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31)

모용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거절을 예상했다는 듯한 말투였다.

“묵수대 건으로 오신 겁니까?”

“아니,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자 왔다.”

“...회장님이 제게 고마워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날, 묵수대를 내부 경비로 돌린 게 나니까.”

어쩐지, 이상하게 아카데미 외부 경계가 허술하다 했다.

보통은 그 근처도 묵수대가 순찰을 하는 지역이었으니까.

물론 학생 위주인 묵수대가 있었다 해서 그 참사를 막았을 것 같진 않았지만.

“괜찮습니다. 감사받으려고 한 일은 아닙니다.”

“협객인가. 알겠다. 그럼 제안을 좀 바꾸지. 학생회 들어올 생각 있나?”

“묵수대와 다른 겁니까?”

“규율에 얽매이는 묵수대보다 좀 더 자유롭지. 원한다면 묵수대로 갈 수도 있고. 정확히 말하면 네게 선택권을 주겠다는 얘기다.”

학생회라.

원래라면 굳이 가야 하나 싶겠지만,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베아트리체가 제갈혜가 맞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판단할 필요가 생겼다.

묵수대 경비의 허점이 파악 당한 것부터 심증은 올라갔다.

만일 그녀가 제갈혜라면, 당문을 멸망시키고 굳이 자결한 이유도 알아내는 편이 낫겠지.

“저, 회장님?”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려던 순간, 한여름이 먼저 말을 꺼냈다.

“뭐지?”

“만일 김무공 생도가 학생회에 들어간다면, 저도 같이 가능할까요?”

모용성의 시선이 잠시 내 쪽에 머물렀다.

“물론. 가능하다.”

“...들어가도록 하죠. 얘도 같이.”

한여름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좋다. 입부를 환영한다. 안내는 차후 베아트리체를 통해 연락이 갈 거다.”

“잘 부탁해, 후배님들?”

베아트리체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한 후 둘은 카페를 나갔다.

“학생회라니.”

멍하니 한여름이 중얼거렸다.

“들어가 보고 싶었냐?”

“뭔가 있어 보이잖아. 다른 곳도 아니고 아카데미 학생회니까.”

“귀찮기만 할 거 같은데 말이지.”

“난 너만 믿어.”

한여름이 날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오냐.”

한숨을 푹 내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이잉-

순간, 스마트폰이 울렸다.

[후배님? 나 부회장인데, 이따 우리 따로 좀 보자. 단둘이.]

[알겠습니다. 시간이랑 장소 말해주시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오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도 이건 기회였다.

베아트리체의 본 모습을 파헤칠 수 있는.

***

“....”

한여름과 헤어지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손님이 유독 많다.

정확히는 어제부터였지만.

남자 기숙사 입구 근처, 봄꽃이 군데군데 피어있는 화단 앞에 여성 둘이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적발거유의 미소녀와 그 뒤에 숨어있는 갈색 단발의 작은 소녀.

이번 사건의 피해자인 이지아와 신아리였다.

전후사정을 듣고선 혹여나 둘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모습을 보면 오히려 더 돈독해진 듯했다.

“아, 안녕하세요.”

둘이 거의 동시에 몸을 푹 숙였다.

신아리의 창백한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제대로 회복되기도 전에 무리해서 나온 거겠지.

“몸은 좀 괜찮냐?”

이지아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신아리를 보며 물었다.

화들짝 놀라며 신아리가 정면으로 나왔다.

“...더, 덕분에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김무공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그냥 할 수 있어서 한 것뿐이니 너무 신경 쓰진 마라.”

“아니에요. 그, 이거....”

신아리가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쇼핑백 안으로 고풍스러운 무복이 곱게 포장되어있는 게 보였다.

“무복?”

“...저랑 아리가 골라봤어요.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대답은 옆에 차분하게 서 있던 이지아에게서 들려왔다.

“고마워. 잘 입을게.”

“김무공님이 아니셨다면 전 아마... 주화입마에 들어 빠져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잠시 품 안을 뒤적거리던 이지아가 작은 목함 하나를 꺼냈다.

“이것도 받아주세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받았다.

딱 봐도 보통 물건은 아니었다.

이런 걸 거절하기엔 내 처지도 그리 여유롭진 않았다.

“혼원단混元丹. 저희 혼원문 비전의 영약이에요. 최상급 요상단이기도 하고요.”

“이런 걸 내게 줘도 되나?”

혼원문 비전이면 최소 소환단급이다.

영약 중에서도 상당히 고급 축에 속했다.

심지어 이런 보물은 돈이 많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입마入魔에 들어 자아를 잃고 살인귀가 될 뻔한 걸 막아주셨으니. 오히려 이걸로도 부족하지요. 거듭 감사드립니다. 김무공님은 저희 혼원문의 은인이십니다.”

이지아가 나직한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저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니 조금 민망한 기분이다.

“이건 좋은 데 쓸게. 내가 거절할 처지는 못 돼서. 근데 같은 생도니까 너무 고개 숙이진 마. 동기끼리 좀 돕고 살 수도 있는 거지.”

“...네.”

잔잔한 미소로 이지아가 화답했다.

“얼른 들어가 봐. 쟤 상태 안 좋은 거 같은데.”

신아리 쪽을 보며 턱짓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게, 슬슬 한계가 다가온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나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으니까.

“나중에 뵈어요.”

둘이 한 번 더 허리를 꾸뻑 숙여 내게 인사하고 떠나갔다.

본래라면 죽었어야 할 신아리가 살았고.

신아리의 죽음으로 인해 이지아가 심마에 드는 것도 막았다.

어찌 보면 철혈여제의 각성을 막아버렸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장기적으로 보자면 심마에 들어 마인에 가깝게 변한 철혈여제보다, 균형을 유지하는 편이 최종적인 성장 면에선 낫다.

무공이란 으레 그런 법이었으니까.

이지아가 신아리를 부축하면서 천천히 멀어져갔다.

근처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둘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역시,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

기숙사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베아트리체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장 보고 싶다나.

덕분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다시 불려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 당장 보자고 할 줄은 예상 못 했는데 말이다.

장소도 인적 하나 없는 학사 구석의 정자였다.

베아트리체는 미리 도착해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미안, 후배님. 너무 갑작스럽게 불렀나 보네.”

베아트리체가 다소 침울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무의식중에 불만이 새어 나온 모양이다.

“아닙니다. 오늘 손님이 좀 많아서요. 살짝 피곤하네요.”

“하긴, 후배님은 그런... 사건까지 겪었으니까. 괜찮은 거 맞지?”

걱정스러운 말투와 표정.

아무리 봐도 이 여성이 혈마녀 제갈혜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후배를 걱정하는 다정한 선배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게다가 유니콘 신공에 따르면 확실한 처녀다.

혈교의 마녀가 순결한 처녀?

말이 되나 싶다.

“그 문제는 괜찮습니다.”

“응, 다른 게 아니라 학생회 안내를 좀 해줄까 해서 말야. 휴강이니까 오늘이 나을 것 같아서. 후배님도 이게 낫지?”

...심지어 내 예상과 달리 지극히 정상적인 용무였다.

“예.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으응, 내 일이니까.”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한번 젓고는 찬찬히 학생회 구조에 관해 설명했다.

묵수대의 권한이 엄청난 걸 빼고는 일반적인 학생회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근데 후배님.”

설명이 끝나갈 때쯤, 갑자기 베아트리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네?”

“방금 날 보면서 무슨 생각 했어?”

베아트리체가 유혹하듯, 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입술을 달싹였다.

입가에 걸린 요염한 미소와 반대로, 뱀처럼 갈라진 동공이 먹잇감을 노리는 것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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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말에 뇌정지가 왔다.

무슨 생각 했냐고?

진정 베아트리체가 혈마녀인지 판단하고 있었다.

무고한 사람을 다짜고짜 처리할 수는 없었으니까.

“별생각 안 했습니다만.”

“흐응, 그래?”

“갑작스럽군요.”

“후배님, 나 궁금한 거 있어.”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베아트리체가 상반신을 내 쪽으로 좀 더 내밀었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한여름 후배님이랑 정확히 무슨 관계야?”

“비밀입니다.”

“확실히 사귀는 건 아니란 얘기네.”

...여자의 감이라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베아트리체는 나와 한여름 관계를 단숨에 꿰뚫어 봤다.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가깝고 연인이라 하기엔 미묘한.

“그건 왜 묻습니까?”

“나랑 사귈래?”

요염한 미소. 베아트리체가 내 손등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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