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홍차 한잔의 여유
* * *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가파른 호흡, 살짝 부어오르고 축축해진 눈.
“이제 좀, 괜찮아?”
펑펑, 눈물을 쏟아내던 레이가 드디어 눈물을 그치고 진정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안 좋은 모습 보여드려서...”
부끄럽다.
감히 강현 씨를 사랑해도 되는 걸까요라니, 연극 속 비운의 여주인공도 아니고.
하지만...
너 같은 미녀가...
너도 상냥한 사람...
그가 해준 말이 계속 뒤에서 맴돌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자신의 귀에 따듯하게 속삭이며 축복을 걸어주는 것만 같았다.
“뭐가 계속 죄송하데, 계속 사과만 하지 말고, 감사인사를 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
“... 강현 씨... 강현 씨를 만나게 된 건 제 인생에 가장 큰 축복이에요, 감사해요.”
“그, 그렇게 까지 말하라는 건 아니었는데...”
마음을 숨길 필요 없다.
그에게 완전한 용서를 받고 사랑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이상,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메르시가 말했던 밀당?
불가능하다.
레이는 비 오는 날의 계곡처럼 끊임없이, 불어나 넘쳐흐르는 사랑의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으니.
당장 그에게 안겨, 뜨거운 밤을 보내고 싶다.
처녀를 바치고 씨앗을 받음으로써 생명을 잉태하고 그의 소유가 되고 싶다.
음습한 욕망을 레이는 인지했고 욕망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이미 식었겠지만, 차도 한번 마셔봐, 내가 만든 찻잎으로 끓인 홍차야.”
자신을 향한 레이의 감정은 절대 가벼이 볼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제 아무리 강현이라도, 결국 평범한 사람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제어하기란 불가능했다.
마음속 한 구석에는 여전히 푸스탄트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가 남아있었고, 레이와 이렇다 할 감정적이 교류도 전무했다.
그저 레이를 향한 감정은.
‘나를 좋아해 주는 고마운 사람.’
딱 이 정도였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평생 동안 이성과의 연이 전혀 없었다.
레이의 감정은 연애적인 부분에 대한 자존감을 크게 올려주었기에 감사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레이를 향한 이성적인 호감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
순간 설렘을 느끼고 두근거림을 느꼈지만 레이의 감정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진지했으며 간절했다.
순간의 감정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려 그녀의 감정에 응답하는 것은 자신을 좋아해 주는 레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레이가 무려 7년이라는 세월 동안 소중히 품어온 감정이다.
그렇기에 말을 돌려 홍차를 권했다.
“네.”
레이도 강현의 생각을 완전히 읽은 것은 아니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아직 그의 연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그가 말했다.
사랑해도 된다고.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해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자신의 감정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자세로 임해준다는 것이었으니.
사려 깊고 상냥한 사람이다.
어떻게 여인으로 태어나서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괜찮다.
시간은 충분하다.
평생 동안 검에만 매진하여, 사랑에 대해선 잘 모르는 레이라 할 지라도, 요한과 메르시라는 든든하고 믿음직한 우군이 존재하지 않던가.
후릅.
미지근해진 밝은 적갈색의 홍차를 마신 레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맛있어요...!”
“그치?”
강현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
레이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왔음에도 마음속 한켠에 자리 잡은 꿈으로 인해 언젠가 그와 이어질 날을 대비했다.
그중 하나가, 검사가 아닌 여자로서의 자신을 수양하고 훈련하는 것.
메르시에게 청소와 빨래, 요리 등등, 전반적인 집안 살림과 밤일과 같은 일종의 신부수업을 받아왔다.
물론 귀족들처럼 전문적인 신부수업은 아니었더라도, 오로지 강현을 위해서 검을 수련하는 것만큼이나 신부수업에도 매진했다.
그중 하나가 홍차를 끓이는 법.
신부수업을 받으며 배운 여러 가지들 중, 홍차 끓이기 만큼은 자신 있던 레이였다.
메르시는 자신보다 홍차를 더 잘 끓인다고 인정했으며 요한도 레이가 끓여준 홍차를 좋아해서 매일 같이 그녀를 찾았다.
물론 매일 해주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강현이 끓인 홍차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홍차 특유의 떫은맛은 일절 느껴지지 않았으며 깊고 풍부한 풍미가 느껴졌다.
거기에 더해, 혀에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은근한 달콤함까지.
심지어 차를 한 모금 들이킨 순간, 산만했던 정신과 마음에 따듯함이 전달되어 마음이 평화를 찾기 시작했다.
자신이 끓였던 홍차는 비교할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최고급 찻집의 제다사와 황실 직속 제다사도 그의 홍차를 따라올 수는 없으리라.
“분명... 직접 만든 찻잎으로 끓이셨다 하셨죠? 혹시 끓이면서 꿀을 넣으신 건가요?”
“레시피가 궁금해?”
“... 네. 그런데 꼭 알려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검술, 마법, 마법, 의료, 제약, 제다, 단조, 원예, 재봉, 사냥, 연구, 요리, 건설, 채광, 조련, 예술 등등.
그 어떠한 분야든, 자신만의 정보와 요령을 지녔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가치를 올려주는 중요한 요소니까.
전문직들에게 있어선 남에게 정보를 알려주는 일은 상당히 꺼리는 일들 중 하나이며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함을 느끼는 이들이 더러 존재한다.
그렇기에 레이는 강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당연히 알려줄 수 있지. 비밀만 지켜준다면, 지켜줄 거야?”
하지만 강현은 흔쾌히 수락했다.
“네, 당연하죠.”
그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의욕을 불태운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어, 아니면 필기해둘 종이라도 가지고 오던가.”
“네, 잠시만요...”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가 침대 머리맡 옆에 배치되어있던 선반의 서랍을 열어 종이 한 장과 깃털 펜과 잉크를 꺼내와 다시 앉았다.
“일단 꿀이 직접적으로 들어간 건 아니야. 흑벌이 직접 채취한 꿀에다가 말린 찻잎, 오렌지 껍질을 1달 정도 절인 다음에 다시 말려서... 다시 말리는 과정은 2주일 정도면 완전히 마를 거야.”
그의 말을 들은 레이는 순간 놀랐지만 나중에 묻기로 하고 일단 그가 알려준 레시피를 열심히 받아 적었다.
언젠가 그의 신부가 되길 꿈꾸는 여인으로써, 홍차를 그보다 못 끓인다는 것은 어불설성이었기에.
“거기에다가,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흑목화 씨앗을 넣어서, 끓는 물에다가 적당히 우려내면 돼. 끓는 물의 온도랑 우려내는 시간은... 비밀이야, 스스로 알아내는 즐거움도 좀 있으면 좋지 않겠어?”
강현은 레시피를 완전히 다 알려주진 않았다.
왜인가.
[일반 능력: 약제학(Master)]
[능력 1. 모든 약초와 몬스터, 동물들의 부산물의 효능을 알 수 있습니다.]
[능력 2. 모든 약초와 몬스터, 동물들의 부산물들을 이용한 제약 법을 알 수 있습니다.]
[능력 3. 직접 제작한 모든 약의 효능이 크게 상승하며 긍정적인 보정이 붙습니다.]
약제학 마스터 능력.
한국어로는 약제학 명장.
약제학이라는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그는 굳이 홍차에다가 흑목화 씨앗이라는 약초를 추가했다.
그로 인해 약제학 능력의 보정을 받은 홍차는 다른 홍차들에 비해 더욱 뛰어난 맛을 자랑하게 되었다.
사실상 강현의 입장에서는 홍차라기보다는 홍차 같은 심신 안정제가 더 적합한 표현이지만.
어쨌든 레이가 아무리 레시피를 온전히 제현한다 해도 동등한 수준의 홍차를 만들어 내기란 불가능할 거다.
레이에겐 약제학이라는 능력이 없을 테니.
다른 건 괜찮아도, 스텟창과 스킬창에 관해서는 레이라 할 지라도 알려줄 수 없다.
내가 게임 속 이 세계로 전생하여 얻은 특전이니까.
물의 온도와 찻잎을 우리는 시간의 문제로 알아서 착각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 좋아요, 반드시 해내 볼게요.”
뭐를 해낸다는 것인가.
주어가 빠져있었지만 느낌적인 느낌으로는 왠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열심히 해봐.”
의욕을 불태우는 레이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마음속으로 사과하는 것 말고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강현 씨는 벌써 흑벌의 꿀을 채취하실 수 있는 실력을 지니신 건가요?”
흑벌은 장수말벌의 독에 비해 약 수백 배나 강력한 독을 소유하고 있고 성인 남성이 흑벌의 독침에 쏘일 경우 5분 내로 사망하게 된다.
벌레가 아닌 몬스터로 분류되며, 약 500마리가 무리 지어 행동한다.
그들은 특수한 페로몬을 분비하여 자신의 상황을 무리에게 알리고 주변에 있던 흑벌들이 군집하여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한 마리 한 마리는 고작 독이 강할 뿐인 벌레에 불과하지만 500마리의 무리는 오거를 훨씬 상회하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오거의 몬스터 등급은 3급 중상위.
흑벌 무리의 몬스터 등급은 2급 최하위였다.
“아니, 나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시중에 나와있는 매물을 구매한 거지. 오거 한 마리 상대하기도 벅찰 거야.”
강현은 허세 부리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의 대답에 미안하지만 레이는 기쁨을 느꼈다.
그의 검과 방패가 되고자 하는 자신이다.
그보다 더 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역시 강현 씨는 대단하시네요, 흑목화에 그런 효능이 있었다니.”
“뭐, 약초에 관해서는 자신 있지.”
강현은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사실, 겸손하게 대답한 것이었다.
자신 있는 수준이 아니다.
강현은 약제학에 관해선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고 있다.
자신감과 허세가 아닌, 그가 이 세계에서 살아온 27년이라는 세월에 근거한 확신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 선물이야, 받아둬.”
강현은 자신의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하급 생력 포션 20병과 직접 제작한 홍차 티백 100개를 꺼내 레이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어제 너를 치료해줄 때 사용한 포션이고 생력 포션이라고 불러.”
“생력 포션... 드디어 성공하신 건가요...?”
기억하고 있다.
전생에서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생력을 연구했던 그를.
아무런 진전이 없음에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안심시켜주려 했던 그의 미소까지.
생력 포션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당연하지, 성공했으니까, 네가 지금 멀쩡히 살아있는 거 아니겠어.”
“그렇... 네요, 강현 씨 정말 고마워요.”
전생의 그가 했던 노력이 기억나서일까.
자신의 성취가 아니었음에도 레이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웃으니까 보기 좋네.”
레이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일단, 어제 네가 마신 생력 포션은 최상급 생력 포션이야, 이건 하급이고. 이미 최상급을 마신 이상 이걸로 생력이 강화될 수는 없겠지만 회복 효과만큼은 확실해, 필요할 때마다 아껴서 마셔, 이건 네가 방금 마신 찻잎이고.”
“그런데... 이게 전부 선물이라고요...?”
무려 생력을 치료해주는 포션이다.
하급이라고는 하나, 그 가치는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그런 생력 포션이 무려 20병이다.
자신에게 최상급을 사용해 준 것만으로도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이렇게 따로 선물이라고 챙겨준다는 건가.
“저, 저는 아무것도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큰 선물을 그냥 받을 수는...”
그에게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았다.
이미 갚아야 할 은혜가 산더미인데, 이런 귀한 선물까지 받을 만큼 레이는 철면피가 아니었다.
“뭐가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내가 말했잖아 약속 지켜줘서 고맙다고. 나는 그걸로 충분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돕겠다는 목적을 지닌 채, 살아가는 강현이다.
그런 강현에게 있어서 레이에게 고작 이 정도의 선물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러니까 받아줘. 앞으로도 계속, 네가 착하게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나한테 큰 의미이자 하나의 동기고 기쁨이니까.”
“강현 씨...”
진심일까.
나의 부담감을 줄여주기 위한 배려일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순 없지만 둘 중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나중에라도 꼭 갚을 테니까...”
“그래.”
“그런데 혹시 이 생력 포션은 어떻게 만드신 건가요?”
“...”
역시나 물어볼 줄 알았다.
“미안한데 그건 말해줄 수...”
레이의 질문을 거절하려던 순간 한 사실이 깨달았다.
이 세계에는 한 가지 법이 존재한다.
약제사가 환자에게 약을 사용하여 치료를 해줄 경우, 환자에게 반드시 약의 성분을 밝혀야 할 의무가 생긴다.
환자에게는 비밀엄수의 의무가 생기고.
왜냐하면 약에 들어간 재료에 따라 환자에게 부작용과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치료를 시작하기 앞서, 치료에 사용할 예정인 약의 성분을 밝히게 되지만 위급상황엔 치료가 끝난 뒤라도 반드시 밝혀야 한다.
“... 없는데, 이해해줄 수 있을까?”
하지만 레이와는 평범한 약제사와 환자의 관계가 아니다.
강현은 레이에게 이해를 구했다.
“당연하죠.”
레이는 흔쾌히 승낙했고.
“휴우...”
강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력 포션에는 자신의 타액이 들어간다.
양심의 가책도 있고, 미안함도 있어서 절대 말해줄 수 없다.
“... 혹시, 말해주실 수는 없으실까요...?”
하지만 강현의 반응을 살핀 레이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말을 바꿔버렸다.
강현이 놀란 눈빛으로 응시해왔다.
왜 갑자기 말을 바꾸냐는 원망이 섞인 듯한 눈빛이었다.
“죄, 죄송해요... 너무 궁금해서... 곤란하시면 안 알려주셔도 돼요...!”
“...”
레이가 계속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고작 한번 쳐다봤다고 저렇게 기운을 잃고 시무룩해하는 걸 보니, 미안했다.
“듣고 놀라지도 말고, 아무 말도 안 한다면 내가 알려줄게. 그래 줄 수 있겠어?”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다.
레이가 걱정돼서 그런 것일 뿐이지.
“네...! 약속할게요...!”
호기심의 대가는 스스로 치르면 그만이다.
“잘 들어, 재료는... 흑적초라는 약초랑 최상급 성수, 그리고... 내 침.”
“치, 침이요...?”
“다른 말로는 타액.”
강현의 말을 들은 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부터 귀와 목까지 붉게 물들인 그녀는.
“꿀꺽...”
테이블 위에 놓인 20병의 생력 포션을 보며 침을 삼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