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또 다른 회귀자 (2)
* * *
“이, 이게 뭔가요...?”
“드레스, 올해 생일에 주려고 양복점에다가 미리 주문해뒀던 건데, 아무래도 오늘 써야 할 거 같아서.”
“... 제가 그걸 왜 쓰나요.”
“왜긴 왜야, 네 왕자님이 오셔서 멋지게 구해주셨는데, 그런 모습으로 만나려고?”
잠에서 깨어나 생력이 완전히 회복된 레이가 자신의 의상을 살폈다.
칸 루스 자작령, 변방에 위치한 마을을 습격한 오거들과 전투했을 당시에 입었던 전투복이었다.
굳은 진흙과 말라붙은 붉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가죽 갑옷.
그 안에 있음 옷에서는 땀이 말라 불쾌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읏...”
요한의 말마따나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님을 확인한 레이의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추악하고 사악한, 고달픈 삶을 살아왔던 레이지만 그녀도 결국 순수한 처녀고 한 여자다.
사랑하는 이에게 예쁘고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는 기본적인 욕구를 지닌 여성이다.
자신의 입장에선 7년이나 기다려왔던 재회.
그의 입장에선 첫 만남.
이런 누추한 꼴로 만났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요한이 말했다.
잠에서 깨어난 자신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서 강현이 올 거라고.
청결하게 씻은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할 필요성을 통감했다.
“이제 알겠어? 사랑은 전투야, 전투를 하려면 제대로 된 장비가 필요하고.”
요한이 자신이 들고 있던 드레스를 레이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 그런데 이건 좀... 야하지 않나요...?”
요한의 말에 동의했으나 그가 건넨 드레스는 여태껏 자신을 꾸며본 적이 없는 레이가 받아들이긴 힘든 디자인이었다.
가슴 사이 부분이 살짝 파여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응...? 이게?”
레이가 봤을 때는 선정적인 디자인이었지만 요한은 이해하지 못했다.
평범한 드레스들과 비교했을 때, 노출도가 적으면 적었지, 과하진 않았다.
오히려 선정성으로 봤을 때, 건전한 편에 속하는 드레스로 고른 건데.
‘그렇구나.’
평생 드레스와 연이 없었던 레이다.
레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선정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일단, 이 정도는 야한 축에도 못 껴.”
이해할 수 없었다.
레이도 강현을 만나기 전, 백작가에서 생활했을 때 드레스를 입어본 적이 있다.
백작가의 둘째 딸, 셰릴이 자신을 위해 준비해준 드레스는 목부터 발 끝나지, 피부가 드러나는 부분이 전혀 없었었다.
“그리고 레이야, 충격받지 말고 잘 들어.”
“... 네.”
진지하게 말하는 요한.
레이는 살짝 긴장했다.
“내가 같은 남자라서 하는 말인데, 남자는 다 짐승이고 변태야.”
“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요한의 말에 레이가 당황하고 있을 때, 그는 꿋꿋이 자신이 할 말은 계속했다.
“물론 나는 아니지만, 남자라는 종족은 원래 그래. 예쁘고 섹시한 거면 사족을 못쓰는 변태들이라고.”
진지한 헛소리.
적절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나도 네 나이 때를 살아봤을 거 아니냐, 네 또래 남자애들은, 착한 마음씨? 순수한 사랑? 그런 것보다 예쁘면 장땡이라고, 이해했지?”
“아뇨, 전혀 이해 못 하겠어요.”
“... 잘 들어. 우리 레이가 어디 가서 외모로 꿀릴 애는 아니잖아? 다른 애들보다 성장도 빠르고.”
레이는 또래의 여자아이들에 비해 발육이 빨랐다.
재작년, 9살을 맞이한 해부터 가슴이 서서히 부풀고 골반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10살이 되었을 때는 초경이 찾아왔다.
“그러니까 이 드레스가 우리 레이의 아름다움과 성숙함을 어필해줄 비장의 무기라고. 내가 보장할게. 이거 입고, 딱 만나면 그으냥, 바로 한눈에 반하고 헤롱헤롱 해서...”
“으음... 헤롱헤롱 해서요?”
요한이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열정적으로 주장하고 있을 때, 뒤에서 한 여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여인, 메르시의 목소리에 반응한 요한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기 시작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쇠끼리 긁히는 소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메, 메르시 왔구나...? 언제부터 거기 있었데...? 하하.”
능청스럽게 말한 요한이 다시 고개를 돌려 레이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원망이 담겨있었다.
메르시가 온 것을 왜 알려주지 않았냐는 의미의 눈빛.
레이는 그의 원망 섞인 눈빛을 가볍게 피했다.
“남자들은 다 변태라고 했을 때부터였나? 그때쯤 일 거예요.”
“아... 그, 그렇구나.”
“그래서, 헤롱헤롱 해서 어떻게 되는데요.”
“어떻게 되기는... 어... 레이의 아름다운 첫사랑이 해피엔딩을 맞이하... 는 거지. 응. 맞지.”
급하게 지어낸 단어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흡족한 표정을 지은 채, 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런 요한을 보며 메르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애한테 못하시는 말이 없으시네요?”
“내, 내가 뭘...”
메르시의 기에 짓눌려 버린 요한의 목소리는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두더지가 떠올랐다.
“나중에 얘기해요.”
“... 응.”
스승으로써 제자인 레이의 사랑을 도와주려 했던 것뿐인데, 혼나게 생겼다.
요한은 억울했다.
“에휴, 요한 씨 저는 안 예뻐요?”
“으, 응...? 당연히 예쁘지. 우리 길드 얼굴 간판인데, 암암.”
“하아... 나가요.”
“왜, 왜...?”
메르시의 질문의 진의를 눈치채지 못한 요한은 쫓겨날 상황에 놓였다.
“왜겠어요. 레이, 씻기고 드레스 입혀줘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빨리 나가주실래요, 길드장님?”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눈치채지 못한 요한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 대답했다.
“아, 맞네. 알겠어. 그럼 레이야, 집무실에서 너의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으마...”
비장하게 말한 요한이 의무실에서 헐레벌떡 빠져나갔다.
“에휴, 눈치는 검술 실력이랑 바꿔먹었나. 레이야, 몸은 좀 괜찮아?”
“네, 멀쩡해요. 저 때문에 마음고생 많이 하셨죠?”
“마음고생은 무슨, 너보다 저 나쁜 놈 때문에 더 고생이지. 뭐, 한창 꽃다울 나이에 저런 아저씨를 좋아해 버린 내 잘못이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쉰 메르시가 말했다.
메르시의 나이는 23,
요한의 나이는 41였다.
레이의 나이보다 그들의 나이 차이가 더 높은 숫자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었다.
“어쨌든, 회복 축하하고. 나도 요한 씨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다고 생각해.”
“... 네?”
“일단 씻으러 가자. 사랑을 쟁취한다는 건, 투쟁의 연속이라고.”
그리고 갑자기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한 메르시.
레이는 얼떨떨했으나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들의 마음이 느껴져 꽤나 좋은 기분이었다.
“... 알겠어요.”
그렇기에 조금 야한(?) 드레스를 입기로 마음먹은 레이는 메르시와 함께 목욕탕으로 향했다.
∴
“이건 코르셋이라는 건데, 허리를 조여서 얇아보이게 해주는 거야.”
깨끗하게 몸을 씻은 뒤, 레이에게 드레스를 입혀주기 시작하며 메르시가 말했다.
“최대한 꽉 조일 테니까 더 이상 안될 거 같을 때, 말해줘?”
“네.”
메르시는 코르셋을 고정해주는 끈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레이는 자신의 허리 부근이 점차 조여 오는 걸 느끼며 요한의 말을 떠올렸다.
‘아름다움과 성숙함을 어필... 헤롱헤롱...’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숙함에 반한 강현이 헤롱헤롱 거리는 모습이 저절로 떠올렸다.
그렇게 레이의 망상이 시작되었다.
밝은 달빛과 하늘을 수놓은 별들 아래, 폭죽이 터지고 그 하늘 밑에서 그에게 고백을 받는다.
함께 식사를 하고 데이트를 하며 더욱 깊은 사랑에 서서히 빠지기 시작하고.
달콤한 와인에 취한 그가 자신을 거칠게 침대에.
“레, 레이야? 왜 그래, 아파?”
“아, 아니... 에요.”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한 망상을 끊어내기 위해 거칠게 머리를 흔들자, 놀란 메르시가 물었다.
“음...? 그래, 지금은 좀 어때?”
메르시가 레이의 허리를 살짝 두드리며 물었다.
허리가 상당히 조여 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지만 레이는 메르시에게 조금 더 조여달라고 부탁했다.
“알겠어... 지금은?”
“으음... 더 해도 될 거 같아요.”
레이는 메르시에게 더욱더 코르셋을 조여줄 것을 부탁했다.
계속, 무한 반복이었다.
“숨은 쉴 수 있어...?”
“네...! 흐읍... 지금...!”
숨을 최대한 내뱉은 뒤, 숨을 참고 배에 침을 꽉 준 레이가 다급하게 말했다.
메르시는 지금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예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 알겠어.”
그런 그녀의 진심을 본 메르시는 낼 수 있는 최대한 팔에 힘을 주어 레이의 코르셋을 조여주었다.
∴
아침을 맞이한 강현은 피곤에 절어있었다.
전전날 밤에는 생력 포션을 제작하기 위해 밤을 새웠고, 전날 밤에는 복잡한 생각들 때문에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레이가 자신과 같은 회귀자일 가능성.
처음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자신도 전생의 기억을 지닌 채, 과거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무조건 자신만 회귀했다고 단언할 근거가 전무했다.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의 방향을 걷고 있는 레이.
나비효과 때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확신은 없었다.
레이와 직, 간접적으로 접촉한 기억이 없었기에.
하지만 레이도 회귀를 한 거라면.
자신의 지난날들을 후회하고 속죄의 삶을 살고 싶다고 나와 약속했던 그녀다.
그렇다면 나비효과가 아닌 그녀의 변화를 납득할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레이의 입으로 집적 듣기 전까지는 백 퍼센트 확신하기란 불가능했지만 뭐가 됐든, 상관없다.
레이와 안 좋은 연을 쌓아온 것도 아니며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약속했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잘된 일이다.
그리고 강현은 이미 레이를 용서했다.
푸스탄트를 죽인 원수가 아닌, 자신의 죄를 뉘우쳤으며 선한 삶을 살고 있는 선인으로 규정하고 죄인으로써가 아닌, 힘든 사람들을 돕는다는 같은 목적을 지닌 동료라고 생각하기로 했으니.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하지만...’
만약 회귀자가 자신과 레이뿐만이 아니라면.
그럴 확률은 현저히 낮을 것이다.
회귀자는 회귀자를 알아볼 수밖에 없다.
회귀자라면 분명 어떠한 방식으로든 눈에 띄게 될 것이고 전생과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강현이 아니었다.
‘나는 나대로 열심히 살면 되겠지.’
강현은 새벽 내내 잠을 설치게 한 생각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지금, 머리를 꽁꽁 싸맨다고 그럴싸한 결과를 도출하기란 불가능하다.
만약 또 다른 회귀자가 존재하고 그가 선인이라면 신경 쓸 필요 없다.
전생에서 뒷 세계에 이름을 날렸던 악인이라면 더욱 힘을 길러 위험에 대비하면 된다.
결국 강현에게 남은 유일한 과제는 레이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 밥이나 먹을까.’
그러기 위해선 레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마침 출출해진 강현은 인벤토리에서 흰여우의 얼굴과 수염이 그려진 가면을 꺼냈다.
강현은 푸스탄트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진 상태.
길드에 대기 중인 모험가들에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 착용했던 가면으로 얼굴을 다시 가린 뒤, 숙소에서 나와, 마을의 길가를 돌아다녔다.
적당한 가게를 골라 들어가 간단한 식사를 한 강현이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때, 침대 옆에 위치한 선반에 쪽지가 놓여있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없었던 쪽지.
강현은 딱지 모양으로 접혀있던 쪽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레이가 일어났어.
요한, 또는 메르시가 은밀히 두고 간 쪽지인 듯했다.
반말을 사용한 걸 봐서는 요한이겠지.
레이를 치료해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길 원하는 걸 알고 있는 요한이 배려해준 모양이다.
강현은 벗으려 했던 가면을 다시 착용하고 곧장 의무실로 향했다.
“왔어?”
“좋은 아침입니다, 요한 님.”
“응, 좋은 아침. 쪽지 봤지?”
간단한 아침 인사가 오간 뒤에 건넨 요한의 질문에 강현이 “네,” 대답했다.
“레이가 깨어나면 치료 결과를 살펴볼 거라고 했던 게 기억나서 알려줬어, 바로 들어갈 거야?”
"레이는 방금 막 일어난 겁니까?”
“응... 그렇지.”
잠시 뜸을 들인 뒤 대답한 요한.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보고 놀라진 말라고?”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요한이 말했다.
“... 예?”
“이게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마음... 외롭구나, 외로워”
그리고 영문을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하며 요한이 점점 멀어져 갔다.
“뭔데.”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강현은 레이가 머무는 의료실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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