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낭중지추 (3)
* * *
“레이야.”
글씨 연습을 하던 중, 요한이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요?”
“그, 이 옆에 있는 슈레이츠 백작령 기억하지?”
요한의 물음에 곧장 한 가지의 기억이 레이의 머릿속을 스쳤다.
항상 여름의 무더위가 사그라지기 시작할 이맘때쯤이 되면, 항상 슈레이츠 백작가는 하나의 의뢰를 전국에 위치한 모험가 길드에 내걸었다.
“올해도 모험가들을 소집하는 건가요?”
“응, 수확철이 다가왔으니까, 갈 거야?”
요한은 굳이 의뢰 내용을 따로 알려주지 않았다.
이미 4년 전부터 레이는 꾸준히 슈레이츠 백작가의 의뢰에 참가했으니까.
“당연히 가야죠.”
몬스터들로부터 마을을 지켜달라는 백작가의 의뢰는 기본적으로 보상금이 높았었다.
본인이 잡은 몬스터들의 마석을 백작가에다가 제출하면, 제출한 마석의 등급과 개수대로 보상금을 지급해준다.
즉, 강한 만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의뢰.
레이로써는 불참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 요한.”
“응?”
“의뢰 신청했죠? 구인 끝나기 전에 빨리 신청해줘요.”
다급한 목소리로 집무실을 찾아온 레이가 요한에게 말했다.
“이미 신청해놨어. 그런데 왜?”
“... 강현 씨도 온다고 해요.”
∴
여행길에 오르고 6일이 흘렀다.
강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대량의 몬스터를 잡을 수 있는 기회인 만큼, 더욱 많은 마나를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또한 모험가 길드로 들어온 슈레이츠 백작가의 의뢰에 레이가 신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헤어지고 나서 약 1주일 정도가 흐른 지금, 생각보다 훨씬 빨리 레이와 재회할 것 같았으니.
또한 푸스탄트와 약속했다.
이번 의뢰가 끝난다면, 검술을 알려주기로.
평소와는 달리 이번 여행은 상당히 알찰 것 같다.
“으음... 우리가 아마, 여기쯤이겠지?”
강현은 지도를 가리키며 푸스탄트에게 물었다.
직접 발로 걸으며 세계를 여행하는 그들에게 있어선 밤을 보낼 곳을 구하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그럴 거 같구나. 전날 밤에 이 마을에서 머물렀으니.”
푸스탄트도 강현이 들고 있던 지도를 살펴보고 전날 밤에 머물렀던 마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으음...”
밤을 보낼 곳을 찾지 못한다면 어절 수 없이 천막을 펼쳐 길거리에서 노숙을 해야만 한다.
노숙은 도가 틀 정도로 익숙해진 그들이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문명 속에서 살아간 이상, 하늘을 가려주는 지붕과 바람을 막아주는 벽 안, 침대 위에서 잠들고 싶었다.
강현은 지도를 살피며 하룻밤을 보낼 장소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현재 푸스탄트와 자신이 있는 곳은 루이스플 공작령, 1년 동안 끈질기게 강현을 찾고 있는 귀족 가문의 영지였다.
“할배, 오늘 밤을 여기서 보낼까?”
그렇게 강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북부의 심장이라고 불리며 루이스플 공작가의 성 앞에 위치한 도시. 카라이시스였다.
지도로 본 거리라면 아마 해가지기 시작할 때쯤, 카라이시스에 도착할 듯했다.
“으음, 그러자꾸나.”
푸스탄트의 동의도 받았다.
그들은 길을 따라 카라이시스로 향했다.
∴
푸스탄트가 누구이며, 그의 존재가 그 자체만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고통받는 이들과 죄지은 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성인군자라고 칭송받는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력을 치유할 수 있으며, 모든 치유사들의 귀감이자 동경의 대상이 되는 자다.
그가 추구하고 행하는 선(?)은 모든 백성들의 귀감이 되고 악으로부터 이겨낼 수 있는 용기,그 자체가 되어준다.
그게 푸스탄트라는 인물, 그 자체가 지니는 의미이며, 제국의 황제조차 그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는 이유였다.
사실상, 그 둘이 오랫동안 사귀어온 친구이기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넓은 대륙 속, 하나의 제국과 수많은 왕국들 중, 그 어디도 푸스탄트를 원하지 않는 곳이 없다.
세상을 넓으며 고통받는 이들은 수두룩하고 죽은 자조차 살릴 수 있다는 소문의 주인인 푸스탄트에게는 수많은 지원 요청과 의뢰가 들어온다.
무수한 의뢰들은 푸스탄트, 개인이 혼자서 감당해낼 수 없는 부분.
그렇기에 황실은 그의 위한 부서를 따로 재정했다.
수많은 지원 요청과 의뢰를 거르고 걸러, 한정적인 푸스탄트라는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푸스탄트 또한 이러한 황실의 배려를 감사해하였고.
그럼 푸스탄트에게 들어오는 의뢰를 선별하는, 푸스탄트 선별단의 직무는 누가 역임하고 있는가.
“... 아가씨,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네, 아버님께선 깊은 잠에 빠져계실 시간이니, 분명 괜찮을 거예요.”
“...”
황성과 수도, 페온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나눠진 동부, 서부, 남부, 북부.
그중 넓고 비옥한 초원이 펼쳐져있으며 근처에 위치한 수많은 왕국들과 교류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충지인 북부.
그런 북부의 심장인 도시. 카라이시스와 그 주변 마을을 공작령 하에 두고 통치하고 있는 북부의 실질적인 지배자, 루이스플 공작가가 역임하고 있었다.
푸스탄트 선별단이 선별한 의뢰를 루이스플 가문의 가주인 브라함 루이스플이 최종 승인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흐음... 아마 이쪽에 있을 텐데요.”
지금 아멜리아와 히엘은 늦은 밤, 그의 집무실로 몰래 잠입하여 푸스탄트와 관련된 서류를 찾고 있었다.
푸스탄트... 아니.
항상 그와 함께 세계를 방랑하고 있는 푸스탄트의 제자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아멜리아는 이미 세이브리스 모험가 길드의 핏빛 칼날을 치료해주었으며 아버님께서 찾으시던 약제학 명장이 푸스탄트의 제자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날짜별로 나누어진 서류들 사이, 벌써 5일 전의 서류까지 싹 다 뒤져본 아멜리아는 6일 전의 서류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사인 히엘 또한 그녀의 옆에서 열심히 도왔고.
하지만 의심쩍었다.
“그 푸스탄트님의 제자가 정말 약제학 명장입니까?”
“당연하죠. 그분이 아닐 수가 없답니다.”
시간상으로 따지자면 5일 전.
세이브 리스의 핏빛 칼날이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신문을 읽은 아멜리아는 세이브 리스 백작령으로 향하기 앞서, 자신이 읽었던 신문을 발행한 신문사에 방문하여 이 이야기가 며칠 전의 일이었는지 확인했다.
그들은 아마 2일 전, 핏빛 칼날이 푸스탄트의 치유를 받아 회복한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즉, 강현이 레이를 치료해준 뒤, 페론으로 돌아가고 나서 2일이 지난 시점에 아멜리아는 신문을 읽은 것이었다.
귀족인 자신이 다른 귀족가의 영지를 방문할 때는 적절한 철자를 거치고 정식적으로 방문을 해야만 하지만, 아멜리아는 서둘렀다.
가시적인 형태로 남겨두지 않은 정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퇴색되기 시작하여 본연의 가치를 잃어버리니.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평범한 여행객으로 위장하여 세이브리스 모험가 길드가 있는 성 앞 마을로 향했다.
공작령과 인접한 도시였기에, 말을 타고 아침에 출발하여 점심때쯤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에 도착한 뒤, 아멜리아는 히엘과 함께 정보를 수집했다.
가장 먼저 방문한 모험가 길드.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인지, 원하는 정보들을 전혀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아멜리아는 길드가 아닌 길드 근처의 백성들과 가게들을 돌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한 가지 정보를 얻게 되었다.
3일 전, 흑발 흑안을 지닌 작은 남자아이가 여우 가면을 쓴 채,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한 백성의 말이었다.
흑발 흑안을 가진 사람은 작정하고 찾아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정보임을 확신한 아멜리아는 곧장 근처에 위치한 모든 음식점을 샅샅이 뒤졌다.
만약 흑발 흑안의 남자아이가 이 마을에 머물며 식사를 했다면 필연적으로 맨 얼굴이 드러난 순간이 있었을 테니까.
여우 가면 속 얼굴.
그 얼굴의 생김새를 알 수 있다면, 정답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나는 것이 있다는 식당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특이한 머리색과 눈동자 색 덕에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 그는 예쁘장한 얼굴이었다고 증언했다.
흑발 흑안, 예쁘장한 얼굴의 어린 남자아이.
총 4가지의 단서를 얻은 순간, 아멜리아의 머릿속이 한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아버님께서 말씀해주셨었다.
푸스탄트는 흑발 흑안의 거지를 자신의 제자로 거둬들여, 함께 세상을 방랑하고 있다고.
이름이 뭐라고 했었더라.
특이한 이름이라서 금방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이 강현.
특이하게도 성이 앞에 위치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얻은 정보.
갑자기 멀쩡해져서 나타난 핏빛 칼날, 레이라고 불리는 여자아이가 그와 함께 마을을 거닐고 있었다는 목격담이 나온 것이었다.
그 후, 아멜리아는 강현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약제술에 능하다는 정보를.
마을 주민들 모두가 알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던 레이가 어느 날 갑자기 멀쩡한 상태로 돌아왔는데, 함께 있던 남자아이가 생력을 치유할 수 있는 푸스탄트의 유일한 제자이며 약제술에 능하다?
확신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찾아 헤맸는지...’
“...”
히엘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작 13살.
자신이 모시는 주인인 아멜리아님과 비슷한 나이의 남아가 생력을 치유할 수 있으며 공작님께서 찾으시는 약제학 명장이라니.
“... 그래도 혹시 다른 이름 있는 약제사 들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절대, 아니에요.”
확신의 찬 말투로 아멜리아가 대답했다.
“약제사들의 금전욕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시나요? 그들이라면 분명 저희 가문의 전용 약제사가 될 기회를 무시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 약제사가 강현일 확률은 더욱 올라갔다.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푸스탄트의 제자가 아니던가.
또한, 만약 히엘의 말대로 이름 있는 약제사들 중 하나였다면 이미 자신의 오라버니가 찾았을 것이 분명했다.
“...! 찾았다.”
잠시 후, 아멜리아는 드디어 강현의 위치를 파악할 문서를 찾을 수 있었다.
6일 전에 작성된 문서에는 푸스탄트가 몬스터의 습격에 대비해, 슈레이츠 백작가에 지원을 간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슈레이츠 백작령.
아멜리아가 머물고 있는 공작령과 가까운 거리였다.
“... 히엘,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세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어디로 향하는 겁니까?”
아멜리아의 말에 목적지로 데려다 줄 마차와 마부를 대기시켜둬야 할 필요성을 느낀 히엘이 물었다.
“북동쪽에 위치한 슈레이츠 백작령으로 향할 거예요.”
슈레이츠 백작령에 먼저 도착한 뒤, 강현과 자연스럽게 마주친다.
머릿속에서 구상되기 시작한 계획.
아멜리아는 어둠 속, 등잔불 밑에서 작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집착과 탐욕이 깃들어있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찾아 헤맸던 사람이다.
공녀의 집착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게 아멜리아라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백작령으로 향하기 위해 마차에 오르려던 아멜리아의 귀에, 성 앞에 위치한 도시, 카라이시스에 푸스탄트가 찾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