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범위 안에 있다면 상관없겠다만. 장담할 수는 없겠구나. 듣자 하니 섬이 너무 크구나.”
“가능한 수준에서만 봐주면 돼.”
“그래. 걱정하지 말거라. 힘닿는 데까진 지켜볼 터이니.”
일단 안전장치 하나는 더 걸어놨고.
슬슬 비행기가 하강하며 창밖으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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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디스플레이만 수백 개가 넘는 통제실 내부.
각 디스플레이에는 아름다운 열대 섬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생도들을 수송기에 실어 보내고, 교수진은 곧바로 무인도 근처에 있는 통제 센터로 이동했다.
활주로까지 갖춰진 이곳은 유사시 모든 생도를 후송할 수 있는 데다가, 섬 곳곳을 감시하는 것도 가능했다.
공중에서는 아래를 감시하는 수송기가 24시간 내내 교대로 움직이고, 수천 개가 넘는 작은 드론이 섬 내부에 흩뿌려졌는데도.
이때만 되면 교수진들은 항상 신경이 날카롭게 설 수밖에 없었다.
열대 무인도란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올해도 시작이네요.”
청하 교수가 굳은 얼굴로 입술을 뗐다.
“올해 생도들은 특히 우수하니, 기대해봐도 되겠습니다.”
총장 대신 총책임자로서 통제실에 앉은 장백검군 고승빈이 말했다.
“강하 시작합니다!”
수송기와 분주하게 교신을 주고받던 직원이 생도들의 공중 강하를 알렸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교수들도 숨죽이고 디스플레이를 쳐다봤다.
현장에 몇몇 교수들이 나가 있었지만, 모든 걸 대비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나, 둘... 전부 성공했습니다!”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생도들의 목숨이 위험하면 팔목에 찬 기기를 통해 정보가 오게 되어있었다.
다행히 별문제 없이 해안가 근처에 모두 안전하게 착륙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다행이네요.”
청하 교수가 디스플레이 한 구석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한 남성이 능숙하게 낙하산을 벗어 던지고 곧장 밀림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21일.
학생들 못지않게 교수들에게도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다가왔다.
***
아카데미에서 미리 표시해 놓은 안전 장소에 착지했다.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벌써 숨이 막혀왔다.
쏴아아-
투명하고 맑은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반짝이는 백사장에 끊임없이 부딪히며 부서졌다.
이것만 보면 영화에서나 보던 아름다운 열대 무인도의 전경이었으나.
막상 그런 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공기 없이 3분, 온도 없이 3시간, 물 없이 3일, 식량 없이 3주.
생존술의 기본 원칙이었다.
무림인이라 몇 배는 오래 견딘다 쳐도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의외로 물이 아니라 ‘피난처’였다.
추운 곳보다야 낫지만, 맨바닥에 퍼질러 자는 건 이런 열대 우림에서도 추천할만한 행위가 못 됐다.
생존키트 배낭에서 나침반을 꺼내고, 방향을 확인한 뒤 곧바로 밀림으로 들어갔다.
[잘 착지했냐?]
[웅냐. 진짜 덥다....]
보통은 생도간 연락이 불가능했지만, 우린 상태창이라는 치트 시스템 덕에 가능했다. 내가 한시름 놓은 이유기도 했다.
서로의 좌표를 공유하고 대충 지도를 보면서 체크했다.
그나마 ‘첨단’에 속하는 이 나침반은 실시간으로 좌표를 찍어주는 덕에, 훨씬 길을 찾기 쉬워졌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상당히 복잡해졌으리라.
복잡한 열대 우림 식물층은 항공기에서 탐지의 어려움을 더하는 건 물론이고, 숲에 들어간 사람이 방향을 잃게 만든다.
일단 생각보다 한여름과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안전하게 걸어온다 치면 하루 정도.
아예 정반대로 떨어졌을 것도 가정했는데, 이 거리면 합류할 수 있다.
[미리 얘기한 대로 하자. 지도 보는 법 기억하지?]
[야쓰. 네 쪽으로 갈게.]
미리 제공해준 지도라 해 봐야 대략적인 섬의 모양과 위도 정도만 나와 있었지만.
나침반이 있는 이상 어느 정도 위치를 찾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일단 해안가 따라와서 내 낙하산 잔해물 찾으면 알려줘. 근처에 수분 보충할 거 있으면 미리 채취하고. 애매하면 바로바로 물어봐.]
[걱정 마. 최대한 조심하면서 가께.]
[그래. 믿는다.]
공중에서 내려오며 물줄기의 위치를 봐놨다.
우거진 수풀을 마체테로 조금씩 베어가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개울이 흐르는 곳이 바로 나왔다.
물가 바로 근처는 별로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조금 떨어져서 평평한 곳을 찾았다.
얼마 걷다 보니 햇볕을 피할 수 있으면서도 개울과 가깝고 벌레 역시 적은 장소를 발견했다.
풀과 나뭇가지를 베어 집터가 될 곳을 마련했다.
‘대나무.’
이것까진 생각하지 않았는데, 주변을 넓게 살펴보니 대나무가 군데군데 있었다.
“운이 좋군.”
자연스레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열대의 대나무는 한국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사계절 내내 뜨거운 날씨는 식물이 자라기도 좋은 조건이었다.
그만큼 대나무 역시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기둥이나 바닥재로 사용해도 될 만큼.
‘어우.’
고작 이 정도 걸었는데, 온몸이 땀에 젖었다.
아예 윗옷을 벗어 던지고 생존키트 배낭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마체테를 들어, 대나무를 찍었다.
우지끈-
단 한 방에 거대한 대나무가 쓰러졌다.
내기도 별로 안 실었는데 두꺼운 대나무가 수수깡처럼 부러지는 걸 보고 있으니 속이 시원했다.
확실히 근력 단련했던 게 효과가 좋긴 좋았다.
곳곳에 있는 대나무를 찍어서 쓰러트리고, 다시 몇 개로 분리했다.
대나무 뭉치를 어깨에 메고 피난처를 세울 장소에 도착했다.
근처 대나무 양을 가늠해 보니, 생각보다 큰 집을 지을만한 양이었다.
작은 삽을 꺼내 땅을 살짝 파고, 기둥이 될 대나무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천마신공의 기운을 끌어올려 그대로 내리찍었다.
푹- 단단한 땅에 대나무가 깊게 박혀 들어갔다.
몇 번 과정을 반복해 기둥을 세우고, 지붕 뼈대를 계산해서 올렸다.
골조를 세운 이후, 대나무끼리 끈으로 단단하게 묶어 고정했다.
주위에 널린 나무줄기를 써도 됐지만, 생존키트에 질긴 끈이 들어있는 덕에 굳이 그러진 않아도 됐다.
확실히 사소한 재료라도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후우....”
이마에 흐르는 땀을 한 번 닦아내고, 다시 대나무를 가져와 바닥에 깔았다.
압도적인 근력과 진기 덕에 혼자서 10명은 달라붙어서 해야 했을 작업이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다시 마체테로 길을 내면서 해안가 근처로 나갔다.
아까 봐놓은 게 있었다.
코코넛.
생도들을 다 죽일 게 아니라면 섬도 꽤 신중하게 골랐을 게 분명했다.
당연히 생존을 위해 엄청나게 좋은 나무인 코코넛은 있을 거라 예상했고.
바로 들어맞았다.
아카데미에서 미리 안전지대라고 표시해 놓은 착지 지점 근처에는 코코넛 나무가 꽤 많았다.
“덥다 더워.”
원래라면 해가 뜨거나 질 무렵, 좀 선선할 때를 노려 일하는 게 맞았지만.
무인이 고작 이런 환경에 굴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코코넛 나무에서 코코넛 몇 개를 따고, 잎을 사정없이 베어냈다.
그리고 잘린 줄기에 미리 가져온 플라스틱 수통을 고정했다.
줄기에서 떨어진 수액이 통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아래로 내려왔다.
작은 비닐 배낭에 코코넛을 담기 전, 하나를 손날치기로 뚜껑을 날려버리고 곧장 들이켰다.
"크으...."
예전에 ZIOO라는 끔찍한 맛이 나는 코코넛워터를 먹은 적이 있어 다소 걱정이었는데, 생각보다는 먹을만했다.
분명 ZIOO도 코코넛워터 99%라고 적혀 있었는데, 대체 1%에 무슨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의문이 드는 맛 차이였다.
다시 마셔봐도 이건 달랐다.
나름 달달한 게, 역시 현지에서 먹는 게 최고라는 진리는 바뀌지 않은 모양이다.
너무 많이 딸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익은 코코넛은 너무 많이 먹으면 설사를 유발하기도 했다.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굳이 몸으로 실험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깨끗한 물은 코코넛 말고도 좀 더 확보해야 했다.
코코넛이 들어있는 비닐 가방과 함께, 코코넛 잎을 잔뜩 들고 피난처로 왔다.
지붕에 잎을 넓게 펴서 세우고, 고정하고.
나뭇잎과 진흙을 펴서 벽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바닥까지 코코넛 잎을 깔고 위에 은박지 담요를 펴서 덮었다.
정신없이 그런 작업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는 시간대가 다가왔다.
새삼스레 느끼지만, 코코넛 역시 치트키다.
식수 해결, 잎은 피난처, 줄기는 끈으로도 사용하는 데다가 코코넛 껍질은 말려서 땔감으로도 쓸 수 있었다.
코코넛 나무 하나만 있어도 생존 난이도가 너무 쉬워졌다.
그것도 물론 이용하는 법을 알아야 가능하겠지만.
미리 죽어라 생존술 배워둔 게 쓸모가 있었다.
작업하다 보니 그새 코코넛을 다 마셔버려 해안가로 나왔다.
아까 걸어놨던 플라스틱 수통을 내려 들고 해안가 근처 바위에 앉았다.
“어우, 벌레.”
수통 안에 날아 들어가 있는 벌레를 걷어내고, 한 모금 코코넛 수액을 마셨다.
“크으...!”
마시자마자 절로 감탄이 나오는 맛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먹는 고로쇠 수액 이런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단맛이 느껴졌다.
식혜보다 더 농축된?
이걸로 괜히 설탕 만들고 시럽 만들고 하는 게 아닌듯했다.
그럭저럭 몸을 뉠 쉼터를 만들고, 이렇게 노을이 내려앉은 에메랄드빛 바닷가를 보고 있으니.
묘한 성취감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멍하니 해가 사라지는 걸 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나 한여름은 바보가 아니다.’
이번에야말로 그걸 증명하리라.
다부진 마음을 품고 내려온 순간, 한여름은 머리가 하얘졌다.
분명 독도법인가 뭔가 열심히 외웠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한참을 주저앉아 끙끙거리던 한여름은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지도에서 자신의 위치와 김무공의 위치를 특정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론 불도저처럼 일직선으로 숲을 베어가며 나아갔다.
거친 가지든 질긴 나무줄기든 개울이든 벌레든.
그 무엇도 한여름의 앞길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한여름의 뇌리를 지배하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
‘합류해야 한다.’
미리 챙긴 코코넛을 병나발 불어대듯 마셔가며, 쉬지도 않고 우직하게 전진, 또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