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같은 시작, 다른 과정. 극과 극의 결말.
* * *
고민했었다.
강현은 레이가 정말로 회귀자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핏빛 칼날, 레이의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레이를 용서하고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를 줬던 것이 옳은 행동인지.
항상 호구 같다고 생각해왔지만, 한편으로는 동경하고 있던 푸스탄트의 용서와 새로운 기회가 과연 옳았던 것인지.
레이는 결과로써 증명해줬다.
푸스탄트처럼 자신에게도 남을 용서함으로써 새사람으로 고쳐 쓸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녀가 핏빛 칼날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날, 그녀를 용서하겠다는 나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고마웠다.
속죄의 삶이라는 약속을 지켜주었으니.
그녀가 오직 치료를 받아 연명하고 싶었을 뿐이었다면, 건강한 상태로 회귀한 그녀가 과연 선행을 베풀며 살아가겠는가.
감동과 고마움. 그 이상의 것이 느껴졌다.
“오랜만이야. 레이. 나랑 했던 약속 잊지 않고 잘 지켜줘서 고맙다.”
강현은 기쁜 마음에 미소를 지으며 레이에게 말했다.
조금 낯간지럽고 쑥스러웠지만, 그녀가 증명해준 나의 선(?)에 관해서는 확실히 감사인사를 해야만 했다.
“...”
하지만 강현의 감사인사는 레이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전부 기억하고 있다.
푸스탄트를 죽인 것도.
수없이 많은 죄를 저지르고 손과 검에 피를 묻혀온 것도.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려, 살고 싶다는 주제에 맞지 않는 욕심을 가진 탓에 그를 죽음에 내몰리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강현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도, 자신과 같은 회귀자였던 것이다.
고작 조금 꾸민 것이 전부인 외모와 선정적인 드레스로 그의 환심을 살려고 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거라는 안일하고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사과조차 하지 않고, 얄팍한 말로 그의 마음을 뒤흔들려했다.
치사하고 이기적이더라도, 뻔뻔해지기로 했다.
어차피 강현은 모를 테니까.
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으니까.
그에게 자신의 평생을 바치고, 그의 옆에 서 있고 싶었으니까.
강현을 너무 사랑하니까.
그가 없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니까.
그저 자기 합리화였을 뿐이다.
그리고 레이는 알고 있다.
자기 합리화는 결국 합리적이지 않은 현실에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한 일종의 회피일 뿐이라는 사실을.
같은 회귀자인 강현을 속이기란 불가능했고 자신의 역겨운 밑천이 전부 드러났다.
항상 그래 왔듯이, 상냥하게 자신을 또 한 번 죽음에서부터 구원해준 그에게.
그가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혐오일까.
모멸감일까.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바라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달팽이관이 고장 나기라도 한 것인지, 심각한 잡음만이 들려올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레이가 서서히 패닉에 빠지기 시작할 때쯤.
“괜찮아?”
익숙한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크고 따듯하지만 거친 굳은살이 박혀있는 손이었다.
그 손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다듬어주기 시작했고, 그제야 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도 좀 해줘야... 야, 너 왜 울어. 응...?”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반응도 없던 레이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강현의 배려에, 메르시가 정성들여 그려준 화장을 지우고 왔다.
눈물에 번져진 화장 때문에 꽤나 섬뜩한 꼴이었다.
“왔어? 지금은 좀 어때?”
의료실 문을 열고 다시 돌아온 레이를 보며 강현이 물었다.
무슨 죄인이라도 된 것 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눈조차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화장을 지웠음에도 레이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왜 저런다냐.’
여인의 눈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강현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해, 계속 서 있으려고?”
아까 전만 해도 자신을 위해서 무리했다는 둥, 말만 잘하던 레이는 어디 가고 웬 벙어리가 와버렸다.
저 상태를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핏빛 칼날이란 사실을 들켰을 때, 레이가 보였던 반응과 비슷했다.
“죄송해요.”
“... 됐으니까, 일단 앉아서 해, 내가 차도 타놨으니까 한잔 마시고.”
기세로 보아서는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아직 레이가 왜 저러고 있는 지조차도 모르는 강현으로써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꽤 오랫동안 망설인 레이가 드디어 강현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의자에 앉는 것조차 힘겨운 걸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듯했다.
“딱히 좋은 결말은 아니었지만 7년 만에 재회잖아. 네가 우울해하는 이유는 모르겠는데, 계속 그렇게 고개 숙이고 있을 거야?”
절레절레,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 빨랐지만 행동은 없었다.
레이의 상태가 괜찮아지길 기다려줄 수는 있었지만 마냥 기다려서는 피곤에 짓눌려,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드는 게 먼저일 거 같았다.
‘...’
고민해봤다.
레이를 대화가 가능한 상태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강현은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상체를 살짝 일으켜 세운 뒤 레이의 턱을 붙잡고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레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위로 향했고 강현과 두 눈이 마주쳤다.
“나 보고 싶어 했다며, 내가 앞에 있을 때 많이 봐 둬야 하지 않겠어? 언제까지 땅바닥만 보고 있을래?”
레이의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냉수로 씻고 왔던 얼굴에 다시금 열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 그게...”
“네가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이러고 계속 앉아있기만 할 건 아니잖아. 말을 해줘야지 문제를 해결하든가 하지.”
반응은 확실했다.
창백했던 레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볼부터 귀와 목까지 불게 물들었다.
잠시 동안 격하게 흔들리던 시선 또한 강현에게 고정되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네, 네에... 알겠으니까 손 좀 치워주세요...”
“목소리도 자신감 있게, 최소한 전생에서는 말은 잘했잖아.”
“네...!”
“좋아.”
그제야 흡족할 수 있었던 강현은 레이의 턱을 잡아 올린 손을 뗐다.
“다시 고개 숙이고 아무 말도 안 하면 그냥 가버릴 거다? 다시는 얼굴도 못 볼 줄 알아.”
턱을 고정하고 있던 강현의 손이 사라지기 무섭게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 레이의 시선에 강현이 선언했다.
“... 네.”
그건 또 싫었던 걸까.
레이가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치진 않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꽤 귀여워 절로 지어지려던 미소를 간신히 참아냈다.
일단 이 정도로 충분했다.
“왜 그러는 건지 말해줘. 그냥 솔직하게, 응?”
강현의 노력은 레이가 입을 열고 말을 하게 만들었다.
그제야 그녀의 말을 들은 강현이 느낀 감정은 단 하나였다.
어이없음.
오직 단 하나.
사과조차 하지 않고 나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다고.
고작 그런걸로, 죽을 죄를 지은 것처럼 이러고 있었단 말인가.
“죄송해요.”
하지만 어떠한 사상이든 사물이든,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인다.
겨우 그런 걸로 라고 생각할지라도, 레이에게는 다르다, 강현은 생각했다.
이제 그녀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줘야 할 의무가 강현에게 생겼다.
“일단, 나한테 사과해야 할 이유가 뭔데?”
“저 때문에 강현 씨가...”
“백작가 기사들한테 죽은 거? 그게 왜 네 책임이야, 그냥 버리라고 하던 걸 무시하고 끝까지 널 숨겨준 건 오로지 내가 선택한 결정이었는데. 그렇지 않아?”
레이는 자신이 백작가 기사들에게 쫓기고 있으니 그들에게 보내 포상금을 받아도 된다고 말했었다.
시작은 그녀일지라도, 기사들에게 살해당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순전히 강현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너도 나처럼 내가 회귀자일 거라는 생각도 못했을 거 아니야, 그런데 전생의 기억이라고는 전혀 없는 나한테 그 일로 사과해서 뭐할 건데.”
“그, 그건...”
단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던 강현이 떠올라 죄책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 전혀 없어. 그리고, 네가 왜 나를 좋아하면 안 돼?”
“그, 그건... 제가 푸스탄트님을 살해했으니까요.”
“... 그건 맞아, 많이 잘못한 거지. 근데 그건 이미 내가 용서해주기로 했던 거잖아, 그리고 우리 할배는 멀쩡히 잘 살아있어, 또 어딘가로 가서 호구같이 착한 일이나 하고 있겠지.”
“그렇다고 저의 죄가...”
“누구한테 지은 죄인데? 나랑 할배는 이미 용서하기로 했어, 너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굳이 여기까지 와서 너를 치료해줄 이유가 뭔데. 그리고 너를 치료하라고 날 보낸 사람은 할배였어.”
어째서.
어째서일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멋지고 상냥할 수 있는 걸까.
이렇게나 추악한 자신을 따듯하게 품어줄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을 위해, 어째서 이렇게까지.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그들에게 죄를 지은 것 말고는 없을 텐데, 레이가 생각했다.
“강현 씨, 들어주실래요?”
“물론이지.”
“처음엔 기뻤어요.”
레이는 자신의 생각과 진솔한 감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더 강현 씨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강현을 잃고, 모든 생력을 소모하여 죽었던 레이는 과거로 회귀했을 때, 이 세계 어딘가에 강현이 존재할 거라는 사실에 환희했다.
“죽고 싶었던 제게 살아갈 희망을 주시고 이유, 그 자체가 되어주신 상냥한 분이시니까요.”
“행복했어요, 이기적이고 양심 없게도, 과거로 돌아온 저는 아직,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으니까 강현 씨와 좀 더 좋은 관계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응, 듣고 있어.”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던 레이가 드디어 제대로 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부끄럽고 낯 뜨거운 레이의 말이 사실상 고백으로 느껴졌지만, 일단 경청하는 것이 용기 내어 말해주고 있는 레이에 대한 예의리라.
“그런데,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 기뻐하는 제가... 너무 역겨웠어요...”
감정이 격해진 레이의 눈동자가 반짝인 후, 눈꼬리에 맺힌 한 방울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 강현 씨를 외롭고 고통스럽게 만든 제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정말...! 징그럽지 않으신 거예요...?”
레이의 모든 감정을 후회로 점철되어있다.
그녀가 기쁨을 느끼든, 슬픔을 느끼든.
행복을 느끼든, 불행을 느끼든.
그 모든 감정은 지난날의 후회로 인해 비롯되거나 변질당하고 있다.
그 사실을 눈치챈 강현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너 같은 미녀가 좋아해 주는 데, 싫어할 남자가 어디 있겠어.”
강현의 진심 어린 단순한 대답에, 레이의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너는, 나한테서 스승님을 앗아간 원수가 아니야, 작은 마을을 오거로부터 구해준 영웅이자,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희망이라고.”
지금의 레이를 어떻게 비난하겠는가.
자신이 목숨을 받혀서, 아무런 인연도 없는 마을을 구해주었는데.
“아마 못 들었을 거 같아서 한번 더 말해줄게.”
“전생의 기억도 없을 나와 나눴던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 너 덕분에, 나도 오랫동안 해왔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그녀 덕에, 잘못된 선택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울지 마.”
“강현 씨... 감히, 제가... 강현 씨를 사랑해도 되는 걸까요...!”
“당연하지. 뭐가 감히야, 안된다고 하면 나를 미워하려고?”
레이가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울지 말라고 해서 눈물이 바로 멈출 리가 없다.
지금은 그저, 레이가 후련해질 때까지 펑펑 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네가 말했었지, 뒷골목의 거지 출신이었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할배의 돈을 훔치려다가 어쩌다 보니 할배의 제자가 돼서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고.”
“우리 둘 다 같은 시작이었어, 과정이 달라서 결과도 달라졌을 뿐, 너도 상냥한 사람이야. 잘못된 과정이 문제였을 뿐이고.”
만약 푸스탄트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누군가가 레이를 거두어 주고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었다면.
레이가 그렇게 되었을까.
절대 아니다.
강현은 단언할 수 있었다.
푸스탄트가 믿는 것처럼 모든 인간들의 본성이 선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의 본성은 상냥하고 여린 마음을 지닌 소녀임이 분명하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