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또 다른 회귀자 (3)
* * *
의료실로 들어온 강현은 방안을 살폈다.
창가 옆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잔뜩 긴장한 모습의 레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일어났다며.’
레이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방금 막 일어난 여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던 산발의 머리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고운 비단결을 보는 것처럼 찰랑이고 있었다.
얼굴에는 얇은 화장을 한 흔적이 보였으며 진흙과 피로 얼룩져있던 옷은 드레스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다, 그렇다고 단조롭지도 않은 절묘한 안정감이 돋보이는 디자인 드레스.
어두운 계열의 색이라 그런지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함이 물씬 느껴져 왔다.
‘예쁘네.’
레이는 누구나 인정할 미인이나, 강현은 별 감흥이 없었다.
아무리 예뻐도 아직 어린 소녀.
자신의 정확한 나이를 정의 내릴 수는 없으나, 도합 52년간 살아온 강현에게는 어린 소녀에 불과했으니.
‘나한테 잘 보이려고 꾸민 건가.’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만 얘기가 달라진다.
만약 자신의 예상대로 레이가 회귀자라면.
그리고 어제, 요한이 말한 대로 매일같이 그녀가 다시 나를 만나고 싶어 했던 게 사실이고 자신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것이라면.
강현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크게 바뀐다.
“아, 안녕하세요...”
얼굴을 붉힌 채, 목소리를 떨며 레이가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을 봐서는 뭐라고 한마디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은 아침이네요. 옷을 갈아입으셨네요?”
“네, 호, 혹시 안 어울리려나...?”
레이는 조심스럽게 강현에게 물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는 크게 흡족했다.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있을 만큼, 꽤나 아름답다고 생각했기에.
요한의 감각 있는 선택에 고마워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고자 살면서 처음으로 아름답게 치장한 자신을 선보이는 순간이었다.
남자와 깊은 연을 쌓아본 적이라고는 요한이 전부였던 레이였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뇨, 아름다우셔요, 하늘에서 선녀님이 내려오신 거 같네요.”
의료실에 찾아오는 시간에 맞춰 예쁜 드레스를 입고 기다리고 있는 레이다.
그녀와 제대로 된 대화, 한마디조차 나눠보지 못했기에 뭐라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가 이렇게 정성 들여 자신을 꾸며두었다.
강현은 생각했다.
뭐가 됐든 자신을 향한 긍정적인 감정으로 인해 잘 보이고 싶어, 이렇게 꾸민 거라고.
상대의 마음에 고마움을 느껴서라도 칭찬에 인색해지지 않기로 한 강현은 아름다운 레이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을 조금 포장하여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레이는 약 1시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연애의 기본은 밀고 당기기야. 네가 푸스탄트님의 제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어서 해주는 조언인데,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절대 모든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지 마. 쉬운 여자가 되면 안 되는 거라고. 무슨 얘긴지 알겠지?
자신의 머리를 빗겨주던 메르시가 말했다.
메르시는 그렇게 잘 알고 있는데, 왜 아직 요한과 진전이 없는 거예요?
... 그 멍청이는 내가 밀면 기분이 안 좋은 줄 알고, 당기면 기분 좋은 줄로만 아는 놈이라서 그래.
요한의 이야기만 나오면 일단 한숨부터 내쉬고 보는 메르시가 답했다.
‘메르시,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위기다.
벌써부터 메르시의 조언을 지키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칭찬 한마디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난타를 하듯 두근거리기 시작했으며 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주체하기가 여간 벅찬 게 아니었다.
검기를 유지하는 것보다 고된 순간이었다.
“그... 런가요...? 감사합니다.”
메르시는 이따금씩 레이에게 요한에 관한 푸념을 늘어놓을 때마다 말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더 좋아하는 쪽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결투라고.
‘저는 영원히 이기지 못할 거 같아요.’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의 입장에서는 어제 처음 만났을 뿐 한 모험가 소녀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은 어떠한가.
7년 내내, 단 하루도 그의 생각을 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꿈에서라도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 했다.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결투.
레이는 이미 자신이 완벽한 패배자임을 깨달아 버렸다.
레이가 할 수 있는 건, 메르시가 조언해준 대로,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숨기는 것이 전부였다.
“일단 치료 결과를 확인해야 하는 지라, 협조 부탁할게요.”
“네...”
레이의 마음은 결국 레이의 마음일 뿐, 강현의 마음이 아니다.
레이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기에, 거칠게 날뛰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강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첫 번째, 치료 결과 확인.
두 번째, 그녀가 회귀자인지 떠보기.
“일단 침대... 는 안될 테니, 그대로 편히 앉아주세요.”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선, 맥을 짚어봐야 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는 레이를 침대에 눕힐 수는 없었다.
“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의 등 뒤로 이동한 강현은 또 한 번 그녀의 목 부근에 손가락을 대고 맥을 확인해봤다.
생력은 완벽하게 치유되었고 이전보다 더욱 강인해졌다.
레이의 생력을 치료해준다는 당초의 목적은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몸에 온도가 높고 심장박동이 빨라.’
“혹시 춥거나 열이 나시진 않죠?”
“네, 네에... 멀쩡해요.”
기어들어가는 레이의 목소리에는 수줍음이 대량으로 함유되어 있었다.
‘... 진짜로 나를 좋아하는 건가...?’
평생 이성과는 연이 없었던 강현이었기에 긴가민가했지만 이 증상이 감기가 아니라면 사랑 말고는 설명할 수 없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몸이 뜨거워진다.
전형적인 사랑의 증상이 아니던가.
‘그리고... 왜 피가 안 통하지?’
가슴 바로 밑에서부터 허리에 이르기까지. 레이의 체내에서 혈액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부작용은 아닐 테고...’
생력 포션은 부작용이 없다.
이미 하급 성수와 중상급 성수로 제작한 생력 포션들의 실험도 끝난 상태인데, 무려 최상급 성수로 제작한 최상급 생력 포션이 부작용을 일으켰을 리가 없다.
‘... 코르셋?’
곰곰이 고민해본 강현은 결국 한 가지 결론, 코르셋이 혈액의 순환을 막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보통 드레스를 입기 전,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이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이니까.
혈류가 막힌 부분과 범위도 코르셋의 모양과 딱 맞아떨어졌다.
‘도대체 얼마나 조였으면 이 정도로 막히는 거냐.’
여성용 의복에는 지식이 전무한 강현이라도 알 수 있었다.
혈류가 이 정도로 막히려면 코르셋을 적당히 조여선 어림도 없다.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레이의 노력.
그것 말고는 답이 없음을 깨달은 강현은 어째서인지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흐, 흠흠... 별 다른 이상은 없네요. 생력은 완전히 회복되셨으니 다시 일상생활을 시작해도 괜찮을 테고요. 그리고 코르셋을 그렇게 세게 조이는 건 몸에 좋지 않습니다, 갈비뼈와 내부 장기들에 무리가 갑니다.”
눈치 없는 말임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강현은 말했다.
그는 의사이자, 약제사다.
직업상, 그녀의 몸을 걱정해서라도 할 말은 해야만 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부끄러움에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 레이.
당길 때는 확실하게 당겨야 해. 상대가 당황할 정도로 갑자기 훅 들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단순해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당황해서인지 설레서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결국 당황했을 뿐이라는 걸 깨달으면 의미 없는 게 아닌가요?
아니지. 푸스탄트님의 제자가 너를 기억도 못할 거라고 했잖아?
그렇죠.
그러니까 첫 만남부터 확실하게, 너의 존재를 각인시켜버려. 언제 어디서든, 너를 잊지 못하도록.
그리고 당황했을 뿐이라는 생각조차도 못하게 만들어버리면 그만이잖아.
그 두근거림이 무슨 이유로 시작되었든, 결국 설렘으로 끝나면 네가 이기는 거니까.
메르시와의 대화를 한번 더 떠올린 레이는 말을 다시 이었다.
“가, 강현 씨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조금 무리했어요...!”
용기를 쥐어짜 낸 레이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네...?”
효과는 확실했다.
레이의 간절한 한마디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살면서 처음 받아온 이성의 적극적인 대시.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한마디에, 강현은 자신이 당황한 것인지, 설렘을 느낀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오히려 좋은 기분이라고는 확신할 수 있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그러게요...”
너무 갑작스럽지 않았을까.
곧장 자신이 뱉은 말을 후회한 레이였지만 강현의 얼굴을 본 순간, 후회는 말끔히 사라졌다.
그의 양쪽 볼이, 살짝 붉어져 있었으니.
‘성공한 건가...?’
성공이었다.
“흠흠, 어쨌든 일단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제가 어제, 사용했던 포션에 대해선 비밀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어쨌든, 첫 번째 목표인 치료 결과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제 다음 단계, 레이 또한 자신과 똑같은 회귀자인 지를 떠봐야 한다.
잠시간의 침묵이 진행된 후, 슬슬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강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누군지 말해줄 수는 없지만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녀를 떠보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말을 시작했다.
“네...? 그, 그런 말을 누가...”
레이의 머릿속의 한 남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요한이었다.
“혹시 어디선가 저를 만나신 적이 있으신가요?”
“...”
그는 기억하지 못할 거다.
오로지 자신만 기억하고 있는 그와 함께한 행복한 시간들.
당연하게도 그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쓸쓸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선 좋은 추억이 아닐 거다.
결국 자신 때문에 백작가의 기사들에게 살해당했으니.
“네. 강현 씨는 기억하시지 못하겠지만요.”
치사하다.
레이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그의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이유.
회귀로 인해 전생의 죄를 이 세상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현의 소중한 스승인 푸스탄트를 살해한 것도, 자신 때문에 그가 죽음으로 내몰린 것도.
이기적이었다.
본래대로 하면 그와 이렇게 나란히 마주 보고 있을 자격조차 없는 자신이다.
하지만 뻔뻔해지기로 했다.
자신을 용서해준 그다.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치졸해지고 이기적인 여자가 되더라도, 자신의 평생을 그에게 바치고 싶었기에.
그게 속죄이고 그에게 받은 은혜에 대한 보은이었기에.
그가 아니면 싫다.
그가 없으면 안 된다.
그럴 자격이 없더라도 그가 부여해준 삶의 이유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아뇨, 왠지 저는 기억나는 거 같아요.”
“... 네?”
하지만 강현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회귀한 이후, 그와 마주친 적이라고는 한스 투기장의 고블린 운송을 호위하던 날 밖에 없다.
그 마저도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터라, 얼굴을 볼 수는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날 말고는 더 이상 없었다.
‘알아봐 주신 건가.’
반가움이 느껴졌지만 레이는 강현의 입에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을 들어버렸다.
“잘은 기억나지 않는데... 분명 눈이 수북하게 쌓인 한 겨울이었죠.”
“... 네?”
레이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와 유일하게 마주쳤던 수도, 페온은 여름이었기에.
“마을은... 맞다, 하우로스 백작가, 백작가 성 앞 마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다.
회귀한 이후, 하우로스 백작령 안으로는 한 발자국조차 내딛은 적 없는 레이였다.
하우로스 백작가의 성 앞 마을은 전생에서 강현과 처음 만났던 장소였다.
백작가의 기사들에게 쫓기던 자신을 강현이 구해줬던 장소.
레이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성 앞 마을 옆에 있는 산 중턱에 있는 오두막이었나...? 거기서 한번 본 적 있지 않아요?”
전생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전이었다.
강현은 하우로스 백작가의 성 앞 마을 근처에 위치한 산 중턱에 오두막을 짓고 자신의 집이자 공방으로 삼아 생활하고 있었다.
순백의 눈이 세상을 하얗게 물든인 겨울에 골목길 사이에서 서서히 죽어가던 레이를 자신의 오두막으로 데려와 보살펴주었고.
만약 그녀가 회귀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실.
그리고 레이는.
“...”
마땅한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더라도 알 수 있었다.
격렬하게 떨리는 눈동자.
딱딱하게 굳은 표정.
이마에 맺히기 시작한 식은땀.
놀란 표정.
강현은 확신했다.
레이 또한 자신과 똑같은, 또 다른 회귀자였음을.
“오랜만이야. 레이. 나랑 했던 약속 잊지 않고 잘 지켜줘서 고맙다.”
강현은 기쁜 마음에 미소를 지으며 레이에게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