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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겜 속 중간보스와 히로인들이 내게 집착함-23화 (23/148)

〈 23화 〉 낭중지추 (1)

* * *

강현의 타액이 들어가 있다.

그의 유전자.

‘그렇다는 건...’

이게 바로 말로만 들었던 간접키스라는 걸까.

아니 그 이상이다.

그의 입이 닿았던 곳에 입이 닿았던 게 아니다.

그의 타액이 들어간, 포션을 마신 거다.

그의 유전자가, 지금 자신의 몸속 깊은 곳까지 들어간 거였다.

언어유희를 해보자면 간접딥키스.

“흠흠...”

부끄러운 걸까.

얼굴을 붉힌 강현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항상 당당했던 모습은 어디 간 건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20병...’

그의 말 대로라면, 그의 타액이 첨가된 생력 포션이 무려 20병이나 더 있는 거였다.

20병.

20번이나 더 그의 타액이...

“꿀꺽...”

어색한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은 의무실의 방 안에,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아니겠지...?’

자신이 침을 삼켰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레이는 강현이 마른침을 삼킨 것이기를 바라며 그의 표정을 살펴봤다.

그가 아니었다.

그는 벙찐 표정으로 놀란 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레이는 침을 삼키는 소리가 자신의 목에서 난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강현의 타액이 섞여있는 포션을 보면서 침을 삼켰다.

‘어떡하지...?’

방금 자신이 한 행위를 본다면 누구라도 변태라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엄청난 수치심을 느낀 레이는 도저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생기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다.

‘... 이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레이뿐만이 아니었다.

수치심에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 레이를 본 강현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좋은 방법은, 못 들은 걸로 해서, 없었던 일로 만드는 거다.

그렇다면 당당하게,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말해줄까.

‘미쳤나.’

그걸 누가 믿겠는가.

그냥 적절한 주제로 전환하여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 듯했다.

“지금까지 별 일은 없었어?”

“네, 네에...?”

“회귀한 이후에 말이야, 뭐, 특별한 일은 없었던 건가 해서.”

나름 적절한 주제 전환이다.

강현은 자신을 칭찬했다.

“별일 없었죠, 모험가 활동하고, 가끔씩 고아원에 들러서 일도 거들어주고...”

성공적인 주제 전환은 무거웠던 분위기를 한결 가볍게 풀어줄 수 있었으며,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레이는 자신이 회귀 후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줬다.

아직 어린 몸으로 검기를 사용하려다가 기절할 뻔했었던 일, 검을 수련하고 메르시에게 신부수업을 받았던 지난날들을.

강현은 생각했다.

레이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회귀한 이후, 단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고 필사적으로 살아왔다고.

그녀가 말해준 회귀 후의 날들은 더 이상 전생의 그녀처럼, 외로움과 고독함이 만연해있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소중하게 아껴주는 요한과 메르시에 대한 고마움이 굳이 따로 말하지 않더라도 절절히 느껴져 왔다.

레이의 회귀 이후의 삶의 방향은 대부분, 한 목적지를 향해 귀결되었다.

“강현 씨는 어떠셨나요?”

자신의 이야기가 끝난 레이가, 쑥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즐겁게 자신의 이야기를 끝 마치고 나니, 조금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순수한 미소였다.

“뭐... 나야 그냥 열심히 살았지.”

전생과 마찬가지로 푸스탄트를 따라 세계를 방랑하며 고통받는 이들을 도왔다.

여지껏 모르고 있던 검과 마법에 대한 재능을 깨달은 후,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강현은 솔직하고 담백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그럼, 푸스탄트... 님도, 전생의 기억이 있으신 건가요...?”

레이는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강현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강현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푸스탄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조차 꺼리는 레이였다.

자신 때문에 강현이 얼마나 상처받고 괴로웠는지 알고 있는 그녀인 만큼, 푸스탄트의 이름을 자신의 입에 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인이 죽고 난 후의 내 시점만 알고 있어. 그런 말이 있잖아, 하늘에서 지켜봐 준다고. 똑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거야.”

“그렇군요...”

레이에게 너무 눈치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굳이 그러진 않았다.

그녀도 이미 자신이 완전한 용서를 받은 것을 알고 있다.

지난날의 죄책감과 후회에게서 이겨내는 건, 제 아무리 그녀의 사랑의 받고 있는 자신이라도 간섭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강현은 생각했다.

“어쨌든, 앞으로 할배한테 검술도 배울 예정이야.”

“검술... 그럼 혹시 저도 검술을 알려드릴 순 없을까요? 아직 모자란 실력이긴 하지만,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어요!”

검술이라는 단어를 들은 레이가 자신감이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하는 부분이기에, 상당히 의욕적인 모양이다.

레이가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그녀였기에.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괜찮아.”

하지만 강현 레이의 제의를 칼같이 거절했다.

“... 네.”

비 속에 버림받은 강아지가 짓는 표정이라는 게 이런 표정일까.

실망감과 아쉬움으로 가득 찬 표정이었다.

“알다시피 내가 한 곳에 머물고 있지 않잖아.”

강현은 푸스탄트와 함께, 세계를 방랑하고 있다.

수도, 페론에 거주지가 존재한다고 해도 1년, 365일 중에 레폰에 머무는 일수는 20일 조차 되지 않는다.

지난 1년 동안은 흑적초 연구를 위해 수도에서 생활했지만.

그리고 한 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은 모험가인 레이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랬었죠. 그럼... 아, 아니에요.”

그의 여행에 동행하게 해 줄 수 있냐고 말하려던 레이는 말을 삼켰다.

그들의 방랑은, 수익성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선행을 목표로 두고 있다.

그녀가 벌어들인 수익중 대부분은 총 5곳의 고아원에 기부되고 있다.

그들과 동행한다면 그녀는 돈을 벌지 못할 거고, 고아원의 아이들은 굶주리거나 안식처를 잃어버리고 만다.

“따라오고 싶어?”

“마음은 굴뚝같아요. 항상 강현 씨 곁에 있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제게 기대고 있는 아이들이 너무 많은걸요.”

그렇기에 레이는 포기했다.

수년간 정을 쌓아온 아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또한 강현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구나.”

강현은 안심했다.

푸스탄트로도 충분히 검술을 배울 수 있겠지만, 레이에게서도 배울 부분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검술은, 종류마다 천차만별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레이도 함께 여행을 한다면 분명 즐거울 거다.

하지만 그래서는 레이는 자신이 했던 약속조차 지키기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럼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강현의 향후 계획이 끝나고 레이의 차례가 찾아왔다.

“저는... 평소랑 비슷할 거 같아요. 검술 훈련하고, 의뢰를 해결하고. 가끔씩 고아원에 들려서 아이들이랑 놀아주고.”

레이의 향후 계획도 강현과 마찬가지로 간결했다.

하지만 강현과 레이 모두, 뚜렷한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뭐, 좋은 계획이네. 그럼 슬슬 일어나자.”

“버, 벌써 가시는 건가요...?”

강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그의 손목을 붙잡은 레이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직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쁜 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숨길 수 없는 아쉬움이 돌발행동으로 나타났다.

붙잡았던 그의 손목에서 황급히 손을 떼자 강현이 말했다.

“아니? 여기까지 왔는데 왜 벌써 가. 적어도 마을 구경은하고 가야지.”

기왕 1년 동안 쭉 생활하던 집에서 나와, 먼 곳까지 떠나온 거다.

볼일이 다 끝난 상태라고는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기는 아쉽다.

회귀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정진해왔던 강현은, 오늘 하루정도 마음껏 놀기로 정했다.

“그런데 내가 이 마을은 처음 오는 거라서, 혹시 오늘 시간 좀 있어?”

“...! 네, 당연하죠! 시간 엄청 많아요.”

강현의 물음에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한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단 둘이서 하는 마을 구경이다.

연인들의 데이트 같지 않은가.

“그럼 가자.”

레이와 함께 마을을 돌며 시간을 보냈다.

길드 밖으로 나온 후, 가장 먼저 점심식사 시간을 가졌다.

때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했으며, 의료실에 몸져누워있던 동안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던 레이는 꽤나 허기진 상태였기에.

점심식사를 위해 레이가 추천해준 가게는,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음식점이었다.

고기와 각종 채소가 둥둥 떠다니는 수프와 샐러드, 호밀빵치고는 상당히 부드러운 호밀빵까지.

“식사는 어떠셨나요...?”

“메뉴는 평범한데, 맛은 보통이 아니더라. 주방장 실력이 좋은 모양이야.”

“다행이네요.”

성공적인 결과에 만족한 레이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곳 말고도 다른 고급 음식점들이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평소에도 자주 애용했던 가게였던 만큼, 제일 확실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

“저건 뭐야?”

강현이 멀리서 보이는 천막으로 덮인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흰색과 노란색이 번갈아가며 색칠된 천막이었다.

“아, 저거는 극단이 연극하는 극장이에요, 이 마을에서 매일 새로운 연극을 선보이는 극단이 있는데, 꽤 유명해서 다른 지역이나 마을에서도 자주 찾아와요.”

“그래?”

연극, 솔직히 현대인인 강현에 성에 찰 리가 없었다.

드라마, 영화, 만화 등등.

더 자극적이고 신선한 즐길거리는 얼마든지 있었으니.

하지만 이 세계에 전생하고 문명의 이기를 강제로 끊게 되었다.

심각할 정도로 오락거리가 부족한 이 세계.

그중 연극의 존재는 이제 지루한 오락이 아닌 소중한 오락이었다.

“혹시 연극 좋아해?”

“음, 지금까지 봐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시간이 늘 부족했어서.”

“그럼, 이번 기회에 한번 같이 봐볼래?”

“... 네, 좋아요.”

강현과 함께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 좋다.

그 말을 뱉으려다가 다시 삼킨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았다.

극장 안으로 들어간 지, 5분 만에 연극이 시작되었으니.

약 1시간가량 진행된 연극의 간단한 줄거리는 이거였다.

서로 엇갈린 두 남녀가,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며 다시 재회하는 줄거리.

나름 볼만 했다.

두 남녀 사이의 아슬아슬한 감정선을 훌륭하게 표현해냈으며 배우들 개개인의 연기력이 뛰어났다.

스토리를 이어가는 전개와 개연성도 확실했으며, 특히 두 남녀가 재회하는 순간 터지는 감정에 대한 연출은 예술이었다.

남주와 여주가 키스를 하며 그들에게서부터 흘러나온 분홍색의 마나가 하트 모양을 그리며 그들 주변을 장식해주었다.

아마 마법이겠지.

감정이입이 잘된 것인지, 레이는 촉촉해진 눈가를 손가락으로 닦으며 연극을 감상했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재밌게 본 것 같아, 안심했다.

그 후, 크고 맑은 물이 특징인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숲에 들러 잠시 동안 산책한 후, 여러 가게들을 들리며 구경하는 시간을 가졌다.

고급 음식점에서,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저녁 식사로 먹고, 밤이 된 강현과 레이는 이별의 시간을 맞이했다.

“오늘 즐거웠어.”

“저도요, 강현 씨... 혹시 저희, 또 언제 볼 수 있을까요?”

최고로 행복한 하루였다.

모든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사랑하는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하지만 너무나도 행복했기에 이별의 순간이 더욱 괴롭게 다가왔다.

한번 맛봐버린 행복이 가져올 금단현상이 두려웠으니까.

“모르겠네, 시간이 될 때마다 한 번씩 만날 수는 있겠지만, 내가 매일 똑같은 일정대로 움직이진 않으니까.”

도움이 필요한 곳이 생기면 그곳으로 향한다.

언제 상황이 발생할지, 그 상황이 언제부터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푸스탄트라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강현은 레이에게 확답을 주지 못했다.

“역시 그렇겠네요.”

레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떠나야 하는 그에게 매달려 마음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 잃어버릴 뻔한 생명을 받았고 선물을 받고 평생 잊지 못할 행복한 시간까지 받았기에.

“이거 받아.”

“이건... 통신 스크롤인가요?”

자신의 스크롤에 글씨를 적어 내리면, 연결된 상대방에 스크롤에 똑같은 글씨가 적히는 값비싼 통신수단, 통신 스크롤이었다.

“응, 연락하고 싶을 때마다 얼마든지 연락해. 나도 시간 생기면 알려줄 테니까 얼굴도 한번씩 보자고.”

“... 네.”

강현이 건네준 통신 스크롤을 소중하게 받아 들며 레이가 대답했다.

언제든지, 얼마나 떨어져 있든 간에 강현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주는 마법 아이템이었기에.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야만 하는데, 기쁘지가 않았다.

강현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에휴... 왜 또 그렇게 울상이야, 나랑 떨어지기 싫어서 그래?”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

하지만 레이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어차피 앞으로 영영 못 보게 되는 것도 아니고, 원할 때마다 연락도 할 수 있는데.

나를 얼마나 좋아해야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강현은 레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레이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끄덕여 강현의 물음에 답했다.

무슨 애도 아니고.

강현이 생각했지만 절대 부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레이의 소심한 투정이 귀엽고... 조금, 아주 조금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줄까, 강현은 잠시 고민해봤다.

언제쯤 말할지 고민하고 있던 말을 하기에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한 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7년 후지? 20살일 될 때가.”

“나 아카데미에 입학할 거야, 할배한테 마법을 배우고 있긴 한데, 할배가 알려줄 수 있는 마법도 결국 한정적이라서. 검술도 별반 다르진 않을 거고.”

푸스탄트가 뛰어난 검사이자 마법사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도 모든 마법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검사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검술들을 알고 있는 것은 더욱 아니고.

그렇기에 강현은 마법사이자 검사로써의 견문을 넓히고자 20살이 되기 전, 푸스탄트에게 배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배워둔 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아, 아카데미요...?”

갑자기 아카데미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것인지 의아한 레이가 되물었다.

“응, 할배랑 약속했어, 뭐, 약속이라기보다는 할배가 그렇게 하는 건 어떻냐고 물어본 거지만.”

“어쨌든, 20살이 되면 할배한테서 독립하고 아카데미에 입학할 생각이야, 언제까지 할배랑 같이 살 것도 아니고, 슬슬 나도 내가 알아서 해야지.”

이미 푸스탄트와 대화를 통해 끝낸 이야기였다.

“레이, 네가 말해줬었지? 내 검과 방패가 되어주겠다고.”

“... 강현 씨가 허락만 해주신다면요.”

“그러면 7년 후에 내 사용인 신분으로 같이 입학해줄래?”

“제, 제가 아카데미에...?”

“응, 아무래도 나 혼자 입학하기에는 조금 무리일 거 같아서.”

페론티아 제국의 아카데미는 절대다수가 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현 또한 조만간 황실에서부터 귀족의 작위를 수여받은 뒤, 아카데미에 입학할 계획을 세워두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용인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하다.

의무는 아니지만 강현은 이미 게임 속에서 제국의 아카데미를 경험해본 적이 있다.

귀족 출신의 학생들 사이에서 온갖 정치와 권모술수, 중상모략이 판치는 곳인 아카데미.

그 작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언제나 믿을 수 있는 든든한 사용인이 있으면 좋다.

쉽게 말하자면 평민 출신이라고 무시를 당해 따돌림을 당할까 봐.

푸스탄트와 이야기를 한 뒤, 더욱 많은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로 결정한 강현은 항상 누구와 함께 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때마침 자신의 눈앞에 등장해준 레이, 강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임이 분명했다.

“네가 만약 나랑 같이 가준다고 한다면, 네가 짊어지고 있는 건 전부 해결해줄게.”

레이의 선행은 대부분 돈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편리하기도 하며, 돈만 있다면 누구나 가능했기에.

레이 고아원에 매달 얼마씩 기부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현에게 있어선 돈이란 이런 거다.

사막에 깔린 모래.

허리만 조금 숙이고 팔을 조금 뻗는 것으로 얼마든지 퍼낼 수 있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는 것이 강현에게 있어서 돈이 갖는 의미였다.

“그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나요.”

20살이 되더라도 맹세는 변치 않는다, 레이는 생각했다.

강현과 약속했던 속죄의 삶은 오로지 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강현과 푸스탄트뿐만 아니라,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받은 모든 사람에 대한 속죄다.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면 모험가 활동을 못하게 된다.

그렇기에 강현이 말한 것이다.

고아원의 기부 같은 금전적인 문제들을 자신이 대신 짊어지겠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아니지. 내가 대신 너의 속죄를 해주는 게 아니야. 나는 너라는 모험가를 내 사용인으로써 고용하는 거라고.”

“고용... 이라고요?”

“그때, 상황보고 결정해야겠지만, 내가 너를 고용하는 비용은, 너에게 필요한 돈, 전부 다니까.”

강현은 레이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고민해봤다.

어떻게 하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레이와 함께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을까.

답은 간단했다.

그녀의 금전적인 문제를 고용이라는 형태로 고용비를 주어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그가 말한 고용이라는 형태로 인해 의미가 크게 달라졌음을 레이 또한 인지했다.

그가 대신 돈을 내주는 것이 아니고 수입의 형태만이 바뀔 뿐이었다.

검술 말고는 특별한 재능이 없었던 레이가 속죄의 삶을 위해 선행을 행할 방법은 돈이 전부였다.

그 돈을 위해서 모험가로서 생활해온 것이고.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강현의 검과 방패가 됨으로써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선행까지 베풀 수 있게 된다면.

말 그대로 일석이조임이 분명했다.

거기에 아카데미에 재적하고 있는 3년간은, 강현과 항상 함께 있을 수 있다.

일석 삼조.

옛날부터 아카데미에 가고 싶었다.

아카데미는 제국에 존재하는 명문가의 자제들이 모이는 곳.

긴 역사를 자랑하여 수많은 지식이 보관되어 있는 곳.

수많은 검술을 교류하고 접함으로써, 검은 더욱 날카롭고 무직해질 것이 분명했다.

일석 사조.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레이가 매달 5개의 고아원에다 기부하는 돈만 약 금화 10닢이다.

4명의 평민으로 이루어진 가구가 약 10년 동안 생활할 수 있는 거금.

“돈?”

“네...”

“당연히 괜찮지. 오늘 레이가 나한테 받은 하급 생력 포션, 한 병만 해도 얼마나 벌 수 있는지 알잖아.”

“... 후후, 그렇네요.”

그의 말을 등은 레이는 괜한 걱정임을 깨달았다.

생력을 치유해주는 포션, 무려 20병을 아무런 대가, 망설임 없이 건네준 그였다.

제 아무리 하급이라도 해도, 이 생력 포션이 경매에 나가는 순간 백금화 10닢은 가볍게 상회할 텐데.

“그런데, 저한테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당연한 거 아니야? 검성도 패배했던 검귀, 핏빛 칼날. 사실 이 정도면 싸게 먹히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강현이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런가요.”

레이는 드디어 미소 짓기 시작했다.

자신을 치켜세워주는 상냥한 그의 말과, 기대되는 미래 덕에.

“네, 강현 씨가 시켜만 주신다면, 강현 씨의 검과 방패가 돼서 아카데미든 지옥이든. 어디까지 따라갈게요.”

결연한 의지를 품은 채, 레이가 말했다.

“... 좋아. 그럼 약속한 거다? 나중에 말 바꾸면 안 돼?”

“네, 당연하죠.”

“그래, 그때까지는 조금 보고 싶어도 참아줘, 알겠지?”

어차피 20살이 될 때까지 다시는 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원할 때마다 통신 스크롤로 그에게 연락을 보낼 수도 있다.

“당연하죠. 그래도... 가끔씩 시간 되실 때는...”

“내가 찾아올게, 네가 와도 좋고.”

“알겠어요.”

“그래, 그럼 나 이만 가볼 테니까. 잘 지내고 있어.”

강현은 인벤토리에서 미리 챙겨두었던 워프 스크롤을 꺼냈다.

설정된 좌표는 수도 페론의 중앙광장.

이제 진짜 이별의 시간이었다.

“강현 씨.”

“응?”

“부탁... 하나만 드려도 괜찮을까요?”

“말해봐.”

“...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에.”

레이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한 발자국은 두 발자국이 되어 점점 둘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레이는 어느새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왔고,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강현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헤어지기 전에...?”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제게 입맞춤을 해주실 순 없을까요...?”

반짝이는 눈동자, 간절한 눈빛으로 강현의 눈을 바라보며 레이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에, 그가 자신을 잊지 않도록 강렬한 기억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에 레이가 강현에게 물었다.

연극에서 봤던 주인공들처럼.

“... 눈 감아.”

강현은 별 다른 말 없이 레이에게 말했다.

레이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쪽.

자신의 이마에서부터 그의 부드럽고 따듯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져 왔다.

“... 나 간다.”

눈을 떴을 때, 강현은 등을 돌린 채, 워프 스크롤을 들고 있었다.

그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안녕히 가세요. 강현 씨.”

워프 스크롤의 강현의 마나가 흘러들어 간 후, 새하얀 순백의 빛에 휩싸인 그가 사라졌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레이는 그가 있던 장소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가씨.”

“무슨 일이신가요.”

넓고 정갈하게 관리된 푸른 잔디와 꽃밭이 인상적인 정원.

파라솔 밑에서 뜨거운 햇빛을 피하며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한 여인에게 여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정말 이대로 있으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무엇을 말이죠?”

성격이 그리 곱지 못한 아가씨라 불린 여인은, 여기사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음에도 굳이 한번 더 되물었다.

“루이스플 공작님께서 약제학 명장을 찾아오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향후, 공작위 계승권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한데 이렇게 여유를 가져도 괜찮은 건가 걱정이 되어서 여쭤보는 겁니다.”

“후후... 그렇죠. 아마 오라버니께서 약제학 명장을 찾으시게 된다면, 아마... 공작위 계승은 오라버니가 하게 되시겠죠.”

여기사는 답답했다.

그걸 잘 알고 있으시면서 이렇게 여유로운 티타임 시간을 가져도 괜찮다는 말인가.

“히엘, 혹시 낭중지추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뭡니까?”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으려 해도 결국 눈에 띄게 되다는 뜻의 사자성어죠.”

아가씨라고 불렸던 여인, 아멜리아 루이스플이 오늘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펼치며 말했다.

“굳이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칠 필요는 없어요. 그저 뛰어난 사람이 눈에 띄기 시작할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죠.”

여기사, 히엘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기에, 그저 침묵하기로 했다.

“모험가 길드, 세이브리스 지부의 영웅 핏빛 칼날. 생력에 큰 손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던 중 이 시대의 성인군자, 푸스탄트의 치료를 받아 죽음에서 귀환했다. 하지만 푸스탄트를 목격한 이는 아무도... 어머나.”

신문을 읽던 중 흥미로운 문단을 발견한 아멜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히엘.”

“예, 아가씨.”

“곧장 세이브리스 백장령으로 향해야겠어요, 준비해주세요.”

“... 목적지는 그 모험가 길드입니까?”

“네에, 아무래도 약제학 명장은 저의 것이 되겠군요. 후후...”

아멜리아는 자신의 감이 남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그녀의 감이 이 신문의 한 문단이 약제학 명장과 분명 연관이 있을 거라고 소리쳐주고 있었다.

능숙한 손목 스냅으로 단번에 부채를 활짝 펼친 아멜리아는 자신의 하관을 부채로 가린 채, 붉은 입술을 혀로 한차례 핥으며 작게 웃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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