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낭중지추 (2)
* * *
워프스크롤을 사용한 강현이 떠나간 이후, 늦은 시간의 거리엔 레이만이 혼자 남게 되었다.
“헤헤...”
이마에서 그의 입술 감촉이 여전히 아릿하게나마 느껴지고 있었다.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입술과 입술이 서로 맞닿는 키스를 아니라 할지라도, 큰 진전임은 틀림없었다.
‘내일 하루만 세수하지 말까요.’
그의 입술이 남긴 촉감과 흔적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느끼고 싶었기에, 레이가 생각했다.
하지만 금방 포기했다.
피부가 나빠지니.
자신의 꿈인 강현의 아내가 되기 위해선 외모관리에서 신경써야만 한다.
해가 진 마을의 거리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들과 밝은 달빛이 세상을 은은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그 빛들에 의지한 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 레이는 업무가 끝나 문이 닫힌 길드에 도착했다.
대문에 걸린 자물쇠에 열쇠를 삽입하여 문을 연 뒤, 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왔어...?”
“요한? 이 시간까지 안주무시고 뭐하신 거에요?”
길드에 배치된 테이블에 앉아있던 요한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연갈색 양주와, 얼음이 쌓여있는 상자을 옆에 두고, 유리로 조각된 온더락잔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술에 취한 모양이었다.
“승전보는?”
나이가 들면 궁상맞아진다더니, 나도 이제 늙었구나. 요한은 생각했다.
제자의 사랑이 이루어져 행복하면서도, 소중한 딸을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에 쓸쓸함을 느껴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 늦은 시간까지 레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고.
“뭐... 요한과 메르시 덕에, 성공적이었어요.”
항상 무뚝뚝하고 무표정했던 레이였지만 강현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항상 사랑의 빠진 소녀의 표정을 짓고 있다.
“잘됐네. 그럼 이제 상견례라도 준비해야겠네, 혼수는 뭐가 좋을까...”
씁쓸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레이를 그 누구보다 생각하고 아끼는 요한으로써는 드디어 맺은 사랑의 결실을 축복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레이만큼, 요한도 기뻐하고 있었으니.
“가, 갑자기 무슨 상견례예요...!”
당황한 레이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응? 그게 아니면 뭔데?”
2차 성징을 맞이하고 성인이 된 젊은 남녀가 이런 늦은 시간까지 밖에서 맴돌아 이제야 돌아온 거다.
무엇을 했는지는 뻔하지 않은가.
사랑의 결실을 맺고 육체적인 사랑을 나눈 거라고, 요한은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냥...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레이의 말에 요한은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레이를 떠나보내기엔, 시간이 더 남은 모양이었다.
∴
늦은 새벽.
드디어 모험가 길드, 세이브리스 지부에서의 용무를 끝내고 수도, 페론으로 돌아온 강현은 무작정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 병신인가.”
온몸이 달아오르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살면서 여자 손조차 잡아본 적 없던 강현에게 있어서 이마에 키스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후회되기도 했다.
생후 첫 키스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도 있던, 유일무이한 기회일 수도 있었다.
레이의 붉은 입술을 얼마나 부드럽고 따듯할까.
정말 주워 들어온 지식처럼 키스는 달콤한 걸까.
제 아무리 금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강현이라고 해도, 사랑에 대한 금욕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흔히들 말하는 은어로 모쏠 아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넘치다 못해 과할 정도였으니.
“아니야, 잘했어. 젠틀하고 좋았을 거야.”
레이를 아껴줄 거다.
그녀가 보내주는 사랑에 진지하게 임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더라도 사랑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럼 이마에 키스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어쩌라고, 레이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간절한 눈빛으로 입맞춤을 부탁하는데, 어떻게 배기냐고.
충분히 잘 참은 거라고.
강현은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논쟁을 펼쳤다.
강현과 강현의 싸움.
결과는 자기 합리화라는 이름의 필살기를 사용한 강현의 승리였다.
이성과 욕망 사이에 적절한 타협이었던 걸로.
어쨌든, 꽤 오랫동안 수도의 밤거리를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요동치던 심장이 진정되었고, 달아오른 열기 또한 식었다.
강현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2박 3일간, 레이에 관한 일들 때문에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하지 못했었으니까.
집에 도착한 후, 옷도 벗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강현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하지만 밝게 미소 짓는 레이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서일까.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분명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결국 어찌어찌 잠에 든 후, 내일의 태양이 떠올라 세상을 밝게 비추고 세상은 아침이라는 활기의 시간을 맞이했다.
강현은 항상 규칙적인 생활을 지향했다.
매일 아침마다, 잠에서 일어난 강현은 눈을 뜬 그 순간부터 단 1초도 침대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곧장 몸을 일으켜 세운 뒤, 몸을 씻으며 오늘 하루 동안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뒤 실행으로 옮긴다.
그가 지향하는 규칙적인 생활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평소라면 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겠지, 그는 침대 머리맡 옆에 배치된 선반.
그 위에 놓인 통신 스크롤을 집어 들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통신 스크롤이 연결된 상대는 레이.
‘연락은 확인해야 하니까.’
자신의 행동에 별 다른 의미를 부여하진 않겠다 했지만, 내심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 씻을까.”
통신 스크롤은 아무런 글자도 적혀있지 않았다.
강현은 태연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곧장 욕실로 향했다.
솔직히 아쉬웠다.
잠에 들기 전까지만 해도 연락이 와 있으면 무슨 답장을 보낼까 기대하고 있던 그였기에.
한편 레이는.
“다시.”
“이,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아니, 레이야, 네가 볼 때 이 글씨가 정말 잘 쓴 것처럼 보이는 거야?”
메르시의 스파르타식 지도 하에, 예쁜 글씨를 쓰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이른 아침, 일어나자마자 강현에게서 받은 통신 스크롤에 아침인사를 적으려 했던 레이였지만, 막상 뭐라고 쓸지 감이 잡히지 않아 메르시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메르시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글씨체로 편지를 쓰면 안 된다. 정이 뚝 떨어질 거다.
글씨를 예쁘게 쓰는 법부터 연습하자.
“... 알겠어요.”
자신이 적은 글자를 강현이 읽는다.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적은 아침인사를 그에게 보낼 수는 없었다.
레이는 예쁜 글씨체를 위해서 고작 글씨 연습에 분골쇄신했다..
∴
“뭐야, 할배. 집에 있었어?”
욕실에서 몸을 씻은 후, 거실로 나온 강현은 푸스탄트와 마주쳤다.
“그래, 길드장의 의뢰는 잘 완수하고 온 것이냐?”
“뭐... 알잖아.”
기세 등등해진 강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끌끌... 그렇겠지. 훌륭하구나. 표정에서부터 이전의 느껴지던 근심들이 느껴지지 않게 되었고.”
“그래? 잘됐네.”
회귀 후, 7년 동안신경 쓰고 있던 레이에 관한 일들이 모두 깔끔하게 정리 되었다.
당연히 근심과 걱정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고.
강현은 앞으로 자기 앞가림만 신경 쓸 수 있는 여유로운 상황을 맞이한 것이 기뻤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낼 것이냐.”
“음... 모르겠네.”
마법수련은 어느 정도 끝났다.
강현은 현재 자신의 서클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마법들은 전부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앞으로 마법사로서의 자신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몬스터를 사냥하여 마나를 늘리거나 마법서를 구해 또 다른 마법을 습득하는 것뿐이었다.
흑적초의 연구는 이미 끝을 내렸고, 사전에 정해두었던 두 송이의 흑적초는 전부 생력의 포션으로 제조했다.
남은 8송이에서는 씨앗을 채취해 다시 심었고.
그렇기에 강현이 오늘 할 일은 간단했다.
“딱히 꼭 해야 할 만큼 특별한 일은 없어. 그냥 마법 수련이나 하려고.”
첫 번째, 흑적초에 물 주기.
두 번째, 몬스터를 사냥하기.
그 외에는 이렇다할 계획이 전무했다.
“그럼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려무나.”
“여행?”
“그래, 북부지방에 있는 슈레이츠 백작가에서부터 내게 치유사로써 지원을 요청하더구나.”
“슈레이츠 백작가...? 치유사로 지원이면...”
강현은 기억을 더듬어 봤다.
플레이어 능력 덕에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전생의 기억.
하지만 아무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뭐 때문에 지원을 보내는 건데? 딱히 기억나는 게 없어.”
“듣기로는 거대한 강을 가로지르는 넓은 초원 위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했었지, 슈레이츠 백작가에서 생산되는 곡식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고.”
“으음... 몬스터가 약탈이라도 하러 온다는 거야?”
치유사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거라면 역병, 또는 전투의 지원병이다.
그리고 여름의 무더위도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하고 수확과 독서의 계절인 가을이 찾아오고 있다.
겨울을 버틸 식량을 구하려 하는 몬스터들의 습격이 가장 빈번한 계절이다.
강현은 수많은 경우의 수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수를 골라 푸스탄트에게 물었다.
“정확하구나, 역시 통찰력이 뛰어남은 인정해야겠어.”
“이 정도로 뭘.”
푸스탄트의 칭찬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강현이었지만 기쁨의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이런 사소한 칭찬에 아이처럼 기뻐하기엔 강현은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쉽게 말해서 나잇값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서 비롯된 평범한 자존심이었다.
“매년, 수확의 시기가 될 때마다 근처에 위치한 산에서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내려와 마을을 습격한다더구나.”
“백작가에서는 몬스터들의 습격까지 앞으로 2주일 정도 남았을 거라 예상하고 있는 모양이야.”
“으음... 그래?”
무슨 내용이고 무엇을 바라는 도움인지만큼을 알겠다.
하지만 강현의 신경은 다른 쪽으로 쏠려있었다.
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가.
“아마 전생에서 할배가 나 두고 가서 기억 못 하는 거 같은데?”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전생.
강현의 전투능력은 전무했다.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들과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수준.
푸스탄 트는 아주 적은 가능성이라 할 지라도 생명의 위협이 있는 곳에는 강현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전생이라면 강현은 집에 혼자 남아 제약술에 관한 연구만 하고 있었겠지만 푸스탄트는 강현과 함께 갈 생각이었다.
“아쉽긴 하지만 별 수 없겠구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변치 않을 테니.”
“그래서 언제 출발할 건데?”
“오후가 되기 전에 출발할 것이니, 빨리 준비를 끝내거라.”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푸스탄트의 제자로써 그와 함께하는 것은 갑작스러운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알겠어, 준비하는 데까지 한 시간도 안 걸릴 거야.”
강현은 곧장 자신의 공방으로 향한 뒤, 약을 제작하기 위한 약초와 부산물들, 도구들을 챙겨 인벤토리를 꽉꽉 채워놓았다.
사실 표현과는 다르게 인벤토리의 용량은 무한했지만.
그리고 레이와 연결된 통신 스크롤에 글자를 적었다.
간단한 인사말을 적은 후, 몬스터의 습격을 대비하기 위한 지원을 받아, 슈레이츠 백작가로 향할 거란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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