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31)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마의를 겁박했다. 본래라면 하지 말아야 할 짓이지.”

한여름도 잠깐 이상함을 느낀 적 있었다. 신의에게 진찰을 받았으면서 굳이 마의에게?

이제야 퍼즐이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 다 좋다 쳐. 근데 말야. 시한부인 거랑 섹스랑 무슨 상관인데? 시한부가 섹스하면 없어지기라도 해?”

“그의 시한부를 해소하기 위해선, 화경에 도달하여 환골탈태를 하는 게 필요했다. 몸이 버티질 못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으니, 환골탈태로 균형을 바로잡고 몸의 내구를 올리는 게 유일한 답이었어. 마의도 그러더구나.”

“화경...?”

한여름도 화경이 얼마나 드높은 경지인지는 알고 있었다. 빙의한 지 얼마 안 된 김무공이나 자신이 도달하기엔 까마득하게 멀다는 것 역시.

“그래. 억지로라도 경지를 올려야 했다. 그와 내가 익힌 무공은 서로 공명하는 특성이 있으니, 잠자리를 가지면 둘 다 경지가 빠르게 상승할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유혹했구나. 나의 무공을 위해서. 그에게는 죄가 없어.”

“죄를 따지려 하는 게 아냐. 그냥. 그냥....”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얼핏 보기에 천하연은 솔직하게 말하는듯했다. 무공에 미친 무인들 특성상, 빠르게 경지를 올릴 수단만 있으면 얼마든지 시행했을 거다.

“거부하는 그를 유혹해서, 억지로 안겼다. 뱀처럼 간교한 말로 그를 꾀어내서....”

“그만. 변명은 됐어. 효과, 있었어?”

“...잠자리 이후, 그는 단숨에 삼화취정의 경지에 올랐다. 한 번의 잠자리에 초절정의 벽을 넘었지. 판단은 옳았다. 허나....”

한여름은 가만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미미하게 떨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다시 한번, 한여름은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거짓말.”

“잠자리 이후 그가 초절정에 오른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서로의 진기가 깊게 공명하며, 나와 그의 경지를 단숨에 끌어올렸지.”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한여름이 입을 열었다. 여자의 감이라 해야 할지. 한여름은 확신했다. 천하연은 명백한 거짓말을 했다.

“내가 거짓말이라 한 건, 그 부분이 아냐.”

“...?”

“진정, 무공을 위해 안겼어? 아무런 사심 없이? 맹세할 수 있어?”

천하연이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한여름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다.

“...그래. 아무런 사심 없이. 나는 나의 무공을 위해서 그를 유혹했다.”

“거짓말.”

“아니, 진실....”

“아니, 넌 김무공을 사랑해. 이성으로.”

순간, 천하연은 목이 메는 걸 느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봐, 네 지금 표정. 둘이 똑같아. 남의 생각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차라리 내가 나쁜 년이 되는 편이 낫다. 내가 원망받는 게 낫다. 그럼 그는 나쁜 년에게 당한 피해자가 될 테니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아냐?”

맹한 것 같으면서도, 한여름은 때때로 놀랍도록 예리할 때가 있다. 천하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숨길 수 없었다.

“...그대 말이 맞다.”

한여름이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됐어. 우리 대화는 나중에 마저 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을 나서기 전.

“...알려줘서 고마워.”

문고리를 잡고, 한여름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쿵-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나가버렸다.

한참을 멍하니 제자리에 있던 천하연은.

조금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안내를 받아 류은채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정신없이 서류를 검토하던 류은채가 차분하게 일어나 포권했다. 태도는 평소와 같았지만, 얼굴에 짙은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많이 바쁜가 보네.”

“아닙니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좋지.”

류은채가 따뜻한 커피를 내왔다. 사람 시켜도 될 텐데, 이럴 때만은 꼭 본인이 직접 하려 들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소파에 앉았다.

“적룡대에 관한 보고는....”

“됐어. 아까 훈련하는 거 살짝 봤거든. 무신제 예선 신청만 제대로 했음 됐지.”

“그건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신교에서는 뭐래?”

“안 그래도 관련해서 얘기가 나왔습니다. 공자님과 신녀님, 그리고 적룡대가 참가하니 신교에서는 따로 신청하진 않겠다 했습니다.”

“다른 인원이?”

“예. 신교는 항상 인력 부족이니까요. 일반인이야 돈으로 고용하면 되지만, 무인들의 숫자는 항상 부족하지요.”

돈으로라도 고용할 수 있다는 면에서 대단하긴 하다만.

하긴, 무신제에 신교의 이름을 달고 내보내려면 후기지수 중에서도 절정 이상이어야 할 텐데.

막상 여유로운 사람 찾아보라면 그리 많진 않았다.

“정파 영역인데 힘든 일은 없어? 말이 비밀 지부지 이 정도면 다 알 거 같은데. 대놓고 견제가 들온다든지.”

“지금까지는 평온합니다. 오히려 누가 엄포라도 놓은 듯, 주변에 오가는 인원 자체가 줄었습니다.”

“다행이네. 혹시 문제 생기면 말해줘. 사부한테 바로 찔러야지.”

“...교주님을 민원 센터 정도로 여기는 분은 공자님뿐일 겁니다.”

“우리 사부 의외로 관대하던데?”

“공자님이니까 관대한 겁니다. 홍화각에서 오랜 세월 일하면서, 교주님의 그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나로서도 사부는 종잡기 힘든 분이었다.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입버릇처럼 말해놓고, 실제로 하는 행동 보면 정반대거든.

예전에 누가 그랬던가?

뭐에 관심 없다 계속 말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그것에 미쳐있다던가.

사부도 그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 비밀 지부야?]

갑자기 한여름에게서 채팅이 왔다.

[어. 아직 여기 있지.]

[...거기 가만히 있어.]

[응?]

[내가 거기로 갈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뭔 일인데?]

[가서 말해 줄게.]

[알았어.]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채팅을 닫았다.

“한여름 온다니까 사람들한테 말해줘.”

“신녀님께서 말입니까?”

“어. 갑자기 온다는데?”

“알겠습니다. 얘기해놓도록 하지요.”

“여기서 기다려도 상관없지?”

“예. 그럼, 업무 봐도 되겠습니까?”

“어. 난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해.”

소파에 편하게 앉아 커피만 홀짝였다. 류은채가 일하는 모습을 보니, 미녀 커리어 우먼 같아 묘한 감흥이 일었다.

꽝-

한 30여 분 정도 기다렸을까.

밖에서 굉음이 들렸다. 류은채가 황급히 연락을 확인했다.

“무슨 일이야?”

“...신녀님께서 도착하셨답니다. 저건 그냥 공중에서 착지하면서 나는 소리라고....”

“쟤는 뭘 저리 급하게 왔지.”

“일단 이쪽으로 모시라 했습니다.”

“부탁해.”

벌컥-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집무실의 문이 거세게 열렸다.

“김무공.”

시린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산발한 머리와 일그러진 표정이 가까워졌다.

한여름이 류은채를 보며 입을 열었다.

“류은채 지부장님, 잠시 나가주시겠어요?”

나와 한여름을 번갈아 한번 훑어본 류은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쿵- 굳게 닫힌 문을 보며, 나는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들었어.”

한여름의 입가에 걸린 처연한 미소가 보였다.

덜컥. 가슴속에서 무언가 내려앉았다.

시선을 마주치기 힘들다.

나는 고개를 돌린 채, 쓴웃음을 지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시한부. 천하연.”

...대답은, 그걸로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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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언젠가는 직접 말하려 했다.

내가 죽지 않는다면.

그렇기에 따로 각오하진 않았다.

당장은 머나먼 일이었으니까.

핑계나 변명,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킨 채 풀리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미안하다.”

일어나서, 나는 사과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담담한 음색으로 한여름이 말을 내뱉었다.

“너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원망 섞인 말을 쏟아내면 이 답답함이 풀릴까.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나는....”

“지금은.”

한여름이 내 말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내 말을 들어.”

잠시 숨을 고른 한여름이 속삭이듯 말을 이어나갔다.

“있잖아. 나, 그냥 모른척할까도 생각해 봤어. 천하연이라면, 내 부탁을 들어줬을 테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평소처럼 웃고 떠들고... 사랑을 속삭이고. 그러면 지금처럼 그냥, 평범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한여름이 시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근데 역시 안 되겠더라. 이미 알아버렸는데. 너도 알잖아. 나 거짓말 못 하는 거.”

입맛이 썼다.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답을 했다.

“...알지.”

“넌, 진짜 나쁜 놈이야.”

“....”

“이기적이기도 하고.”

“...미안.”

왜 그랬냐.

왜 숨겼냐.

한여름은 그렇게 묻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왜’ 그랬는지는 이미 알고 있는듯했다.

내가 한여름의 마음을 빤히 들여다보듯이, 그녀도 마찬가지인 거겠지.

알고 있다.

일방적인 관계는, 언젠가는 파탄을 맞이하게 되어 있다는 것 정도야.

이런 시궁창 같은 세계에서 언제까지고 좋은 모습, 좋은 것만 보게 해주려는 것 역시.

독선에 불과하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선의에서 비롯된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당연히, 알고 있다.

그래도 인간 마음이라는 게 말이다.

마음대로 되는 구석이 별로 없는 법이다.

특히 사랑이라는 지독한 감정이 개입되면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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