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어른으로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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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란 무엇인가.
강현은 어린 시절, 어른이라는 개념 자체를 가볍게 여겼다.
20살이 되어, 편의점에서 술과 담배를 살 수 있고,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새벽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어른일 뿐이라고.
별 특별한 의미 없이, 그저 나이만 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강현은 어른이라는 하찮게 여겼다.
자신을 버리고 얼굴 한번 비추지 않은 부모도 어른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 생각은 바뀌었다.
어른, 성인의 무게는 가벼이 볼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크고 작은 모든 행동과 말, 처신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어른이었다.
책임이라는 것은 한 가지의 개념일 뿐이었지만, 그 무게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강현은 다시금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어른이라는 것은, 여러 모습의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
만약 애인이 생긴다면 누군가의 남자 친구로서.
직장이 생긴다면 구성원의 일원으로써.
결혼은 한다면 누군가의 남편으로써.
자식을 낳는다면 누군가의 아버지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수많은 입장을 지닌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현은 총 52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왔다.
게임 속으로 전생하기 전, 25년.
전생한 이후, 20년.
회귀한 이후, 7년.
만약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았다면,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립시키고 성인이 된 자식들을 보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강현이 살아오면서 어깨에 짊어진 책임들은 52년이라는 세월에 비하여 초졸 했다.
누군가의 애인이 된 적도, 번듯한 직장을 가짐으로써 생산적인 사회의 구성원이 된 적도, 가족의 버팀목이 된 적도.
아무것도 없었다.
지혜와 지식이 늘었다고는 하나, 수많은 종류의 책임감의 무게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강현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멜리아의 마음에 대해서.
지난 며칠간, 아멜리아가 생각 외로 좋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순수하게 자신을 좋아해주는 것은 감사히 여겨 마땅했다.
하지만 강현은, 레이가 있다.
그녀의 간절하고 진지한 마음에 아직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과연 올바른 행위일까.
강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한 함께 과거로 회귀하여 성인의 정신을 지니고 있는 레이와는 다르게, 아멜리아는 강현에게 있어서 그저 많이 머리가 좋을 뿐인 순수한 아이일 뿐이었다.
생리적으로 아멜리아를 여자로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적어도 그녀가 20살이 되어야 이성으로 볼 수 있겠지.
물론 아멜리아가 후에 아름다운 여인이 될 것이며, 북부의 실질적 지배자, 루이스플 공작가의 가주가 될 거란 사실 또한 기정사실이다.
잠재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아멜리아는 완벽했으며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7년 후의 이야기다.
그녀가 루이스플의 가주가 되는 것은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순수하고 소중한 아멜리아의 마음에 상처를 입힐 수는 없다.
여자로 볼 수조차 없는 그녀의 미래 때문에 어설픈 여지를 주어 어장관리를 한다는 건, 강현으로써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강현은 아멜리아에게 물었다.
“공녀님, 저를 좋아하십니까?”
아멜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려움과 불안함이 담긴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하며, 간헐적으로 입만 뻥끗거리고 있었다.
차마 뭐라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강현을 올려다본 아멜리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가망이 없음을 직감했다.
여기서 자신의 첫사랑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막을 내릴 것이란 사실을.
“만약 제 질문에 침묵한 것이 긍정의 의미 시라면... 죄송합니다. 저는 공녀님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왜죠.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을까요?”
아멜리아는 시선이 똑바로 마주하고 있음에도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목소리를 떨며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그런 아멜리아의 모습에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느껴져 왔다.
깊은 속에서부터 기분나쁜 감각이 올라와 메스꺼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참아냈다.
“...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가 못나서 그러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도대체 이유가 뭔가요. 레이 님 때문인가요?”
“... 예.”
잠시 망설인 뒤, 강현은 대답했다.
그것이 궁극적인 이유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의 지분이 존재했으니.
“... 또 다른 이유가 있으시군요.”
강현의 눈빛을 본 아멜리아는, 그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말해주세요.”
“... 말씀드리기에 앞서, 공녀님은 아름다우십니다.”
“예, 저도 안답니다.”
아멜리아의 재촉에 강현은 잠시 고민했다.
이걸 말하면 분명히 아멜리아는 상처를 입을 거다.
그렇다면, 다른 변명을 지어내야 할까.
아니.
어설픈 거짓말은 쉽게 간파당할 것이며 만약 그럴싸한 변명을 지어내더라도 사람의 눈빛을 읽는데 도가 튼 아멜리아를 속일 수는 없을 거다.
“... 혹시 제가 여자로 보이지 않는 건가요?”
솔직하게 말하려던 순간, 아멜리아가 먼저 물어봤다.
“예.”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다른 남성들과 강현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명백히 달랐으니까.
가끔, 큰 용기를 내고 몸을 밀착하고, 은근한 시선을 보내도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른 남자들처럼 가벼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더 마음에 들었던 부분에 그런 충격적인 이유가 존재하고 있을 줄이야.
“죄송합니다.”
강현이 사과했다.
왜 그가 사과하는 것인가.
아멜리아는 생각했다.
자기 맘대로 강현을 좋아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좋아해 달라고 한 적도 없으며 은근히 유혹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매력을 어필한 것도 아니었고 그의 크고 작은 매력들에 현혹된 것은 아멜리아, 자기 자신이었을 뿐이었다.
강현이 왜 굳이 이런 말을 지금 했을까.
아마도 그건 배려일 거다.
어차피 꽃 피우지 못할 마음.
시간이 흐를수록 상처는 더욱 커지기 마련이니까.
그런데도 왜 사과를 하는 것인가.
왜 사과를 들은 나는 그에게 화를 내려하는 것인가.
“... 죄송할 게 뭐가 있나요.”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고 얼굴이 살짝 붉어지기 시작했다.
“착각하신 거 같은데, 저는 당신을 단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어요.”
아멜리아는 자존심을 세우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남에게 거절당한 적 없던 자신이기에.
이렇게 허무한 결말을 맞이할 줄 몰랐기에.
그를 좋아했던 마음이 이 순간을 맞이함으로써,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는 걸 꺠달았기에.
제대로 시작해볼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분한 나머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거 같았다.
“루이스플 공작가의 차녀인 제가, 고작 뒷골목의 거지출신인 당신을 좋아할 것 같았나요?”
아멜리아는 강현의 신분을 단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뒷골목 거지 출신인데도 성인군자의 푸스탄트의 제자로써 선행을 베풀고 살아간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오히려 그가 평민이라는 사실에 기뻐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한다면 그가 평생 동안 느끼지 못했을 풍족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줄 수 있었다.
그가 베푸는 선행쯤이야,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으니.
그리고 그 푸스탄트의 제자다.
생력을 치유할 수 있는 약제학 명장이다.
그런 그에게 작위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에 불과할 것이 분명했다.
아멜리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한 말이 나왔다.
그에게 향할 이유가 없는 분노와 원한이, 그를 향했다.
저 표정 때문이다.
너무나도 상냥해서 상대가 상처받는 것을 걱정하고 있는 저 표정.
걱정과 동정 따위는 필요 없다.
고작 첫사랑을 한번 잃은 것만으로 슬퍼할 만큼 연약한 여자가 아니니까.
아멜리아는 마음속으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는 더욱 슬퍼하고 있었다.
그의 슬픔이 심한 말을 들어서가 아닌,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뱉어버린 말실수에 후회했지만 주워 담을 순 없었다.
“공녀님...”
아멜리아는 이제 13살이다.
아직 어리다.
강현이 원래 살아가던, 세계였다면 고작 중학교 1, 2학년 사이에 불과할 정도로.
그런 그녀의 분노는 순수한 분노가 아님을 강현을 알 수 있었다.
괴로움에 내지르는 비명과도 비슷한 것이라고.
“당신, 약제학 명장이죠? 저희 가문에서 찾고 있던.”
이미 추해 질대로 추해진 모습을 전부 보여줘 버렸다.
자신의 마음은 거절당했지만, 그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앞에 마주 보고 서서, 그의 시선을 받기 너무나도 괴로웠다.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혹시라도 발뺌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레이 님, 핏빛 칼날의 생력을 치료해주신 것도 당신이시고요.”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들켜도 상관없다.
“예, 맞습니다.”
“좋아요. 신문에서 읽으셨을지 모르겠지만 루이스플 가문의 전용 약제사가 되세요. 처음부터 당신을 영입하려고 접근해왔던 거라고요.”
아마 사실이겠지.
하지만 그녀가 여태껏 보여준 모습은 누군가를 영입하려 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닌, 사랑에 빠진 소녀였으니까.
중간에 목적이 뒤바뀐 것이 아닐까.
“죄송합니다, 저는 푸스탄트님의 제자, 세계를 방랑하며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 역시 그런가요.”
이제 끝이다.
더 이상 그에게 할 말도 들을 수 있는 말도 없다.
“그렇다면 볼일은 끝났으니 가볼게요.”
아멜리아가 등을 돌렸다.
꽉 쥐고 있는 주먹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깨는 들썩거리며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아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겠지.
“... 한동안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아멜리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침묵에 강현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수도 페론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기 위해 숙소로 향했다.
‘잘한 걸까.’
괴로워하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 대답해줄 수도 없으면서 최소 7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리라 할 수도 없다.
‘이게 맞는 거야.’
줏대를 가지고 스스로 올바르다고 생각한 일을 행해라.
푸스탄트가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강현은 이게 맞는 선택이라고 확신했다.
“... 강현 씨.”
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기척이 느껴져 왔다.
“괜찮으세요?”
레이였다.
“... 다 보고 있던 거야?”
“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중이었거든요.”
레이의 눈치를 보니 처음부터 보고 있던 듯했다.
“난 괜찮아. 이렇게 하는 게 맞으니까.”
레이의 안타까운 눈빛을 외면했다.
사실 잘 모르겠다.
정말 이게 옳은 선택이었을지.
하지만 강현, 자신에게 있어, 아멜리아가 소중한 사람이 되기 전에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어른으로써, 어린 아멜리아를 향한 책임감은, 너무나도 어려우며 무거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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