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키스.”
슬쩍 천하연 쪽을 힐긋 본 뒤, 가볍게 한여름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한여름이 일어났다. 드디어 무신제의 아침이 밝아왔다.
***
새마을 길드 양춘식.
자기 전에 한 번 더 찾아봤었다. 의심 가는 부분은 없다. 한때는 불법적인 일에 연루된 적도 있었다지만, 5년 전부터는 손을 완벽히 씻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무신제에 참가도 가능했겠지.
“중원무공아카데미 김무공 생도님, 새마을 길드 양춘식님. 3번 비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북적거리는 인파를 가르고, 기다란 길을 따라 나는 비무대 위에 섰다. 아침 햇살이 사뭇 따사로웠다. 저 멀리서 한여름과 천하연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줬다.
“형씨는 여유가 넘치는군. 역시 귀족 나으리인가.”
황보 형제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거구가 비무대로 올라오며 말했다. 머리보다 더 큰 도끼가 퍽 인상적이었다.
“딱히 귀족은 아냐. 운이 좋았지.”
“신교의 이공자라 들었다.”
“대한민국이 신분제 사회는 아니잖아?”
“쯧, 의미 없는 얘기를.”
“그렇지. 어차피 무인은 무로 말하는 법.”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양춘식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맞는 말이다. 다시 소개하지.”
쿵-
양춘식이 거대한 도끼를 땅에 내려찍으며 입을 열었다. 패도적인 기세가 양춘식의 온몸을 휘감았다.
“대력부왕大力斧王의 진전을 이어받은 양춘식이다.”
대력부왕, 다른 말로 하면 녹림왕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았던 내용이다.
갑자기 흥미가 동했다.
녹림.
양아치나 다름없는 사도 무리 중에 몇 안 되는, 정파의 명문 못지않은 집단이었다.
극소수의 ‘일부’에 속하는.
지금 와선 세가 줄었다 하나, 그 근본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천마신교, 김무공이다.”
나는 나른한 태도를 벗어던지고, 정중하게 포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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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되면 시작들 하시오.”
비무 심사를 맡은 무명 교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내뱉은 뒤, 거리를 벌렸다. 김무공은 여유롭게 상대를 응시했다.
양춘식이 상의를 저 멀리 벗어던졌다. 탄탄한 상체가 자못 인상적이었다.
‘생각보다는 정갈하군.’
사도 대부분의 무공은 불안정함이 특징이었다. 백도 무공이 정해진 운기 경로를 따라 행해진다면, 사도는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파격을 마다하지 않았다. 마도는 그보다 더 나아가 아예 역천까지 추구했지만. 마공은 그렇기에 훨씬 정교하게 익힐 필요가 있었다. 정교하지 못하면 너무나도 위험했으니까. 결국, 정교하지 못한 마공은 도태되어 사라지거나 엄중히 봉인됐다.
마도와 사도. 비슷하면서도 무슨 차이가 있냐. 사도 무공들은, 까놓고 말해서 엄청나게 조잡했다. 백도 정파 무공보다 조금은 빠르게 경지를 올릴 수 있지만, 오히려 가면 갈수록 한계가 뚜렷했다.
반면, 양춘식이 익힌 무공은 달랐다. 오히려 사공보다는 정공에 가까웠다.
녹림의 근본은 탐관오리의 횡포를 피해 산으로 숨어든 의적 집단이었다. 단순한 산적 집단이라면 수백 년이 넘게 이어져 오는 건 불가능했다. 산적이란 대부분 모래알과 같은 조직력을 자랑했으니까. 무언가 그들을 묶어주는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렇군.’
양춘식의 무공은 패도적일 뿐이지, 올곧은 무공이었다. 황보세가나 하북팽가의 무공이 떠오르기도 했다.
‘재밌네.’
새로운 무공을 겪는 건 김무공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미, 무학에 깊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좀 더 보고 싶었다. 김무공은 오연한 태도로 선언했다.
“삼 초식은 양보하지.”
“사양하진 않겠다.”
양춘식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느껴지는 분위기만 봐도, 실력의 차이는 현격했다.
꽝- 곧바로 비무대 바닥이 터져나갔다. 고작 보법을 밟은 것에 불과한데도, 실금이 사방으로 질주했다. 순식간에 김무공의 앞까지 쇄도한 양춘식이 거대한 도끼를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둘렀다. 일류의 무인이라 해도 저걸 정면에서 상대하는 순간 몸이 반으로 갈라져 죽을 게 틀림없었다.
김무공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의지를 품는 순간 단전으로부터 천마신공의 기운이 전신 혈도를 질주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김무공은 양춘식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보았다.
변초라곤 없는 정직한 공격.
찰나에 수십, 수백 가지 이상의 대응 방법이 김무공의 뇌리를 스쳐 갔다. 단 일 수면 양춘식을 즉살하는 것도 가능했다.
허나, 이건 무를 겨루는 비무지 생사결이 아니었다. 김무공은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며 여유롭게 양춘식의 도끼를 피했다. 투로는 이미 낱낱이 분석된 지 오래였다.
녹림왕의 무공이라 하였다. 확실히 대성만 한다면 능히 천하제일을 다툴만했다.
“삼 초식 지났다.”
이제부터는 마냥 피하지만은 않았다. 김무공의 손에 붉은 기운이 서렸다. 그리 짙진 않았다. 양춘식의 도끼에 서린 도기에 맞춰서, 김무공은 수기를 구현했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발하는 의념의 힘이 그걸 가능케 했다.
꽈과과광-
손과 도끼가 부딪칠 때마다 원형의 충격파가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의념이 실린 천마군림보는 일부러 쓰지 않았다. 그래서야 의미가 없다.
“크윽...! 대단하구나!”
호탕하게 소리치며 양춘식이 연신 도끼를 휘둘렀다. 내상이라도 입었는지 양춘식의 입가에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춘식의 도끼에 실린 기운은 더욱더 강해졌다. 김무공은 마치 사부가 제자를 가르치는 것처럼, 허점이 보일 때마다 그쪽을 향해 가볍게 기운을 날렸다.
꽝- 꽝-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울리며 도끼에 찍힌 비무대가 사정없이 박살 났다.
‘이거 복구는 가능한가?’
실없는 생각이 김무공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닥이 깨지고 평평한 흙이 나오는 거로 보아, 애초에 박살 날 걸 가정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벌써 수십 합이 넘게 손속을 겨뤘다. 어느 순간부터 양춘식은 무아지경에 들어간 듯했다.
‘슬슬 한계다.’
여기서 더 하면 도리어 크게 내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끝낼 시간이었다.
후웅-
양춘식이 휘두르는 도끼의 풍압을 즐기며, 김무공은 뒤로 가볍게 물러섰다.
그리고 오른발 용천혈에 의념을 실어, 드넓은 비무대 전체를 찍어눌렀다.
천마군림보가 발하는 거력에, 양춘식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한계까지 치달은 그의 몸은 천마군림보가 내뿜는 위압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김무공은 느긋하게 하늘에 떠 있는 무명 교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승자, 김무공 생도! 고생하셨소이다.”
무명 교수가 빠르게 둘의 사이로 다가오며 선언했다. 그제야 양춘식의 흐린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고맙다. 은혜를 입었군.”
양춘식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은혜랄 것까지야.”
“아니. 큰 도움이 됐다. 혹, 우리 길드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라. 천마신교의 이공자가 딱히 우리 길드 정도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모르는 것 아니겠나.”
“기억해둘게.”
“그럼 됐다.”
도끼를 어깨에 걸쳐 매고, 양춘식이 씨익 웃었다.
저 멀리서부터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무인들은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무에 미쳐있는 종자들이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서로의 무를 겨루는 것이었으니. 내공이 없는 현실에서도 무술가들은 그러할진대, 무공이란 신비가 살아 숨 쉬는 이 세계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좋은 비무를 보여준 둘에게 당연히 열광할 수밖에. 천마신교 소속이든 뭐든 적어도 이 자리에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일반인은 일반인 나름대로, 나름 ‘현란해’ 보이는 둘의 비무에 소리를 질렀다.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자들은 연신 감탄만 내뱉었다. 특히 귀빈석에서 김무공의 비무를 관람하던 무림맹 사람들의 충격이 가장 컸다.
“허어... 신교의 이공자라더니.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오.”
“동의하오. 무슨 생각으로 대놓고 드러냈나 싶었는데, 저 정도면 드러낼 만하오.”
“흥, 그래 봐야 사파의 잡졸 상대로 한 비무 아니겠소.”
“댁 눈은 옹이구멍이시오? 저 도끼 든 사내가 정녕 단순한 사파의 잡졸로 보이시오?”
“뭐요?!”
일부에서는 소란도 일었으며.
“이제 약관이라지요?”
“혼인하기엔 너무 어리군요.”
“이공자면 부담은 적습니다만.”
“글쎄, 천위강 교주가 호락호락하게 수락하진 않을 것 같소.”
아예 다른 쪽의 생각을 품는 자들도 많았다.
고작 비무 한 번이 불러일으킨 결과의 파급력은 절대 작지만은 않았다.
“고생했어.”
한여름이 다가오는 김무공을 보며 물을 건넸다.
“고마워.”
“녹림왕의 무공. 확실히 재밌더구나.”
천하연은 비무를 복기하는지 연신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러게. 제대로 된 사파 무공은 처음이라, 흥 좀 냈네.”
“곧 내 차례당.”
우드득- 한여름이 가볍게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이상 있으면 바로 알려줘.”
“얍. 걱정하지 마.”
스트레칭을 마친 한여름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상대는 대호 길드 송영근. 신교에서 수련을 마친 이후, 한여름이 제대로 힘 쓰는 건 보지 못했었다.
“몇 초 내기할래?”
김무공이 팔짱을 끼고 옆의 천하연에게 물었다.
“좋다. 일 초식이면 끝날 것 같구나.”
“너무 극단적인 거 아냐?”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봐도 다른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근데 나도 왜 일 초식만에 끝날 거 같지.”
“그러면 내기가 성립되지 않는다만.”
“쩝, 안 되겠네. 일단 보자. 슬슬 시작하는듯하니.”
가을인데도 검은색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고 나온 송영근의 주먹과 팔뚝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상성도 좋지 않아.”
“그러게. 하필 권사냐. 쟤 안 봐주겠지?”
“아마도.”
천하연이나 김무공이 익힌 천마신공이 워낙 뛰어난 공능을 지니고 있어서 그렇지.
일반적인 무공은 한여름의 소수마공을 맞이하는 순간 혈도가 얼어붙어 제 기능을 못 했다. 병장기를 쓰는 상대보단, 저렇게 권사처럼 손을 맞대야 하는 적에게 특효약이었다.
“시작!”
“승자, 한여름 생도!”
무슨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났다. 순식간에 보법을 밟으며 접근한 한여름이 상대의 방어 위로 소수마공을 날려버렸고, 상대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정지했다. 신묘한 보법이었다.
한여름이 김무공 쪽을 보며 씨익 웃으면서, 당당하게 손가락을 아래로 내밀어 V자를 만들었다.
‘쟨 뭔 갸루피스를 하고 그러냐.’
이 세계에서는 안 쓰던데 말이다. 김무공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줬다.
김무공의 승리 때와 다른 의미로, 장내에 흥분이 고조됐다. 새로운 절대 강자의 출현. 열광할 수밖에 없는 요소다. 하물며 미소녀다. 스포츠라면 흥행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실제로 무신제 비무는 스포츠랑 다를 바 없기도 했다. 때문에 비무를 찍는 카메라들이 대번에 한여름에게 집중됐다.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한여름이 김무공 쪽으로 다가갔다.
“잘했어. 근데 보법 새로 익힌 거냐? 한 번도 못 보던 건데.”
“응. 빙마후께서 직접 알려주셨어. 천산신녀공은 실전됐는데 신녀가 익히던 보법은 남아있었나 봐.”
빙마후 얘기가 나오자 천하연이 잠시 움찔했다.
“그래서 자신감이 넘치셨고만.”
“이젠 답도 없지. 혼자만 초절정은 치사하잖아.”
한여름이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너도 곧 오를 수 있을걸? 내가 알던 한여름이 아니던데. 의념은 또 언제 그리 능숙해졌냐. 방학 전까진 제대로 쓰지도 못하더니.”
“...있어, 그런 방법이.”
“크흠.”
둘의 대화를 듣던 천하연이 갑자기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비무는 이어서 계속됐다. 128강부터 시작하는 비무 대회를 단기간에 소화하려다 보니, 여간 급한 게 아니었다. 단순히 둘이서 비무 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전후 과정 준비도 있었으니까.
적룡대는 전원 가볍게 128강을 통과했다. 때문에 벌써부터 신교의 저력에 충격받은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김무공은 관람석에 앉아 느긋하게 비무를 관전했다.
이윽고, 팝콘을 우적우적 먹던 한여름이 입을 열었다.
“당소소, 이겼네.”
“그러게. 쟤가 올라올 줄은 알았다만.”
비무에서 승리한 당소소가 고개를 틀더니, 김무공 쪽을 슬쩍 노려봤다. 무심한 눈빛으로 김무공이 응시하자, 당소소가 고개를 홱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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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저적- 손에 들린 찻잔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아....”
당소소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마지막에 봤던 김무공의 무심한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파직- 마침내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이 산산조각 나서 땅으로 떨어졌다.
날카로운 조각들이 손을 찔러댔지만, 당소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털었다. 작은 손과 어울리지 않게, 당소소의 손바닥은 굳은살로 가득했다.
근처에 묵묵히 서 있던 시비가 당소소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물기를 거칠게 닦으며 당소소가 입을 열었다.
“숙부님은 어디쯤이시지?”
“곧 도착하실 겁니다.”
“도착 전에 미리 알려줘.”
“예.”
당소소는 엎드려 탁자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교의 이공자라는 자가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당문을 핍박한단 말인가. 가문 내에서 오가는 온갖 말들은 당소소에게 극심한 피로를 선사했다.
처음에 품었던 김무공에 대한 호감은, 이제 증오에 가까운 감정으로 점점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