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118화 (118/120)

이방인 (4)

“몇 날 며칠을 고생하며 준비한 자리가 이렇게나 빨리 끝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동의를 구하는 물음에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이어지는 수전노의 푸념.

“그것도 한 나라의 왕이라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를 일방적으로 파투 내는 재벌가 도련님 덕분에.”

수전노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잘게 떨었다.

“뭐― 그렇다고 이 상황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허탈한 웃음을 단번에 삼킨 수전노가 나를 바라보며 눈가를 찡긋거렸다.

전혀 말상대로서의 역할을 해주고 있지 않은데도 알아서 북 치고 장구 치고를 전부 도맡는 수전노.

“대게 왕이라하면 아주 특별하고 대단한 이미지의 인간을 연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죠.”

놈이 눈가를 게슴츠레 좁히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초에 왕만큼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준 직업도 드뭅니다. 하물며―”

수전노가 잠시간 말을 끊고 연시우와 강해성이 나간 문을 응시했다.

“이미 왕처럼 살고 계셨던 분들에게 저희만큼 건방진 굴러온 돌도 없겠죠.”

“……그래서.”

정말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난 가만히 있다간 언제 끝날지 모를 수전노의 수다를 끊으며 연이어 말했다.

“날 이 자리에 다시 앉힌 본론이 뭔데?”

“…….”

수전노는 내 물음에 곧장 답하지 않았다.

두 명의 왕이 나간 문에서 내게로 고개를 돌린 수전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다시 도읍으로 돌아간 한세계 씨의 다음 계획을 여쭈어봐도 될까요?”

“……글쎄―.”

툭― 툭― 툭―

난 쇠 파이프 대신 손가락으로 원탁을 두드리며 말을 끌었다.

툭― 툭―

놈이 입가에 머금고 있는 묘한 미소와 비슷한 미소가 내 입가에도 피었다.

“웬만하면 당신한테 정보를 받아서 재벌가 도련님한테 했던 말을 지킬 생각이었는데.”

딱―!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프라이빗 룸을 울리는 경쾌한 소리.

부드럽게 두 손가락을 맞부딪친 수전노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가리켰다.

“바로 그겁니다. 그 계획을 저와 함께 진행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한세계 씨와 제가 애초에 이 자리의 목적이었던 동맹을 맺는 겁니다.”

“내가 왜?”

“왜냐니요―”

어깨를 으쓱이며 단번에 튀어나오는 물음.

그 물음에 아무렇지 않게 피식― 웃은 수전노가 나를 가리키던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애새끼랑―”

그리곤 그 손가락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딸랑이 졸부로서?”

연시우에게 함께 모욕당한 동지로서.

허나, 그리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에 비스듬히 꺾인 고개를 곧추세우지 않았다.

여전히 삐딱한 고개로 조용히 놈을 노려보는 시선.

그 시선을 마주하던 수전노가 오히려 더 환한 미소를 내지으며 뇌까렸다.

“그러면― 세 사람보단 두 사람에게 공구리당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 사람.”

“예, 이 원탁에서 한세계 씨를 제외한 셋. 그 셋에게 작업당하는 것보단 그 셋 중 한 명이 한세계 씨에게 붙는 게 더 승산이 높지 않겠습니까?”

“듣고 있으니 슬슬 협박처럼 들리네.”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이건 약간의 충격요법으로 최악의 상황을 말씀드린 거고, 일단 디폴트값이 두 사람인 건 변함 없으니 말입니다.”

이미 원탁을 벗어난 두 명의 왕.

연시우와 강해성.

그리고 수전노가 아무렇지 않게 고정하는 두 사람의 연합.

“에이~ 알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 두 사람은 동맹을 맺기 싫은 게 아니라 격 떨어지는 저희와 한배를 타기가 싫은 겁니다. 혹시 못 보셨습니까?”

수전노가 두 사람의 빈자리를 콕― 콕― 찌르며 말을 이었다.

“저희 몰래 짝짜꿍 신호를 얼마나 보내던지. 생사조차 모르던 때면 몰라도 이미 원탁에서 급에 맞는 사람을 발견한 이상, 그들은 무조건 힘을 합칠 겁니다. 이건 어떤 내기를 해도 좋습니다. 그냥 확정이에요, 확정.”

“그 두 사람의 동맹이 세 사람의 동맹이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뭐― 저도 거절당하면 제 살길은 따로 도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뭔 졸부론인지 뭔지 아주 일장 연설을 하면서 당신을 혐오하던 연시우 밑에 언제든 들어갈 수 있다?”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묻는 내 말에 수전노가 두 팔을 살짝 들어 요란하게 흔들었다.

“그 연시우가 또 저를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딸랑이.

종을 흔들 듯 요란하게 팔을 흔들어대는 수전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제 재능과 적성을 살린 천직이었죠. 이거 참 그렇게 생각하니까 무려 재벌가 도련님이 인정해주신 적성이네요.”

“그럼 그 천직을 살려 두 사람 밑에 들어가는 게 훨씬 더 수월할 텐데. 왜 굳이 나한테 동맹을 권하지?”

“글쎄요― 이왕 왕까지 됐는데 또 높은 분들 뒤치다꺼리하기 싫어서?”

“생각보다 이유가 너무 사소하네.”

“그러니까 진심인 거죠. 뭐 세계 평화니, 사회 복원이니 그런 거룩한 뜻보다 아주 조그마하고 사소한 이유가 인간의 진심이니까.”

그리고―

수전노는 여전한 미소로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렇게 마음이 잘 통할 파트너를 두고 굳이 두 사람 밑에 들어갈 이유가 있습니까?”

툭―

수전노가 나를 따라 하듯 원탁을 손가락으로 툭― 두드렸다.

그거 아십니까, 한세계 씨.

“저희는 생각보다 아주 많은 부분이 닮았습니다.”

“…….”

“아― 무슨 말씀을 하실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닮았냐고 물으시겠죠. 음― 대표적으로, 아― 이건 한세계 씨를 모욕하려 하는 말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대표적으로― 냄새가 납니다.”

수전노가 피식대며 헛웃음을 흘렸다.

연시우와 강해성에게는 절대로 나지 않을―

“밑바닥에서 살던 사람의 냄새.”

놈이 원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들어 나를 콕― 가리켰다.

“뭐 정말로 냄새가 난다거나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냥― 그 옷.”

놈이 내가 입고 있는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가리킨다.

“아무래도 연시우와 강해성에 비해 조금 강렬한 드레스 코드죠.”

놈이 말이 끝나자마자 뇌리에 떠오르는 연시우와 강해성의 착장.

멋들어진 정장을 입은 채로 나를 쭈욱― 훑는 연시우와 놈이 피식― 흘리는 비웃음.

난 그 두 사람과 비슷한 정장을 입은 수전노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활동하기에 훨씬 편한데 내가 왜 스스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지?”

“그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여유라고 하더군요. 귀티와 부티이기도 하고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수전노가 이번엔 자신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누군가 그랬던가요? 부자는 부자인 걸 숨길 수 있지만, 가난한 자는 가난함을 숨길 수 없다고.”

또 누군가는 그랬죠.

“아, 이건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명대사인데― 사람을 믿기 싫으면 상황을 믿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툭―

다시금 원탁을 두드리며 분위기를 환기한 수전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새로운 왕을 인정하기 싫은 이미 왕이었던 사람들.

그 새로운 왕을 처리하기 위해 손잡은 이미 왕이었던 연시우와 강해성.

그리고 그들의 표적이 된 밑바닥 출신들.

애새끼와―

졸부.

“어차피 수많은 나라들이 난립할 이 격동의 시대에서 그 누구도 영원히 혼자일 수는 없습니다.”

“함께 이 기나긴 레이스를 달릴 러닝메이트가 필요하겠죠.”

이미 재벌가 도련님과 벤처 기업가가 러닝메이트를 맺은 지금.

“여기서 저희가 러닝메이트를 안 맺을 이유가 있습니까?”

난 수전노의 동공을 조용히 마주하며 물었다.

“이 동맹으로 수전노 당신이 얻게 되는 이득이 뭐지?”

“……예?”

“이렇게나 열심히 나를 설득해서 얻게 되는 이득이 뭐냐고. 나야 연시우를 처리하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거린다고 치면, 당신은?”

수전노가 내 물음에 환한 미소를 내지으며 답했다.

“당연히 한세계 당신이 먹게 되는 케이크의 옆 케이크를 먹게 되겠죠.”

“새로운 케이크가 아니라 내가 들고 있는 케이크가 탐나는 건 아니고?”

세 왕의 도읍을 찾아올 수 있던 수전노의 정보력과 내가 가진 부분 무능이라는 감염 치료제.

어쩌면 내가 가진 능력 중 가장 강력한 능력을 알고 있다면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글쎄요― 한세계 씨가 숨기고 있는 카드가 무엇이든 저도 지금 제가 들고 있는 패가 상당히 마음에 들어서요. 바꾸고 싶은 생각이 안 드네요.”

“편견일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믿음이 안 가네. 당신 같은 부류들이 이리저리 간을 제일 잘 보던데.”

“그러니 더더욱 저랑 힘을 합치셔야죠. 간을 제일 잘 보니 분명 요리도 제일 잘 하지 않겠습니까?”

“……하―!”

결국 작게 치켜든 고개에서 헛웃음이 흘렀다.

휘― 휘― 고개를 내저으며 계속해서 잔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정말 러닝메이트가 필요한 것이든, 어떤 검은 속내가 있든―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었다.

수상한 꿍꿍이를 파악하는 즉시 후환을 없앨 생각이었으니.

“동맹의 유지 기한은?”

“어떻게 만년으로 하실까요?”

“…….”

“아― 이거 제가 좋아하는 영화의 명대사인데 잘 모르시나 보네요. 이제 이 영화도 모르는 세대가 온 것 같아서 조금 슬픈데요?”

끼이이익―!

수전노가 너털웃음을 내뱉으며 의자를 뒤로 끌었다.

“애초에 서로의 신뢰가 중요한 거지, 허울뿐인 기간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선선히 원탁 중앙으로 내밀어오는 손.

“서로 믿고 싶을 때까지만 믿는 걸로 하시죠.”

“……믿고 싶을 때까지만.”

“예, 말이 아닌 행동으로 계속 믿으실 수 있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끼이이익―!

난 수전노의 부드러운 미소를 바라보며 의자를 뒤로 끌었다.

원탁 중앙에서 맞은편 상대를 기다리는 손과 놈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순간―

수전노가 갑자기 빵― 터지며 큰 웃음을 내질렀다.

“아― 미안합니다. 생각해보니까 너무 웃겨서.”

내뻗지 않은 손을 이리저리 내저은 수전노가 서둘러 변명했다.

“한세계 씨와 저는 이제 엄밀히 말하자면 서로 다른 나라의 왕들 아닙니까? 원래 이런 자리에는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아주 난리가 나야 하는데.”

수전노, 재벌가 도련님, 벤처 기업가, 한세계.

모두가 대한민국의 국민이었지만, 이젠 서로가 서로의 이방인이 된 서울.

“분명 기사 헤드라인도 이렇게 떴을 겁니다. 지금부터 애새끼와 수전노의 유쾌한 반란이 시작된다!”

“…….”

수전노가 내민 손을 향해 다가가다 멈칫거리는 손.

놈이 지껄인 말에 와락― 찡그린 표정이 놈에게로 향한다.

“어― 마음에 안 드시는구나. 그럼 이건 어떠세요?”

수전노가 내밀고 있는 손을 더 활짝 펴며 속삭였다.

난 그 속삭임에 옅은 미소로 답하며 내밀고 있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턱―!

“도련님과 벼락부자를 케이크처럼 쉽게 먹는 법.”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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