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어른으로써, 루이스플 공작가의 차녀로서.
* * *
강현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상처받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갔으면 했다.
그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레이였기에.
하지만 비단 그 이유만이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드넓은 세게를 방랑하며 선행을 베푸는 푸스탄트는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푸스탄트의 행복, 평화와 안녕을 기도해주며, 무탈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기도해준다.
강현도, 그 푸스탄트와 함께 선행을 행하며 살아간다.
자격이라는 거다.
자신에게 그래 줬던 것처럼, 불행과 고통에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행복과 희망을 주는 강현에게는 행복할 자격이 있었다.
괴로워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강현은 그런 삶을 살아야 마땅한 사람이다.
수많은 죄를 저질러온 자신이 강현이라는 남자를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사람이니까.
강현의 검과 방패가 되겠다.
그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 목표는 더욱 깊게 들여다봤을 때, 더욱 원초적인 이유가 존재했다.
강현이 상처받지 않고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걸 위해서라면 레이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자신의 몸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처녀를 주고 원하는 대로 몸을 희롱하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레이도 은근히 원하고 있었으니.
그가 죽으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
그게 어떠한 이유든, 어떠한 방식이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강현의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게 강현에게 받은 새로운 기회이자 삶이라는 은혜에 대한 보은이었으니까.
그게 수많은 죄를 짓고 스승이자 아버지인 푸스탄트를 죽인 자신의 속죄였으니까.
그게 레이가 살아가는 이유였으니까.
그런 레이에게 있어서, 지금 강현이 짓고 있는 표정은 자신의 목표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강현이 슬픔과 괴로움에 고통스러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레이에게는 중요한 목표였다.
하지만 레이는 그 무엇도 해줄 수 없었다.
그의 검과 방패로써 싸우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전생에서 검성이었던 요한조차 무릎 꿇게 했던 검술이 있으니까.
하지만 강현의 감정은 지켜줄 수 없었다.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다.
신체를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에 반해, 감정을 완벽히 통제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으니까.
죄인으로 살아오며 그 사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깨달은 레이가, 강현의 감정을 이해하고 보듬어주기란 불가능했다.
“그게... 정말 맞는 거예요?”
그렇기에 레이는 강현에게 물었다.
그 누구보다 행복해야 마땅할 당신이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까지 그런 선택을 내리는 것이 맞는 거냐고.
“나도 모르지, 나는 신이 아니니까. 이것보다 더 나은 선택이 있었을 수도 있어, 내가 너무 성급한 선택한 걸 수도 있고.”
“또는 공녀님의 감정에 너무 늦게 알아차린 게 잘못일 수도 있어. 그런데, 나는 이게 맞다고 생각해.”
아멜리아의 감정이 더욱 커지기 전에.
아멜리아가 자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이 되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게 맞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니.
그러니까.
후회는 하지 말아야겠지.
“...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어요.”
레이는 솔직히 아멜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현에게 몸을 밀착하거나 은근한 시선을 보내는 게 거슬렸다.
왜냐면 자신은 그렇게 행동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행동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까.
일종의 부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과 달리 완벽했으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레이는 느낄 수 있었다.
아멜리아는 어린 소녀지만, 강현을 향한 순수한 호의를 품고 그를 위해 약의 제조를 돕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은근히 자신과의 경쟁을 유도했지만 선은 넘지 않았으며, 공작가의 차녀답지 않게 평민을 대할 때도 예의를 신경 썼다.
솔직히 강현은 자신이 괴로워하면서까지 이런 선택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고 레이는 생각했다.
그렇기에 레이는 강현에게 말했다.
“... 너도 들었으니까 알 거 아니야.”
레이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처음부터 다 본 듯한 눈치였다.
“그렇죠...”
레이는 자신이 기뻐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강현의 마음을 노리는 적이 사라졌으니까.
그가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주고 있는지 다시 한번 더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별로 기쁘지 않았다.
레이는 딱 한번 생각했었다.
강현이 자신과 아멜리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두 명 모두를 품겠다는 선택을 할 경우를.
솔직히 사랑하는 이를 독점하고 싶다는 건,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일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랐다.
강현이 두 명을 품겠다는 선택을 내리는 상황을 떠올려봤음에도 딱히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레이는 그를 독점하지 못하더라도 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강현의 선택이라면 무조건 따를 생각이었다.
그가 그 선택으로 인해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또한 아멜리아는 좋은 아이인 것이 분명하니까, 훗날 분명 강현의 힘이 되어줄 거고.
물론 정실의 자리는 넘겨줄 수 없겠지만.
차라리 이런 선택지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하지만 레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이 강현과 다른 이유는 아멜리아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라는 걸.
그녀를 위협적인 연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레이와 달리, 강현은 그저 어린 소녀로만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른으로써, 그런 선택을 내린 것이겠지.
“알겠어요.”
그렇기에 레이는 그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강현이 내린 선택이다.
그의 선택의 이유와 타당함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가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을 왈가왈부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을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푸스탄트마저도.
“... 고맙다.”
강현은 알 수 있었다.
레이가 자신과 함께 괴로워해주고 있다고.
내 선택을 존중해주기로 결정했다고.
그렇기에 강현은 레이의 머리에 손을 얹어 쓰다듬으며 말했다.
“... 가, 강현 씨...”
그리고 그의 크고 따듯하면서도 굳은살이 박여 투박한 손을 느꼈다.
쓰다듬음은 언제나 기분 좋은 행복감을 선사해주었지만, 어딘가 괴로움이 느껴지는 그의 손이 주는 감각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그리고 레이.”
“네.”
“자기 자신을 사랑해. 자기도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그 누가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겠어.”
조금 뜬금없긴 했으나, 레이에게도 최대한 빨리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기에 강현이 말했다.
강현은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레이가 자신과 아멜리아를 은근히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대부분 감에 의지한 생각이었지만,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 알고 계셨나요?”
아무래도 들킨 모양이었다.
부끄러워졌다.
레이가 그에게 보여주고 하는 모습은 그런 부정적인 모습이 아니었기에.
“내가 눈치 백단이여서.”
강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레이는 아마도 전생에 저지른 죄로 인한 죄악감을 평생 동안 씻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자기혐오에 기초한 자기 부정과 열등감.
푸스탄트를 만남으로써 갱생한 수많은 죄인을 만나온 강현은 모를 수가 없었다.
“난 알고 있어. 레이, 네가 생각하는 거에 비해서 너는 훤씬 좋은 사람이라는 걸.”
열등감은 때때로 그 사람의 성장의 원천이 되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레이는 그런 것이 없더라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여인이며, 레이는 이미 강현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 고마워요, 강현 씨.”
“그래, 어느 부분이 좋은 건지 궁금하면 말해줄 수도 있어, 궁금하면 물어봐.”
“... 아니에요. 강현 씨가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래.”
∴
첫사랑의 처절한 실패.
항상 무슨 일을 맡든 완벽한 성공이라는 결과를 이루어왔던 아멜리아에게 있어서 생전 처음 겪어보는 실패란 고통스러웠으며 잔혹했다.
“... 두고 보세요.”
곱게 빗질해둔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었다.
아름다운 빛을 머금고 있던 금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화장은 흉하게 번져있었다.
“이 세상의 절반이 남자라고요.”
강현에게 실연을 당한 뒤, 밤새 울다 지쳐 잠에 든 후 눈을 뜬 이른 아침.
아멜리아는 혼잣말을 시작했다.
“반드시 후회하게 해 드릴 거예요...!”
강현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다.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수많은 남자들이 접근해왔으며 꽤 강한 자기애를 지니고 있던 아멜리아에게는 그만한 치욕이 없었다.
다짐했다.
반드시 지금보다 훨씬 아름답고 성숙하며 멋진 여인이 돼서 그가 후회하게 만들겠다고.
어차피 세상의 절반의 남자와 절반의 여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강현보다 훨씬 멋지고 좋은 남자를 만나, 그 누구보다 행복한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겠다고.
“가능... 할까요...”
하지만 항상 자신감으로 넘치던 아멜리아였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세상에 수많은 남자들이 있다.
아멜리아는 지금껏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그 누구를 상대로도 강현에게 느꼈던 감정의 1할조차 느껴본 적이 없었다.
1할이 뭔가.
1푼... 아니, 1리의 감정도 느껴보지 못했다.
“강현님...”
그가 보고 싶다.
공작가의 차녀가 아닌, 아멜리아라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바라봐주는 그의 시선이 그리웠다.
하지만...
이제 보지 못할 거다.
그 사실에 밤을 지새우며 눈물을 흘렸음에도, 또 눈물이 흘러내릴 거 같았다.
실연당했다고, 그를 향하던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딸랑딸랑.
하지만 여기서 좌절할 만큼, 아멜리아는 연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루이스플 공작가의 차녀이자 차기 가주로써, 태어날 적부터 어깨에 짊어져온 책임감이라는 무게.
그것은 아멜리아는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하게 만들었으며, 더욱 강인하게 만들어주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임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아멜리아에게는 좌절이라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벨소리를 들은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녀는 아멜리아의 모습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가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어요.”
넘어지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
휴식을 취해서도 안된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 다음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잔인하게도, 그게 아멜리아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감이었으니.
그와 함께했던 짧은 순간들이 전부 행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를 향한 마음을 버리고, 행복했던 순간들은 이제 추억으로 치부해야 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여인이기 이전에, 자신은 북부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루이스플 공작가의 차녀였기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