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어른으로써 (1)
* * *
피가 대지를 적시고 비릿한 혈향이 풍겨져 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고 더 많은 공기를 원하는 폐로 인해 숨은 가파르다.
온몸에서 흐른 땀이 옷을 적셔 찝찝하고 불쾌한 감각이 느껴져 왔다.
하지만.
사람과 몬스터들의 비명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비명소리는 함성과 환호의 소리가 되어 드넓은 초원 위에 울려 퍼졌다.
“하아... 힘들어 죽겠네...”
새벽부터 해가 지기까지.
장장 6시간에 걸친 대전투의 승리.
내면에서부터 무언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5번째 서클의 탄생을 알리는 태동이었으며, 사람들을 구하고 지키겠다는 신념을 지닌 사람으로서의 성장이었다.
“수고 많으셨어요.”
“네가 나보다 훨씬 많이 잡았잖아. 나보단 네가 더 고생했지.”
땅바닥에 주저앉은 강현의 옆에 레이가 살포시 앉으며 말했고 강현이 답했다.
레이는 검을 휘두른 검사이기 때문에, 마법사인 강현보다 더욱 많은 상처를 입었다.
대부분 긁히거나 살짝 베인 경상이 대부분이었지만.
옷도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지만 심하진 않았다.
“나도 빨리 너처럼 강해져야 할 텐데.”
“지금도 충분히 강하시잖아요. 앞으로 더 강해지실 거예요, 저보다 더.”
현재 강현의 나이는 13살.
마법사로서의 경지는 4 서클로 상급 마법사다.
어릴 때부터 마법을 수련한 사람들은 대부분 13살 때, 1 서클의 수습생이 된다.
그런데 강현은 무려 4 서클이다.
절대적인 수치는 아니지만 평균적으로 30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 4 서클 마법사가 된다.
“고맙다.”
강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레이의 말에 대답했다.
그리고 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던 순간.
‘... 응?’
찢어진 레이의 바지 주머니 사이에서 뭔가 보였다.
원형으로 말린 고무로 된 무언가.
레이의 찢어진 바지 주머니 사이로 스윽, 빠져나왔다.
“이건...”
바닥에 떨어진 고무를 손으로 집었다.
흡사 비타민이 연상되는 모양.
투명하고 맑은 막.
동그랗게 말린 고무.
“강현 씨...!! 주, 주세요...!!”
강현이 집어 든 고무막을 본 레이가 재빠르게 손을 뻗었다.
강현은 본능적으로 레이의 손을 피했고, 그녀의 바지 주머니에 있던 물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고무막이... 왜 여기 있어...?”
이 세계 버전의 콘돔.
아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남성용 피임기구였다.
“... 그, 그게...!”
당황한 레이는 급하게 할 말을 찾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피임기구를 들고 다녔다는 사실을 들켜선 좋을 것도 없다.
심지어 여자인 자신이.
조신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겠지?’
다른 사람과 사용할 목적은 아닐 거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레이를 바라봤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잡화점 주인이 선물이라면서 주셔서...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잡화점? 너희 길드 앞에 있던?”
“... 네.”
저번에, 레이를 치료하기 위해 갔을 때, 봤었던 기억이 있다.
20대 후반의 여주인이 운영하던 잡화점.
레이가 꽤 친하다고 말해줬었다.
“그, 그렇구나... 음...”
“으읏...”
그래도 미묘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또한 레이는 안심했다, 강현이 가장 중요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기에.
그가 알아채기 전에 돌려받으면 그만이다.
“도, 돌려주시면 안 될...”
“근데... 이거 불량품이겠지...?”
“...!!”
콘돔, 고무막을 유심히 살펴보던 강현이의 말에 레이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여기 뚫려있는데...?”
고무막의 중앙 부분.
바늘 정도 크기의 구멍이 뚫려있었다.
피임기구로써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채로.
“그, 그러게요.”
레이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대답했다.
저 구멍은 자신이 낸 것이었으니까.
언제가 그의 씨앗을 몸속으로 받아들여 그의 아이를 잉태하고자 하는 레이에게 있어서 피임기구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그런 레이는 잡화점의 주인에게 고무막을 받은 후, 기가 막힌 계획을 떠올렸다.
언젠가 그와 관계를 맺는 날이 올 때, 이 구멍 뚫린 고무막을 건네주자고.
그렇게 한다면 고무막을 착용하여 안심한 그의 씨앗을 쉽게 받아낼 수 있다.
완벽 범죄.
하지만 그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모를 정도로 레이는 멍청하지 않았기에, 실행으로 옮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걸리다니.
“레이야.”
“네, 넷...!”
잔뜩 긴장한 레이가 등줄기를 꼿꼿이 세우며 대답했다.
떨리는 눈동자는 강현의 눈과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고,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강현은 물었다.
“... 아니지?”
많은 것이 생략된 말이었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레이는 멍청하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레이는 강현에게 거짓말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자 자신의 은인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지만 뻔뻔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뻔뻔하게 높인 목소리는 급속도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레이야 내 눈을 봐봐.”
“...”
강현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망설이던 레이는 결국 눈을 돌려 그의 눈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레이는 두려워졌다.
“... 알겠어, 믿을게.”
강현은 믿기로 했다.
레이는 거짓말에 영 소질이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기지도 못했고.
하지만 강현은 그냥 믿기로 했다.
진실이든 아니든.
레이는 이상한 계획이 들켜 당황한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에게 들고 다니던 피임기구를 들켜서 당황하고 있다고 믿기로.
“슬슬... 돌아갈까...?”
“네에...!”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레이는 하루 종일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강현은 두려워졌다.
자신의 정조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
해가 지고 사람들이 잠자리를 들 때쯤, 몬스터들이 습격해왔다.
당연히 잠을 자지 못한 채, 해가 뜰 때까지 몬스터들과 목숨을 건 전투를 펼친 모험가들과 기사들은 성당히 지친 상태였다.
전투의 승리와 곧 받게 된 의뢰비.
명성에 잔뜩 흥분한 이들이 즐비했으나, 지금 당장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찝찝해진 몸을 상쾌하게 해 줄 따듯한 온수, 지친 몸과 정신이 쉴 수 있는 수면시간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본래의 계획은 뒤풀이로 마을에서 축제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몬스터가 습격해온 날의 오후는 전날과의 차이가 극심하게 드러낼 정도로 고요했다.
당연히 축제는 다음날로 미루어졌다.
또한 강현도 상당히 지친 것이 사실.
대략 16시간 동안 포션을 만든 직후, 6시간이라는 기나긴 전투의 시간을 치러야 했으니까.
구멍 뚫린 고무막이라는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강현은 빨리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기에, 레이와 이별한 후, 숙소로 돌아가 수면을 취했다.
그리고 축제의 날, 아침이 밝았다.
굳게 닫혀있는 창문을 넘어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활기는 마을의 축제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코를 자극하기 향기로운 음식의 냄새와 귀를 즐겁게 해주는 바드들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끄으응...”
곧장 침대에서 내려와 세면을 한 후, 깔끔한 옷을 차려입고 숙소에서부터 나왔다.
“아,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나오자, 바로 앞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아멜리아였다.
“공녀님? 여긴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척 보기에도 공들여 꾸민 것이 절로 느껴져 왔다.
아름다운 디자인의 장신구와 옅은 화장.
그녀가 평소 입던 드레스보다 훨씬 화려하며 아름다운 순백의 드레스까지.
“그, 그게... 어제 하루 동안 같이 있기로 했었잖아요...?”
아멜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인해 계획이 틀어졌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포기할 아멜리아가 아니었다.
계획은 그대로 하되, 결행일 뒤로 조금 미루면 그만이었다.
“... 그렇죠.”
아름답게 자신을 꾸민 아멜리아의 모습에 강현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아멜리아가 원하지 않는, 어쩌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말을 해줘야만 했으니.
“근데... 계, 계획이 틀어졌으니까. 오늘은 어떠실까 여쭤보려고... 찾아왔어요...!”
잔뜩 용기를 낸 아멜리아가 힘겹게 말했다.
어찌 보면 자신이 먼저 하는 데이트 신청.
그것도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자신과 함께해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고작 무엇을 누구에게 제안하느냐에 따라서 말 한마디 하기도 이렇게 벅차다는 걸 깨달았다.
“... 네, 그러죠.”
일단 여기는 자리가 좋지 않다.
적당한 타이밍에 사람이 없는 곳을 찾기 위해, 강현은 아멜리아를 따라나섰다.
∴
아멜리아와 축제를 즐기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웠다.
그렇기에 더욱 힘들었으며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에는 길거리에서 팔던 꼬치구이를 먹은 후, 형형색색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난 길가를 산책했다.
점심이 되자 아멜리아는 강현이 평소 좋아하던 빵집으로 향했다.
점심식사 후, 바드들의 노래를 들었다.
그들은 벌써 전날 새벽에 치러진 몬스터들과의 전투를 노래로 승화시켜 감미로운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철갑의 기사들과, 용맹한 모험가.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오는 빛무리.
전장을 붉게 물들인 붉은 검기.
누군가의 생명이 위험해질 때마다 나타나, 용맹하게 사람들을 구한 개의 형상을 취한 그림자, 흑견에 대한 노래를.
연극도 볼만했다.
괴물에게 사로잡힌 공주님을 구하는 용사님의 이야기.
강현에게는 별 감흥 없는 내용이었지만, 즐기지 못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밤이 찾아왔다.
세상이 황혼의 시간을 맞이함으로써, 조금씩 무거워지던 마음이 한계에 도달했다.
“오늘 재밌었어요...! 헤헤...”
아멜리아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거짓이었다.
느껴버렸다.
언제부터였을까.
맞아, 강현 님이 따로 만나자고 했던 날 아침부터였었지.
자신을 대하는 강현의 태도가 바뀌었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미묘하면서도 철벽 같은 거리감이 느껴져 온 것이다.
공작가의 차녀라는 높은 자리에 위치한 아멜리아에겐 눈치라는 건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안 좋은 예감을 눈치챈 것이었다.
“저도 재밌었습니다.”
그도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강현이 오늘 하루 동안 단 한순간도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멜리아는 알고 있었다.
‘...’
아멜리아라면 분명 눈치챘겠지.
그런 캐릭터였으니까.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간절함과 조급함이 느껴져 왔으니까.
하지만 아멜리아의 마음이 더욱 커지기 전에, 확실하게 말해야 한다.
괜히 여지를 주는 것만큼 그녀를 괴롭게 하는 건 없을 거다.
“저녁식사는... 제 숙소에서... 어떠신가요? 가문에서 온 요리사가 기다리고 있답니다...”
아멜리아는 현실에서 눈을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죄책감과 동정심이 느껴졌지만 외면했다.
“공녀님.”
강현은 아멜리아의 제의에 대답하지 않았다.
뭔가 다짐한 듯, 진중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 말하지 마세요.”
“아뇨, 중요한 말이라 꼭 해야 합니다.”
주변을 살폈다.
축제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뒤,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주변에 보이는 사람이라고는 꽤나 멀리 떨어진 남성들이 전부였다.
“... 꼭 오늘이어야 하나요...? 내일이라도... 괜찮잖아요.”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차분해지고 가라앉은 아멜리아의 목소리는 힘이 빠져있었다.
“오늘이어야 합니다.”
아멜리아가 분명 상처를 받을 거다.
하지만 나중에 더 큰 상처로 돌려줄 바엔, 1분 1초라도 서두르고 싶었다.
지금 그녀의 숙소로 가,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고 저녁시간을 함께 해봤자, 아멜리아는 더욱 고통스러워할 것이 분명하다.
“...”
아멜리아는 침묵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도망치고 귀를 틀어막아도 바뀌는 것은 전혀 없다는 걸 꺠달아버렸기 때문에.
“... 공녀님, 저를 좋아하십니까?”
무거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
그 무게를 견뎌내며, 강현이 입을 열었다.
아직 어린 아멜리아와 달리 자신은 어른이기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