음 여행지를 들은 강현은 경악했다.
“그래, 약 1주일 전쯤에 아리아라는 소녀가 신탁을 받고 성녀로 선택받았다고 하더구나.”
전생에서 21대 성녀는 강현이 17살이 되던 해에 탄생했다.
“왜 그리 놀라는 게냐? 표정이 좋지 않구나.”
그리고 강현의 표정을 본 푸스탄트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는 미래에 벌어질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 미래의 사건들이 전생과 완전히 똑같이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 성녀, 암살당해.”
성녀는 즉위식을 위해 이동하던 중 정체불명의 암살자에게 살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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