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징거릴 때는 언제고, 곧바로 표정이 환해졌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간.
경박함이 문제다. 경박함이.
***
“오, 우리 무공이. 2위 찍었네.”
한여름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아먹으며 폰을 들여다봤다.
“1위는 누군데?”
“김용. 근데 이거 맞아?”
“정파 인물이라 가산점 엄청 들어갔을걸. 김용이 약한 건 아니다만.”
“내가 3위고. 4위는 홍은주 대주? 신교 전성시대네. 16강 상위권에 다 있어.”
“적하가 위지연보다 순위가 높네. 아직 그 정도는 아닌데 말이지.”
위지연은 32강에서 공손린과 치열한 내전 끝에 승리하고 올라왔었다.
적하는 발전이야 꽤 빨랐지만, 아직 적룡대 상위 3명에게는 조금 못 미쳤다.
재능이야 다른 적룡대원들도 하나같이 다 뛰어났으니까. 무공과 오성이 비슷하다면 세월을 이기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어차피 이거 실력보단 인기투표잖아.”
“그건 그렇다만.”
“내 다음 상대는 앨리스야. 난 뭔 외국인이랑 원수졌냐.”
“이번에는 한 방 힘들 거 같다.”
“맞아. 잘 싸우더라.”
만일 한여름이 앨리스를 이긴다면, 다음은 홍은주와 맞대결이었다.
거기서도 이긴다면.
‘애매하네.’
한여름 반대편에서 올라올 자들은 4명 중 셋이 외국인이라 감이 잘 안 잡혔다.
특히 아레스, 오스카 폰 샤움베르크.
이 둘은 무공 자체가 특이해서 더 승산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저 ‘아레스’는 히어로 네임이라든가.
미국은 아예 아카데미 시절부터 자신만의 히어로 네임을 설정해 영웅화를 시켜버린 모양이다. 아카데미 이름부터 히어로 아카데미라니까.
자본주의 끝판왕인 미국답게, 그쪽 시장 규모도 어마어마한듯했다.
하긴, 무림인이 별호 쓰는 것과 지금 보면 별 차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카페에서 소란스럽게 흘러나오는 중계 화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선 김용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늘 높이 검을 치켜드는 모습이 여러 각도에서 비쳤다.
‘김용이라.’
내게 패배한 이후 절치부심이라도 했는지, 그야말로 놀라울 만한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괜히 미래 천하연의 경쟁 상대로 꼽힌 게 아니다.
내가 적하를 이긴다면 8강은 서문예린, 그리고 준결승 상대는 김용이 될 가능성이 컸다.
‘나쁘진 않네.’
어차피 김용은 이번에도 패배하겠지만.
만일 패배에 좌절하지만 않는다면, 더욱 빠른 성장이 가능해질 거다.
미래를 생각하면 최선에 가까운 대진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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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3m에 가까운 거구가 의식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승자, 오스카 폰 샤움베르크!”
온몸을 피로 점철한 사내가 주먹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극한에 이른 외공을 익힌 아레스와 승부는 결국 오스카의 승리로 끝이 났다. 관중석 쪽에서 거센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매 승부마다 치열한 혈투를 보여주는 오스카의 모습은 뭇 세간인들 가슴에 불을 지피기 충분했다.
“특이하구나.”
천하연이 옆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지?”
김무공도 팔짱을 끼고 오스카를 지그시 응시했다.
“비무를 하면서 점점 발전하고 있어.”
“실전 타입인가? 아니면 힘을 숨긴 건가.”
“힘을 숨겼다면 기가 막힌 연기겠구나.”
주변을 살짝 둘러본 김무공이 천하연에게 전음을 보냈다.
[혈교일 가능성은?]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자는 이제 몇 남지 않았다. 그중 오스카가 가장 미심쩍었다. 게다가 비무 때마다 만신창이가 되어놓고, 다음 비무가 다가오면 바로 멀쩡해지는 것도 의심을 더했다. 혈교 사술의 특징이 강력한 재생능이었으니까.
[알 수 없다. 혈교는 사이한 대법 때문에 겉보기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
[음습한 새끼들.]
[그러니 신교의 눈을 피해 아직도 살아남은 것 아니겠나.]
[일단 봐야겠네. 차라리 내가 저쪽 시드로 갔으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지. 규정은 규정이니.]
“한 번 더 남았으니 봐야겠네. 나 다녀올게.”
가볍게 스트레칭을 마친 김무공이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곳에는 이미 적하가 잔뜩 움츠린 자세로 쌍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대장, 살살 해 주는 거 맞죠?”
“넌 속고만 살았냐.”
“믿을게요. 상냥하게 부탁드려요.”
적하가 수줍은 소녀처럼 얼굴을 붉혔다.
“연기 하지 마라. 다 티 난다. 그런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거냐?”
“칫. 저도 성인이거든요.”
“흠흠.”
옆에서 지켜보던 비무 감독관이 헛기침했다. 슬슬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적하는 기운을 끌어올렸다. 청성의 기원은 천사도天師道라는 오래된 도파로부터 시작됐다. 천사도는 다른 말로 오두미교라고 불리기도 했으니.
청성의 근본은 사실상 도교의 기원과 같이한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저 옛날 오두미교에서 발원한 오두미신공五斗米神功은 깊이와 위력 모두 천하일절이라 불릴만했다.
청성에서 청운적하검을 받쳐줄 수 있는 심법은 몇 되지 않았고, 적하가 익힌 오두미신공은 그중 하나였다.
‘평범한 거로는 안 돼.’
적하는 입안을 살짝 깨물었다. 김무공이 발하는 기파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짜릿했다. 그야말로 심혼心魂을 찍어누르는 기파였다. 김무공은 느긋하게 자리에 서서 적하가 준비를 끝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딱 한 방만.’
한 방이라도 먹이고 싶다. 김무공의 평온한 표정을 보며 적하는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틈이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자질이라면 입문조차 불가능한 게 청운적하검이었다. 적하는 명백한 천재에 속했다.
그렇다면, 동갑의 나이에 자신과 아예 다른 범주에 서 있는 저 청년은 무어라 불러야 할까.
‘괴력난신怪力亂神이 따로 없어.’
적하가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의 주군은 강해지는 속도가 명백히 비정상적이었다. 그사이에 또 강해졌다. 벌써 귀천하신 사부의 기도와 비슷해졌다. 만일 이 성장세를 수년 이상 유지한다면.
‘...천하제일이 아니라 어쩌면 고금제일도 바라볼 수 있겠지.’
청성의 근본이 도교의 기원과 함께한다는 얘기는, 그만큼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는 뜻도 되었다.
후한말.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그 시대.
무당의 장삼봉은 물론이고, 달마가 소림에 도착하기도 전에 태동한 게 청성이었다. 지금이야 쫄딱 망했지만, 적하는 사부를 통해 그간 역사를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무학에 대한 오성은 조금 떨어졌어도, 적하의 사부는 제자를 키워내는 능력만큼은 탁월했다. 비록 여건상 단 한 명뿐인 제자에 그쳤지만.
덕분에 적하는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하다 자부했다.
“안 오면 내가 먼저 간다.”
김무공이 나직하게 내뱉었다.
고작 몇 초 동안 이어진 상념이었지만, 무인에게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다.
“...갑니다.”
청적의 나선이 적하의 검을 휘감았다. 따로따로 구현하는 게 아닌, 쌍검에 전부 청운적하검의 기운을 실었다. 고도의 집중력과 시전 시간이 꽤 길게 필요한 탓에, 실전에서는 못 써먹을 기예였다.
쿵- 발구름과 함께 적하의 몸이 쭉 늘어졌다. 청성의 대표 신법인 세류표細柳飄였다. 하늘색 머리카락이 길게 휘날렸다. 세류표라는 이름처럼, 마치 버드나무가 나부끼는 듯한 독특한 움직임이었다.
순식간에 김무공의 면전까지 접근한 적하가 바닥을 강하게 찍었다.
꽝- 강력한 진각 경파에 사방으로 깊은 균열이 죽죽 뻗어 나갔다. 머리 위로 팔을 든 적하가 쌍검을 교차로 내질렀다. 직선적인 투로 사이에 부드러운 검격이 섞였다. 청운적하검의 묘리를 절정에 가깝게 구현해냈다.
꽝-
그것이 단 일 수에 막혔다. 김무공은 손날에 천마신공의 묵빛 기운을 실어 적하의 검을 쳐냈다. 비무대 위에서 청광과 흑광이 명멸했다.
‘역시 안 돼.’
적하가 이를 악물었다. 공격을 가하는 건 자신이지만, 오히려 뒤로 밀려났다.
따악-
“큭...!”
특히 중간중간 김무공이 내지르는 딱밤은 적하에게 통증과 굴욕, 좌절감을 동시에 안겨줬다. 차이가 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패도적인 묵빛 기운은 분명 마공에 가까웠지만, 도가의 무공인 오두미신공과 청운적하검으로도 상성상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쪽이 밀렸다.
경지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적룡대 다른 마공과 맞상대를 꾸준히 해왔기에 알 수 있었다.
김무공이 손가락을 튕겨 지풍을 날렸다.
콰과광- 가볍게 날린 지풍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손이 덜덜 떨렸다.
게다가.
‘대체 무슨 무공이...!’
저것은 일반적인 마공과 달랐다. 김무공의 몸 주변으로 공력의 파편이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단순히 기세를 방출하는 것만으로도, 숨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수련을 도우며 설렁설렁 힘을 발출했을 때와 지금처럼 조금이라도 진심이 섞였을 때.
너무 압도적인 차이였다.
‘남궁의 제왕검형도 이 정도는 아냐. 이것도 엄청나게 봐주는 거겠지.’
만일 끝내려고 마음먹었으면 진작 끝났으리라. 적하는 김무공의 눈빛에서 권태로움을 느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타닥- 뒤로 몇 걸음 물러난 적하가 청운검을 땅에 꽂고 적하검만을 양손으로 쥐었다. 청운적하검은 당연히 쌍검으로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전부터 계속해서 연습해왔던 초식을 준비하며 일격필살의 의념을 담았다.
적하검을 푸른 기운이 뒤덮고, 이내 붉은색 진기가 번쩍거렸다. 검에서 번개가 치는듯했다.
이윽고 적하의 몸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느릿하던 것이, 마치 분절된 것처럼 뚝뚝 끊겨 보였다.
뻗어 나오는 검영 사이로 붉은 번개가 번뜩였다.
바닥을 타고 실타래처럼 이어진 빛무리가 순식간에 김무공에게 쇄도했다.
적뢰흔赤雷痕.
지금껏 적하가 적하검만 쓰며 연습했던, 청운적하검 중에 가장 쾌속하면서도 위력적인 초식이었다.
사선으로 내리치는 날카로운 검격을 보며, 김무공의 손이 묵빛으로 물들었다.
직접 마주한 적하의 필사적인 검을 보며, 김무공은 새로운 발상을 떠올렸다. 그건 깨달음이라 표현해도 무방했다.
‘청운적하검의 묘리.’
이종진기의 합일合一. 도가는 합을 중시한다. 물아일체, 음양, 육합, 태극. 혼백합일魂魄合一 등.
모두가 비슷한 원리였다. 청운적하검은 그런 합일의 원리를 극대화한 무공이었다. 지금껏 김무공은 천마신공의 기운으로 혈수마공을 펼쳤다.
엄밀히 따지면 둘의 조화는 상생과는 멀었다. 천마신공이든, 혈수마공이든. 둘 다 개성이 너무 강했다.
태양지체의 막대한 양기, 그리고 무혼과 천마신공의 초월적인 공능 덕에 펼칠 수 있던 거지.
본래라면 혈수마공에 적합한 심법은 따로 있었을 거다. 적절하지 않은 심공으로 펼치니 당연히 잡스러울 수밖에. 도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리에 어긋났다.
찰나의 순간.
머릿속에서 화탄이 터졌다. 김무공의 뇌리를 수많은 무공구결이 스치고 지나갔다. 과거, 무신을 만났을 때 들어갔던 공간에 진입한 느낌이었다. 시간이 멈춘듯했다. 자연스럽게 천마신공과 무혼이 새로운 길로 김무공을 인도했다.
‘천마신공은 이미 완성된 무공이다. 내 경지로는 건드릴 수 없다.’
한없이 느려진 시간 속에서, 천마신공을 중심으로 혈수마공의 구결이 해체되고, 새로 조립되었다.
‘건곤대나이는 아냐.’
혈수마공의 강맹함에 건곤대나이는 어울리지 않았다. 건곤대나이와 봉마검형은 애초에 천마신공을 위한 무공이었다. 굳이 고칠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봉마검형의 묘리는 쓸 수 있다.’
지금은 혈수마공만. 그렇게 오로지 천마신공을 위한 무공으로. 김무공 자신만을 위한 무공으로. 혈수마공을 뜯어고쳤다. 거듭된 상념에 백회혈이 타오를 듯이 백열했다.
천천히.
혈수마공이 천마신공에 녹아들었다. 심상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의념을 담았다. 무공이 추구하는바. 무공의 근본 심상. 현상에 개념을 부여했다.
‘만마萬魔를 굴복시키는 성화聖火.’
일족일도의 거리에서 김무공의 상념이 저물어갔다. 느려진 시간이 다시금 돌아가기 시작했다.
화르륵- 나선의 불꽃이 연꽃처럼 피어올랐다. 찬연한 흑염黑炎으로 뒤덮인 김무공의 손이 적뢰흔의 검격으로 향했다.
탁-
강맹한 공격이 부딪쳤다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가 울렸다.
“...어?”
가장 당황한 건, 검을 내려친 적하였다. 둘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김무공이 적하의 검을 한 손으로 잡아버렸다.
이윽고, 청운적하검의 기운이 모조리 묵빛 불꽃으로 뒤덮여 사라졌다. 대응할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적하 자신은 빈손이었다.
“항복! 항복!”
적하가 다급히 소리쳤다.
“방금, 뭐였어요?”
“글쎄다.”
김무공이 적하에게 검을 다시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