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재회 (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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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계속 망설이다가 그에게 인사조차 한번 건네보지 못하고 삶을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환생한 후,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를 향한 연심과 결심은 조금도 변치 않았기에.
그런 레이의 앞에 강현이 나타났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또 한 번 자신을 구원해주기 위해서.
신이 그동안의 노력을 알아주신 걸까.
아니면 악마는 여전히 운명을 가지고 나를 농락하는 것일까.
무엇이든 상관없다.
지금 그녀의 앞에는 강현이 있었기에.
“저기... 강현 님? 푸스탄트님은...”
요한은 푸스탄트를 찾았다.
당연했다.
생력을 치유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계에서 푸스탄트만이 유일했으니.
요한이 도움을 요청했던 건 강현이 아니라 푸스탄트였다.
“존칭은 사용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편하게 강현이라고 불러주세요. 푸스탄트님께서 저를 보내신 거니 부디 안심하시길.”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 그래...?”
요한은 얼떨떨했다.
아무리 푸스탄트의 제자라 할지라도 레이와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어떻게 생력을 치유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푸스탄트가 보낸 인물이다.
그가 그렇게 행동했다면 마땅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기에.
“일단 말씀하신 대로 환자의 상태부터 확인하고 잠시 이야기 좀 나누시죠. 잠시 비켜주시겠습니까?”
“으, 응... 알겠어.”
반신반의한 상태지만 푸스탄트가 보내준 강현 말고는 희망이 없는 상황.
찬밥, 더운밥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요한은 한 발자국 물러섰고 강현은 레이에게 다가갔다.
‘... 엄청 예쁘네.’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윤기가 흐르는 고운 적발.
녹아내린 레이의 얼굴만 봐왔던 강현은 꽤나 놀랐다.
‘아니, 지금 놀랄 때가 아니지.’
강현은 잡념을 털어냈다.
손가락으로 레이의 목 주변을 순서대로 짚으며 맥을 살폈다.
“외상, 내상은 전혀 없고 생력이 크게 망가진 상태네요. 아마 오늘 밤을 넘기지 못했을 겁니다.”
“그, 그렇습니까...?!”
요한은 순간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적어도 2일은 버틸 줄 알았던 레이가 오늘 밤이 지나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니.
2일이라고 예상한 자신의 실수로 인해 최악의 상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강현 씨...’
요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황홀함을 향유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어루어 만져주는 그의 손길에.
‘아아...’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만 같은 기분 좋은 두근거림.
하지만 너무 과했던 탓일까.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꾹 누르는 것만 같은 이상한 감각.
억누르지 않으면 무언가가 터질 것만 같았다.
“저, 저기...”
힘겹게 레이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걸까.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오로지 그에게 말이라도 한번 건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크흡...”
막상 입을 열었지만 마땅히 내뱉을 말이 없어서 아무렇게나 건넨 인사.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고열로 인한 화끈 거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후 곧바로 격통이 다시금 찾아와 신음을 흘렸다.
“풋... 네, 안녕하세요. 굳이 무리하셔서 말할 필요 없으시니까 편하게 계세요.”
뜬금없는 레이의 인사에 잠시 벙쪘던 강현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어린애가 티는 내지 않아도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을까.
강현은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푸스탄트가 강현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읏...!”
자신을 향해 미소를 보여주며 무리해서 말하지 말라고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크고 따듯한 손.
전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던 답답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억눌렸던 무언가가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용서, 기회, 대가 없는 상냥함, 새로운 삶의 목적, 살아갈 의지,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위해주었던.
많은 것을 선물해준 그를 떠올릴 때마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기고 이런 감정을 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여태껏 억누르고 무시해왔던 감정이 터졌다.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칭하기엔 너무 거대했으며 다른 단어로 표현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강현 씨, 보고 싶었어요, 사랑해요. 여전히 상냥하고 멋지신 분. 아아... 강현 씨,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 감정을 단어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내 삶의 이유다.
그가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
강현의 앞에서 떳떳할 수 있든 말든.
그가 바로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이런 행복을 맛봐버린 이상, 그가 아니면 안 된다.
“요한 님, 치료를 시작할 테니, 잠시 비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레이의 상태를 충분히 살펴본 강현이 요한에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는 거야?”
“요한 님께서 의학에는 연이 없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그렇지...”
소중한 사람을 치료하는 데에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던 요한이었지만 그의 전문분야가 아니다.
완전한 문외한이다
“제가 반드시 이전보다 더욱 건강하게 치료해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강현은 자신을 믿어달라는 뜻을 담아 요한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뜻을 이해한 요한은 그 여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게.”
요한이 의료실에서 나가고 강현과 레이만이 남아있었다.
생력을 치유한다는 것은 치료행위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강현이 생력을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퍼지면 분명 귀찮은 상황을 맞이하게 될 뿐만 아니라 생력 포션을 노리는 놈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그가 은혜를 잊지 않으며 입이 무겁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던 강현이었기에 일단 치료가 끝난 뒤에, 요한의 입단속을 하기로 했다.
∴
약사의 치료는 다른 의학에 비해 치료시간이 현저히 짧다.
약제사로서의 치료는 치료기술과 숙련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치료를 위한 약을 얼마나 구비해두었는가, 그리고 얼마나 뛰어난 효능을 보이는 약을 제작하였는가.
즉 약제사에게 있어선 준비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그리고 강현은 운이 좋게도, 흑적초의 연구가 끝나 포션으로 제조했을 때, 레이라는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다. “많이 힘드시죠. 제가 다 낫게 해 드릴 테니까 조금만 버텨줘요.”
강현은 레이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
대답하기 힘든 것일까.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괜히 무리해서 말했다가는 상태가 악화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강현은 레이가 예와 아니오로만 대답할 수 있는 말을 건넸다.
‘으음...’
생력 포션을 레이에게 먹여주기에 앞서, 강현은 한번 더 레이의 맥을 짚었다.
혹시라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다른 문제가 없는지 다시 확인해보기 위해서.
“감기...?”
레이의 몸에 전체적인 온도가 올라갔다.
얼굴은 붉어졌으며 심장박동이 가파르다.
분명, 처음 맥을 짚었을 때에는 이런 반응은 없었는데.
레이의 이마에 손바닥을 댔으나, 따듯하기만 할 뿐, 열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리 심각한 질병은 아닐 테니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치유 마법으로도 충분할 거라 생각한 강현은 회귀하며 얻은 인벤토리에서 생력 포션을 꺼냈다.
“요한 님께 본명이 레이라고 들었어요.”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정신이 나가도 제대로 나가버린 걸까.
그가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치료에 앞서서 제가 주는 약에 대해선 비밀로 해줘야 해 주셔야 해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강현은 생력 포션의 코르크를 뽑고 그녀의 등을 받혀 세워주었다.
포션을 조금 더 편하게 마실 수 있도록.
“조금 많이 쓸 건데 꼭 참고 다 마셔야 약효가 온전히 나타나니까 전부 마셔야 해요. 알겠죠?”
레이는 두 눈을 감고, 입을 살짝 벌렸다.
고통스럽긴 하지만 포션병을 들고 직접 먹을 힘은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직접 먹었을 테지만.
강현이 먹어주려 하는 데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는 편이 회복에 더욱 이득일 테고.
천천히, 레이의 입 속으로 생력 포션이 흘러들어왔다.
포션 한 모금을 힘겹게 삼킨 레이는 순간, 전부 뱉어버릴 뻔했다.
쓰다, 지금껏 맛봐온 쓴맛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불에 타고 남은 재를 그대로 입에 넣는다면 이런 맛이 나지 않을까.
하지만 꾹 참고 마셨다.
레이는 그 어느 때보다 살아남고 싶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자신을 두 번이나 죽음 속에서 구해준 강현에게 보답할 거다.
그의 검과 방패가 되어서 그를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 목적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레이는 다시금 확신했다.
그는 자신의 은인이자 구원자이며,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몇 번의헛구역질이 올라오던 걸 억지로 참아냈을 때쯤, 드디어 생력의 포션을 다 마실 수 있었다.
“다음은 수면제예요. 한숨 자고 일어나시면, 멀끔히 나아있을 거니까, 푹 자고 일어나세요.”
수면제를 건네는 강현의 모습에 레이는 입을 벌리지 못했다.
만약 수면제에 취해 잠에 들었다가 일어났을 때, 강현이 사라져 있을까 봐.
“혹시...”
“네, 말하세요. 천천히.”
“자고 일어나면... 흐읍... 사라져 있으신가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레이가 물었다.
“네...?”
레이의 질문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강현은 의아해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해본 뒤,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는 거다.
죽어가는 자신이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지 못했을까 봐.
“당연히 아니죠. 자고 일어나면 옆에 제가 있을 거예요. 환자 상태는 계속 살펴봐야 하니까. 요한 님도 계실 거고. 그러니까 안심하고 푹 주무시면 돼요. 이래 봬도 푸스탄트님의 제자니까.”
“... 그렇군요... 흐읏...”
“그럼 어서, 아~ 하세요.”
강현이 시킨 대로 레이는 입을 벌렸고 그녀의 입 속에 수면제를 조금씩 흘려보냈다.
그리고 수면제를 전부 마신 레이의 눈이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강현 씨, 이번에도 구해주셔서 감사...”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레이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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