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죄인과 약사 (4)
* * *
“잠시 집 안을 수색할 테니 협조해라.”
“당신이 뭔데 아침부터 남의 집 앞에서 협조해라 마라야?”
“이게 보이지 않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던 기사 셋은 가슴팍에 붙어있던 브러치를 가리켰다.
멋들어진 갈기가 있는 호랑이가 조각된 황금의 브러치.
이 근방의 영토를 다스리는 하우로스 백작가의 브러치였다.
“백작가의 기사?”
“그래, 알았으면 순순히 비켜라.”
“... 기다려봐.”
강현은 문을 쾅, 닫고 낡은 상자를 꺼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 어딨냐. 여기다 넣어... 찾았다.”
그리고 루비로 조각된 마패를 찾은 그는 다시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지금 이게 뭐하는...”
“난 이런 사람인데, 예의 좀 갖추지.”
강현은 황제에게 직접 수여받은 브러치를 그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 이건...!”
“황실의 브러치 아닙니까!?”
루비 위로 3자루의 검, 국화인 금방울꽃이 조각되어 있는 브로치를 본 기사들이 경악했다.
“위조... 가 아닙니다...!”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은 기사들은 강현의 눈치를 살폈다.
마치 귀찮은 듯, 담담하게 브로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기사들이 더욱 경악한 이유, 또 한 가지.
귀하디 귀한 황실의 브로치가 수북한 먼지에 쌓여있었다.
“귀한 신 분을 몰라 뵙습니다.”
황실의 브로치를 본 기사들이 그제야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갖췄다.
이게 권력의 맛.
푸스탄트가 말한 대로 사람 망칠 만한 맛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상대가 무례하게 굴면 무례하게.
예의 있게 행동하면 예의 있게.
자신의 규칙대로 강현은 존댓말을 사용해 물었다.
“그... 백작가에서 도주한 노예를 찾고 있습니다.”
“음... 그렇군요.”
분명 레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찾아올 것이 찾아왔다.
“아쉽지만 이 오두막에선 저 혼자만 살고 있습니다.”
“... 정말 죄송합니다만, 다른 곳을 다 찾아봤음에도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이 오두막만 남은 상태인지라, 협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 혼자만 살고 있다고. 이 이상 간섭하려 드신다면 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백작가의 기사.
절대 무시할 만한 신분이 아니다.
사실상 준남작들도 그들은 업신여기지 못한다.
하지만 황실의 브로치는 곧 황실과 직접적인 연이 닿아있는 인물이라는 뜻.
고작 백작가의 기사들이 하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하지만 기사들 또한 이대로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간다면 아가씨께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모든 검문소, 작은 가게부터 가정집까지.
전부 뒤져봤으나 핏빛 칼날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남은 곳은 이 오두막 말고는 없는데.
‘분명히 이 안에 있다.’
기사들은 확신했다.
하지만 강현을 무시하고 억지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갈 시, 불경죄로 처형당할 수도 있다.
이 안에 핏빛칼날이 있든 없든.
“그 노예가 큰 죄를...”
“그럼 제가 죄인을 숨겨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습니까? 상당히 모욕적으로 느껴지는군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난공불락의 요새다.
압도적인 권력 앞에서 기사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돌아가는 수밖에 없는 건가.’
강현이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그들로써도 수가 없다.
“육각성의 장로분들께 받은 브러치도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보여드릴 수 있는데, 말씀만 하시죠.”
“괘, 괜찮습니다...!”
결국 답이 없다고 판단한 기사들은 전략적 후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기사들이 돌아간 걸 확인한 강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일단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그들은 이 집 안에 레이가 있다는 것을 확신한 눈치였다.
‘그냥 내줄걸 그랬나.’
일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할배의 원수한테 뭘 이렇게까지 해줘야 하는 걸까. 강현은 생각했다.
‘... 아니.’
이미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고 정한 강현이다.
번복은 없다.
“그것보다 왜 쫓기는지는 모르고 있었네.”
강현은 오두막의 문을 걸어잠그고 레이에게 돌아가, 그녀에게 쫓기는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사랑을 뺏긴 백작가 영애의 순수한 광기에 대해 들었을 때는, 아주 약간의 동점심을 느꼈다.
∴
또다시 1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강현은 생각했다.
레이가 만약, 이 상태에서 죽었다면 중간보스 같은 게 됐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녀는 강현이 아니었다 해도 반드시 살아난다는 뜻.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면 그녀를 치료할 방법이 반드시 있다는 말이었다.
“... 하지만 어떻게.”
교회의 교황조차도 망가진 생력을 고칠 수 없다.
오로지 푸스탄트만 가능했던 일.
그런 푸스탄트를 죽인 레이가 살아날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
강현은 깊은 고심에 빠졌다.
약제학이 아닌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걸까.
그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약초와 부산물들은 전부 사용했다.
이 세계의 모든 약초 조합법을 알고 있는 그가 알고 있는 조합법은 모두 응용해봤다.
하지만 생력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체력이 회복되고 조금이지만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된 레이였지만 시한부 인생인 것에는 변함없었다.
“...”
침대에 누운 채, 레이는 강현을 바라봤다.
괴로운 표정을 지은 그에게 괜찮냐는 말조차 건넬 수 없는 처지였기에 레이는 슬픔을 느꼈다.
“뭘 봐, 무슨 문제 있어?”
이전과는 달리 훨씬 차가워진 말투.
가슴이 찢어질 듯 아려왔지만 이율배반적 이게도 벅차오르는 행복함을 느낀 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으니.
“... 너무 어렵게 대하지 마.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편하게 해, 좋든 싫든, 한 배를 탔으니까.”
“그럼... 괜찮으신가요...? 괴로운 표정을 짓고 계셔서...”
레이는 강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든 지난날을 잊고 그녀를 용서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고 평생을 죄책감을 짊어진 채 살아가기로 약속했다.
그렇다면 마음속에 응어리진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항상 레이를 차갑게 대했다.
죄책감과 시한부 신세로 인해 충분히 괴로울 텐데.
‘나도, 뭐 하는 거냐.’
갈아먹어도 시원찮은 스승이자 아버지의 원수한테 미안함을 느끼다니.
‘다 할배 당신 때문이잖아. 나를 아주 그냥 호구로 만들었어. 응?’
“괜찮아, 근데, 나 하나만 물어보자.”
“네, 부디 편하게 물어봐주세요.”
“너 만약 완전히 회복하고 나면 뭐하고 살래?”
“...”
그런 거 생각해본 적 없다.
하지만 추구하고 싶은 것만은 있었다.
“평생... 속죄하면서 살고 싶어요. 받은 은혜에 보답도 하고.”
자신을 용서해주고 기회를 줬으며 백작가의 기사들로부터 자신을 숨겨준 은인이다.
평생 그의 옆에서 속죄하고 은혜를 갚는 삶을 살고 싶다.
사심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이 말을 강현에게 전할 용기는 레이에게 없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이 정도면, 호구여도 괜찮을 거다.
어쩌면 푸스탄트에게서 배우고자 했던 하늘에서 점지해준 운명이라는 것이 이런 뿌듯함이 아닐까.
∴
“못 찾았다고요?”
“예, 예...! 죄송합니다.”
“장난하시나요? 분명 멀리 도망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하셨을 텐데.”
“그게...”
짜악.
백작가의 둘째 딸, 셰릴 하우로스가 기사의 뺨을 때렸다.
“그 년 하나 잡겠다고 기사들이 무려 20명이 죽었어요, 죽어가던 년 하나한테, 그런데 제가 변명을 듣고 싶어 하는 걸로 보이시나요?”
“... 죄송합니다.”
“나가세요. 그 년, 찾아올 때까지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세요. 알아들으실 수 있으시죠?”
“아직 보고 드리지 못한 사항이 있습니다.”
기사는 억울함을 느꼈다.
변명이 아니라 상황을 설명하려 했을 뿐이기에.
“... 뭔가요.”
기사는 대답했다.
마을 옆, 산속에 있는 오두막.
그 오두막에서 거주 중인 황실의 브로치를 가진 이가 탐색을 막은 탓에, 다른 곳을 다 탐색한 와중에도 그 오두막은 탐색 못했다고.
“그럼 죽이시면 되겠네요. 평생 검만 휘둘러서 그런 걸까요. 멍청하기 짝이 없네요.”
무시와 조롱의 말.
하지만 기사는 눈썹 하나 꿈틀거릴 수 없었다.
“하지만, 황실의 브로치를 가지고 계셨던 분입니다. 명령이라도 어길 시에는...”
“아뇨? 괜찮아요. 죽여버려도.”
이 무슨 막무가내 같은 말인가.
기사는 광기에 물든 자신의 주군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어차피 돈만 조금 쥐어주면 자신이 죽였다고 연기할 개돼지들이 천지에 깔렸는데, 뭐가 걱정이신 거죠?”
“그, 그 말은...”
“예, 당신들이 그 황실의 사람들을 죽이고 여자를 데리고 오세요, 살인사건은 도적... 아니, 산이니까 산적으로 할까요. 그들이 한 것처럼 위장해드릴 테니까.”
“하지만...”
“하아,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 쳐 먹는 걸까요... 저한테 죽고 싶으셔서 그런 걸까? 그 황실의 브로치를 가진 놈이 저보다 무서우세요?”
셰릴의 잔혹함을 알고 있는 기사들은 공포에 떨었다.
그녀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기사들에게 없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가족, 친척, 친구들까지 그녀의 말 한마디에 생사가 뒤바뀔 수 있으니.
“... 알겠습니다.”
“좋아요. 한동안은 오두막 근처에 숨어 정보를 모으세요. 혹시 제 칼을 숨긴 놈 말고 다른 놈들까지 있을 수 있으니까.”
“예.”
∴
또다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앞으로 1주일이 한계...’
레이의 생력이 점점 더 약해지고 있었으나 생력에 관해서는 아무런 성과조차 올리지 못한 암담한 상황이었다.
“...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강현 씨, 괜찮으세요?”
“아, 언제부터 있었어?”
“방금 전부터요.”
이제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된 레이는 강현의 물음에 대답했다.
“난 당연히 괜찮지, 상황도 아주 좋아.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히 치료해줄 수 있을 거야.”
억지미소와 거짓말.
살아오면서 수많은 역경과 생과 사의 고비를 줄넘기하듯 넘어온 레이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건가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텐데, 오히려 죄인을 살려줬다고 원망받을지도 모르잖아요.”
강현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 뭐, 하늘에 계신 잘난 신이 알아주시겠지.”
“...”
“할배가 말했어. 자기도 과거를 후회하고 새로운 기회를 원한다고. 그래서 남들한테 먼저 베푸는 거래.”
“자신이 먼저 베풀면 신이 알아주고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거라고 생각해서. 농담으로 한 말인지 진심으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웃기지도 않아, 안 그래?”
“신... 믿으세요?”
“아니? 내가 믿는 건 나, 자신밖에 없는데.”
순간 말을 이해하지 못한 레이는 잠시 의아해하다 그의 말을 이해하고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그렇네요...”
“그러니까 너도 네가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봐, 겸사겸사 나도 믿고.”
“네... 그럴게요.”
“그럼 맨날 의욕 떨어지는 소리 좀 그만하고 열심히 속죄하면서 살 방법이나 고민하고 있어.”
“... 강현 씨, 그럼 혹시.”
쾅쾅쾅!
오두막의 문에서부터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소음이 들려왔다.
“하아... 또 백작가 놈들인가. 진짜 질리지도 않나. 레이, 당장 방에 들어가서 숨어있어. 절대 나오지 말고 숨소리도 내지 마. 알겠지?”
“... 네.”
긴장한 표정의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고 그걸 확인한 강현은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
항상 찾아오는 세명의 기사였다.
“말했잖아. 들여보내 줄 생각...! 꺼헉...!”
“... 그러게 순순히 들여보내 줬으면 좋았잖아. 네 잘못이라고. 엉?”
오늘도 적당히 말해서 돌려보내려 했던 강현의 생각과는 달리 말보다 검이 먼저 날아와 그의 심장을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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