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31)

“음. 알았으니까 너무 그러진 마.”

“좋습니다. 그럼 신교 입문 기초교육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류은채가 주변 기기를 능숙하게 조작하며 정면의 화면에 PPT를 띄웠다.

“의외로 체계적이네?”

“신교에 입문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교육도 그만큼 발달했지요.”

포인터까지 꺼내서 류은채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렇게 보니 그냥 흔한 커리어 우먼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신교의 구조는....”

이어지는 설명은 내가 아는 부분도 있고 모르는 부분들도 있었다. 말 그대로 기초 교육답게, 대외적으로 알려진 정보들이 주축인듯했다.

얘기를 가만히 듣다 보니 문득 드는 의문점이 있어 나는 입을 열었다.

“질문. 신교의 주축이 천마궁과 신녀궁을 중심으로 한 십마전十魔殿이라는 건 이해했는데. 조직도에는 다섯 개밖에 없는데?”

류은채가 고개를 끄덕이곤 아예 다른 화면을 열었다.

“공자님께는 어느 정도 정보를 공개하는 걸 허락받았으니, 미리 말씀드리지요. 현재 신교에는 십마전 중 검마전劍魔殿, 도마전刀魔殿, 창마전槍魔殿, 권마전拳魔殿, 빙마전氷魔殿. 이 다섯만 남아있는 게 맞습니다.”

다섯 대 다섯.

들어본 적 있다.

“나머지 절반이 혈교로 독립해 나간 건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류은채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혈마전血魔殿을 주축으로 음마전音魔殿, 환마전幻魔殿, 요마전妖魔殿, 독마전毒魔殿. 이 오대전의 반란으로 만들어진 게 혈교지요. 교주님께선 혈교를 토벌하며 차차 십마전 복구를 계획 중이십니다.”

혈교 구조는 어느 정도 나도 알고 있었다. 저기서 혈마전이 혈마궁으로 올라간 것 외엔 미래와 동일했다.

여기에 혈뇌각이나 성혈단처럼 몇 개의 독립된 조직을 집어넣으면 혈교 조직도 완성이다.

게다가 저 오대전 중 독마전의 경우 혈교 몰락 이후, 해외 세력을 규합해 만독문이라는 또 다른 빌런이 되어버렸다.

‘이번에는 확실히 뿌리 뽑는다.’

세상에 하등 도움 될 게 없는 놈들이었다.

극도로 위험한 생화학 무기를 막 뿌리고 다니는 미친놈들이었으니까.

특히 독은 악용될 시 민간인들의 부수적인 피해가 심각했다.

그나저나.

외울 게 너무 많다.

보면 볼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당장 얼굴만 해도 수백 명은 외워야 했다.

핵심 인물만 뽑았는데도 저 정도다.

...한여름 쟤는 잘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신교의 교육을 믿어보는 수밖에.

한동안 이어진 교육 이후.

“오늘 교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류은채가 주변을 정리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여기 들어왔을 때부터 조금 거슬리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미리 말하는 게 나을 터.

“예. 편하게 하명하시지요.”

나는 손가락을 들어 특정 장소를 가리켰다.

“여기 암중 호위 좀 물려줬으면 좋겠다. 자꾸 신경 쓰여서. 어려우면 이 층만이라도 좋으니 평소에는 비워줘.”

꼭대기 층 대부분은 내가 묵는 펜트하우스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일부분은 암중 호위와 사용인들의 공간이었다.

목적이 호위라 하나, 뭔가 감시받는 느낌에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잠시 말을 고르던 류은채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마의께서 언제 시간 되는지도 좀. 사부님께 미리 허가는 받았어.”

“예. 일정 확인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고마워.”

“그럼 이만.”

발소리도 없이 떠나가는 류은채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의도적인 건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니콘 신공이 콧김을 내뿜는 걸 보면 류은채도 처녀였다.

나이와 외형만 보면 전혀 아닐 거 같은데 말이다. 역시 사람은 외형만 보고 모르는 건지.

뭐,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말이다.

***

진초록의 산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광 좋은 곳에는 거대한 장원이 있었다.

미래지향적인 천마신교에서도 이곳만큼은 자연과 어우러진 조화로운 모습을 자랑했다.

천마신교 장로원.

은퇴한 거마들로 구성된 장로원은 표면적인 실권은 없다 하나, 실제로는 막강한 힘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 장로원의 중앙.

천장에 거대한 유리 돔이 있는 건물에 형형한 기세를 내뿜는 노인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운룡전雲龍殿이라 불리는 이곳은 천마신교의 장로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의결을 하는 장소였다.

마치 어딘가의 의회처럼.

회의를 주관하는 장로원주의 좌석을 중심으로 다른 장로들의 좌석이 부채꼴 모양으로 경사를 이뤄 배치되어 있었다.

비록 좌석 중 절반 이상이 비어있었지만, 운룡전 내부에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참석한 장로들이 모두 착석한 것에 맞춰, 부원주 파검마波劍魔 이현이 개회를 알렸다.

“오늘 이렇게 급히 회의를 모집한 까닭은, 교주께서 새로운 제자를 들였다는 얘기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며칠 안으로 공포가 될 예정입니다.”

교주의 새로운 제자 얘기가 나오자 곳곳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허어... 기이한 일이로군요. 장로들의 꾸준한 추천에도 그간 제자를 받지 않던 교주께서 대체 무슨 바람이 든 것인지.”

장로원주 적양마존赤陽魔尊 북궁벽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새로운 신녀 후보도 천마령까지 써가면서 지정했다 들었습니다.”

“천마령을? 신녀는 수백 년 이상 탄생한 적이 없소만. 교주가 대체 무슨 생각이겠습니까?”

“새로운 제자와 신녀 후보. 그것이 몰고 올 파란을 교주가 모르진 않았을 터인데 말입니다.”

“어차피 장로원은 천하연 소교주와 한 배를 탄 지 오래일 터. 큰 문제야 있겠습니까?”

장로원에서 이뤄지는 회의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서로 오랜 기간 봐온 사이다 보니,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강했다.

“십마전 출신 장로들이 오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소이다. 딴생각을 품을 수도 있어요.”

“허허, 딴 생각이라니요. 혈교가 날뛰는 이 마당에 그러면 안 되지요.”

“잊으셨소? 혈교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십마전의 전주들을 의심하는 건 너무 나가는 것 같소만!”

대화가 계속되면서 슬슬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묵묵히 장로들의 말을 듣고 있던 태상호법 단천상이 북궁벽과 시선을 한번 교환했다.

“노부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단천상의 나지막한 음성에 일순 사위가 고요해졌다.

지금이야 늘 사람 좋은 인상을 하고 다니지만, 활발히 활동할 당시 단천상은 천살마제天殺魔帝라 불렸다.

살기 넘치는 무공과 잔혹한 손속 때문에 붙은 별호였다.

당연히, 그의 성격을 자극하고 싶은 자는 장로원 내에서도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장로원주 북궁벽이 화답했다.

“태상호법, 말씀하시지요.”

“노부가 보기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좋은 방법이라?”

“예로부터 분쟁을 막는 수단으로 자주 쓰인 방법이 있었지요.”

“어떤...?”

단천상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혼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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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갑자기 장로 하나가 발을 구르며 벌떡 일어났다.

“어허! 천하연 소교주는 아직 혼인할 때가 되지 않았소이다!”

“지금 당장 하자는 건 아니지요.”

“어림없소!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르는 개뼈다귀 잡놈에게 하연이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오!”

“하연이라니. 천하연 소교주는 이제 꼬마가 아니외다! 말을 똑바로 하시오!”

“당신들도 다 똑같은 생각이면서 뭘 그러시오!”

“크흠...!”

주변 장로들이 하나둘씩 일어나서 한마디 하다 보니 점점 개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 태상호법의 면을 생각해서 말하지 않으려 했소만, 그런 미친 소리는 교주님께서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자자, 장로님들 진정하시고! 노주광 장로님도 앉으시지요.”

북궁벽이 내공까지 실어서 소리쳤다. 덕분에 잠시간이지만 소음이 잦아들었다.

단천상이 여전히 잔잔한 웃음만을 지었다. 그리곤 찬찬히 입을 열었다.

“장로님들의 우려도 이해합니다. 어디까지나 혼인은 명분입니다.”

“명분이라...?”

“인륜지대사를 빌미로 장로원에서 주도하여 철저한 검증을 하자는 얘기지요. 신분도 불분명한 제자. 구린 구석이 있으면 검증 과정에서 밝혀지겠지요.”

“호오... 그건 일리가 있소. 확실히, 그것만큼 좋은 명분은 없지요.”

“예. 만일 미덥잖은 구석이 있으면 그걸 빌미로 혼인 역시 없던 일로 하면 그만입니다.”

“역시 태상호법은 대단하시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셨소?”

“허허, 과찬이십니다.”

다들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천하연과 김무공이 혼인하기엔 한참 어린, 이제 갓 스물이라는 건 이미 그들의 뇌리에서는 사라졌다.

부원주 이현만이 뭔가 돌아가는 모습에서 이상함을 느꼈지만, 내부의 분위기는 반쯤 광기에 휩싸인 지 오래였다.

평소에는 잇속 하나하나 다 따지는 냉철한 노인들이 왜 천하연만 관련되면 저리 주책바가지 어린애가 되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결국,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면서 동네 노인정과 다름없게 변한 장로원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

온몸에 침이 꽂힌 채로 하염없이 시간만 확인했다. 통증은 없었지만, 지루함 때문에 졸음이 밀려왔다.

6시간.

시작한 지 정확히 6시간이 되자, 생사마의가 침을 거뒀다. 천수신의가 무인으로 착각할 만큼 탄탄한 몸을 자랑했다면, 생사마의는 삐쩍 마른 고목과도 같았다.

인상마저 꼬장꼬장함이 묻어나왔으니, 왜 저런 살벌한 별호를 얻었는지는 안 봐도 짐작이 갔다.

생사마의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주변을 계속해서 왕복했다. 결국, 내가 먼저 못 참고 말을 꺼냈다.

“문제가 있습니까?”

탁. 내 질문조차 무시하고 계속해서 주변을 오가던 생사마의가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짧으면 1년. 길면 5년.”

다짜고짜 툭 내뱉은 말. 그러나 천수신의를 통해 들은 게 있기에 무슨 말인지는 바로 깨달았다.

“그거밖에 안 됩니까?”

“그거나 되는 거요.”

“...화마정이 생각보다 위험한 물건인가 보군요.”

“본래 인간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물건이오.”

“아직은 잠잠합니다만.”

심장 언저리에서 고고하게 회전하는 화마정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화마정은 순수한 화정에 마기가 침습하여 만들어진 물건이오. 전설로만 듣던 걸 실제로 볼 줄은 몰랐군. 잠잠한 이유는 간단하외다. 화정이 완벽히 화마정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지. 미약하지만 내부에 순수한 화정의 기운이 남아있소. 그것들이 저항하는 거지.”

“그런 것 치곤 외부 기운에는 꽤 사납게 반응합니다만.”

“마기가 두꺼운 껍질처럼 화정을 둘러싸고 있소. 당연히 외부 기운에는 격하게 반응할 수밖에. 다만 이상한 점은 있구려. 공자의 기운에도 똑같이 반응해야 할 터인데....”

정작 내가 건드리면 아예 단단해지기 시전하는 것처럼 꼼짝도 안 하고 굳게 버텼다.

마의조차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는듯했다.

“1년에서 5년이라는 건?”

“그렇소. 마기가 남은 저항을 완벽하게 소멸시킬 때까지의 기간을 어림잡아 추산한 거요. 그때가 되면 절대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오. 분명 강하게 힘을 분출하겠지.”

화마정이 위치한 곳은 중단전이었다.

그리고 중단전은 심장 언저리였으니, 화마정 수준으로 강한 기운이 지근거리에서 폭발하면 당연히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잘 익은 심장 구이가 되거나, 재수 없으면 온몸이 뻥 하고 터져버릴 거다.

“해결 방법은....”

“억지로 자극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니. 가장 좋은 건, 그릇을 넓히는 것이오.”

“...역시 화경 수준까진 올라야 하는 겁니까.”

“아마도. 화마정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하단전의 막대한 양기와 융합하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는, 나도 도저히 예측이 불가능한 영역이외다. 상단전의 그것도 그렇고. 그 전에 최대한 그릇을 키워놓는 수밖에 없소.”

천수신의와 생사마의 둘 다 똑같은 얘기를 하는 걸 보면, 뚜렷한 해결책은 없다는 얘기였다.

조금은 속이 갑갑해졌다.

짧으면 1년.

초절정의 벽도 아직 넘지 못한 내게, 화경이란 경지는 너무나도 요원했다.

“영약으로 경지를 상승시키는 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생사마의가 문진표를 지그시 살펴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불가. 미타성수에 혼원단이면 다른 영약을 먹어도 더 이상 큰 효과를 보긴 힘들 거요. 굳이 따지면 소림의 대환단 정도는 모르겠지만, 소림은 이미 멸문했소. 대환단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소이다.”

예상대로의 대답이 들려왔다. 어차피 큰 기대도 안 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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