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112화 (112/120)

새장 속 강아지 (4)

침실이라는 단 하나의 용도로 쓰기엔 애초에 너무 넓었던 차설희와 나의 침실.

달그락―!

난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침 식탁을 살폈다.

고급스런 자수가 새겨진 접시들에 담겨있는 요리라기보단 조리의 영역을 거친 다양한 음식들.

그 음식들을 얌전히 집어 올리는 자매들의 젓가락들을 바라보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빗방울을 토해내는 우중충하고 흐릿한 하늘.

“정말 오늘도 내려가려고?”

다시 식탁으로 고개를 돌린 뒤 내뱉는 물음에 차설희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한 번에 해결할 순 없을 것 같아요.”

하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고개를 주억이는 차설희.

난 그녀의 대답에 표정을 찡그리며 눈가를 좁혔다.

“고자한테 듣기론 오늘 설희 네가 내려가도 별로 달라질 게 없는 사이즈라던데.”

“……그쪽 분들이 저를 조금 낯설어하고 경계하는 중이긴 한데 그래도―”

“비협조적인 걸 넘어서 그냥 아예 입을 꾹 다물고 너를 투명 인간 취급한다던데…….”

그녀의 말을 끊고 읊조리는 속삭임에 차설희가 입가를 가리던 손을 거두며 얼굴을 굳혔다.

옹알이를 하듯 연신 입술을 여닫지만― 유의미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그녀의 입술.

“……괜찮아. 상대 쪽이 아예 대화할 의지가 없는 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설희야.”

그녀를 다독이기 위해 속삭인 말에 오히려 그녀의 얼굴이 더 짙게 굳어갔다.

한순간에 아침 식사를 완전히 멈추고 안절부절못하는 차설희.

끼이익―!

난 식탁 의자를 조금 뒤로 끌며 파르르― 떨고 있는 그녀의 동공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툭― 툭― 작게 허벅지를 두드리는 손짓을 바라본 차설희가 천천히 의자를 뒤로 끌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익숙하게 내 허벅지에 앉는 차설희와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를 휘감는 손길.

난 잘록한 허리 너머에 있는 평평한 배를 주물거리며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괜찮다니까 왜 마음 아프게 그러고 있어.”

정말 괜찮아. 고작 그거 하나 실패한 게 뭐 심각한 일이라고.

계속되는 다독임에 그녀의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조금 어색한 미소.

그 미소에 따스히 웃어주며 살짝 내미는 고개에 기다렸다는 듯 보드라운 촉감이 나를 덮쳤다.

쪽― 쪼옥― 쪽―

그녀의 허벅지를 세게 움켜쥘 때마다 그녀의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야릇한 숨결.

정신없이 입맞춤에 몰두한 그녀의 배를 살살 어루만지던 손이 슬금슬금 그녀의 속살로 파고들던 찰나―

달그락―!

조용히 울려 퍼지는 수저 소리에 그녀의 입술이 그대로 입맞춤을 멈췄다.

입술을 떼고 살짝 내게 멀어지는 차설희의 동그란 눈망울.

“……하얀이가 보고 있어요.”

그녀의 상의를 어중간하게 파고든 채로 멈춘 내 손을 바라보며 차설희가 아주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난 뒤늦게 차하얀의 눈치를 보는 차설희에게 장난스레 웃으며 답했다.

“……뭐 어때.”

나지막한 읊조림과 함께 그대로 그녀의 속살에 파고드는 손길.

천천히 그녀의 배를 살살 쓰다듬는 손길에 차설희가 다시금 안절부절못하며 양쪽을 동시에 눈치 보기 시작했다.

“그럼 하얀이 네가 해보는 건 어때?”

차설희의 보드라운 뱃살을 어루만지며 뜬금없이 내지르는 물음.

내 갑작스런 물음에 밥공기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차하얀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도 그나마 그쪽 사람들이랑 친분이 있는 게 처제잖아.”

“말도 안 돼요! 이제 막 감기 기운에서 벗어난 애라 컨디션도 안 좋을 텐데 그런 위험한―”

차하얀보다 더 깜짝 놀라며 황급히 소리치는 차설희.

허나, 그녀의 항변을 듣고 있는 내 눈빛이 낮게 가라앉을수록 그녀의 목소리도 함께 가라앉았다.

“……저는 그냥 그럴 것 같아서…….”

이내 입술을 웅얼거리며 작게 고개를 숙이는 차설희에게 흘러나오는 속삭임.

난 다급히 내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배를 다시 쓰다듬으며 옅게 미소 지었다.

“설희 네가 뭘 얘기하려는 지는 잘 알겠어.”

그래도―

“당사자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니까.”

여전히 휘둥그레진 눈을 거두지 못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차하얀.

“하얀이 네가 농과대 여성 캠프원들을 설득해보는 게 어때?”

난 그 잘게 떨리는 눈망울을 지그시 바라보며 연이어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쪽이 하얀이 너까지 투명 인간 취급하진 않을 거 아니야?”

“…….”

그녀는 내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내뱉지 않았다.

그저 석고상처럼 경악과 당황만을 내보이며 딱딱하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

“……싫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금 재확인하는 그녀의 의사.

왠지 모르게 차게 식어버린 말투와 살짝 찡그린 얼굴.

그 변화를 마주한 차하얀이 다급히 삐걱거리는 고개를 휘― 휘― 내저었다.

“……그래?”

마지막으로 다시 묻는 말에 이번엔 차하얀이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여왔다.

난 그제서야 굳어가는 표정을 풀고 그녀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임무.

한순간에 너무 크게 달라진 위치와 그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농과대 여성 캠프원들.

같은 캠프원이라는 울타리를 먼저 벗어난 이탈자들과 연쇄되어 죽어버린 그 캠프의 리더들.

차설희는 물론, 차하얀에게도―

아니, 차하얀에게는 더더욱 확실하게―

절대 성공할 수가 없는 임무였다.

“그래, 하얀이 너라면 분명히 잘해낼 수 있을 거야.”

성공해서는 안 되는 임무였다.

***

“……오, 오랜만이에요― 언니들.”

농과대 여성 캠프원들에게 차하얀이 힘겹게 건넨 첫마디였다.

도서관 주거 구역의 최하층이라 할 수 있는 도서관 2층의 사서 사무실.

마지못해서라기보단 강제적으로 대화 테이블에 앉힌 농과대 여성 캠프원 대표들과 마지막까지도 벌벌 떠는 몸을 숨기지 못하고 사서 사무실에 들어간 차하얀만의 공간.

난 주위 사람들을 전부 물린 2층을 휘둘러보며 사무실 문 옆의 벽에 등을 기댔다.

“……이, 이 자리는 언니들을 돕기 위해서 마련된 캠프의 공식적인 자리에요. 언니들이 바라는 요구 사항은 웬만하면 전부 들어주시겠다고 형부― 아, 아니― 이곳의 캠프 리더인 한세계 씨가 저한테 약속하셨어요.”

난 내겐 너무나도 선명히 들리는 사무실 안의 목소리를 들으며 팔짱을 낀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너무 슬픈 일은 너무너무 아, 아프겠지만 저희가 함께 버티면서― 캠프에서 부여하는 일과를 수행해주시기만 해주신다면 한세계 씨가 아니더라도 제가 어떻게든 언니들이 더 편하게 지내실 수―”

“하얀아.”

고자의 보고로는 아주 벙어리가 따로 없었다던 농과대 쪽이 처음으로 내뱉는 말.

“그걸 우리가 어떻게 믿니?”

차하얀의 말을 가볍게 끊은 가시 돋친 물음이 농과대 쪽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넌 오늘 우리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니, 하얀아?”

“……네?”

“오늘 아침에 그 배신자 새끼들이랑 수색조가 우르르 내려와서 우릴 강제로 일렬로 세웠어.”

“…….”

“기분 나쁘게 우릴 한 명씩 쭉 훑어보더니 배신자 새끼 중에 한 새끼가 수색조에게 갑자기 귓속말을 속닥거리더라고.”

그 새끼가 뭐라 속닥거렸는지 알아?

성대를 파르르― 떨며 묻는 말에 녹아있는 분노.

“……나도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 그런데 그 귓속말을 듣고 수색조가 우리한테 다가오더라고. 아니, 희주한테 가서 뭐라 했는지 알아?”

내짓는 헛웃음에 흠뻑 담겨있는 선명한 역겨움.

“내일부터 6층에서 살 게 될 테니까 미리 챙길 거 있으면 챙겨놓으래. 넌 이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니, 하얀아?”

쿵―!

작게 탁자를 내리치는 주먹질이 사무실에 울려 퍼진다.

“넌 이게 21세기에 가당키나 한 짓으로 보이니? 그런 사람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비인도적이고 야만적인 짓을 벌이는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점차 높아지는 성량과 아무런 대답이 없는 차하얀.

벽을 사이에 둔 탓에 사무실 안이 보이진 않지만, 저절로 몸을 오들오들 몸을 떨고 있을 차하얀이 선명히 그려졌다.

“도윤 선배에게선 상상도 할 수 없던 이런 미치광이 살인마들에게 말도 안 되는 짓을 당하는 동안 코빼기도 비추지 않다가 인제 와서 뭐라는 거니 정말?”

“…….”

“도대체 희주가 창녀처럼 지목당할 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하얀아?”

“혹시 모르지.”

먼저 울분을 토하고 있던 여성 캠프원의 말을 연잇는 다소 걸걸한 목소리.

“이미 지목당해서 위층에 있는 걸지도.”

“……네?”

“아니 그냥― 느낌상 그렇다고 느낌상.”

김한별.

이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고자의 보고대로라면 이 여성 무리의 리더 역할을 하는 일종의 ‘큰언니’였다.

“야, 차하얀.”

“……네.”

“난 우리가 꽤나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만 착각한 거였니?”

“……아, 아니에요, 언니.”

“우리, 아니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밤에 모여서 서로 힘든 일 이야기하면서 울었던 건 이제 다 잊어버렸니? 우리 그때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잖아.”

“아니에요― 다 기억하고 있어요, 언니.”

“언니 언니 하면서 살가운 척은 다 하고 지금 이 상황은 뭔데? 왜? 대단한 셀럽이신 하이퀸즈의 차하얀 양한테 나는 같이할 급이 안 되는 사람이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정말 아니에요, 언니.”

파르르― 떨고 있는 차하얀에 비해 너무나도 담담한 김한별의 목소리.

“네 언니가 총장이니 총장 사모님이니 하면서 기괴하게 사는 건 이해해. 그 사람은 원래 그쪽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넌 그러면 안 되지. 난 정말 네가 왜 우리 맞은편에 앉아있는지 이해가 안 되네?”

아주 뾰족하게 날을 세운 칼날이 계속해서 차하얀에게 쏘아지고 있었다.

“네가 위에서 공주처럼 지낼 동안 우린 어떻게 지냈는 줄 알아?”

“…….”

“아주 대놓고 우릴 투명 인간 취급해. 축제니, 뭐니, 제들끼리 술판을 벌이면서 우린 이런 사무실에 강제로 박아놓고 나오지도 못하게 막고 하다못해 다른 사람들이랑 말이라도 섞으려 하면 말을 걸기도 전에 알아서 도망치고 사라져. 무슨 지령이라도 받은 듯이.”

……오.

난 김한별의 예리한 통찰에 감탄하며 천장을 바라보던 고개를 작게 까딱였다.

“그리고 오늘은 희주가 배신자 새끼한테 지목당하기까지 했어. 제 형들 등에 칼을 꽂은 짐승 새끼들한테 팔려 가게 생겼다고.”

야― 누가 희주한테 빨리 티슈 좀 건네줘. 빨리, 얘들아.

김한별의 말이 꼬리를 물수록 더 짙게 들려오는 훌쩍임과 도중에 그녀들에게 서둘러 지시하는 김한별.

킁―!

휴지에 희주로 예상되는 이가 코를 푸는 소리와 계속되는 훌쩍임이 울려 퍼진다.

“……정말 하이퀸즈 때 진짜 팬이었는데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어. 정말 사람이 왜 이렇게 영악하니?”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죽었어. 그 죽은 선배들이 지금 이 광경을 어떤 심정으로 보고 있겠니?”

“정말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잔인하니? 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죄책감도 없어?”

계속해서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차가운 말들.

그 말들에 단 한 번의 대답도 내뱉지 못하는 차하얀을 엿들으며 새삼스레 헛웃음을 내지었다.

차하얀의 아주 내성적인 성격과는 별개로 농과대 여성 캠프원들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직설적인 매도를 내뱉을 수 있을까?

그녀도 인지하다시피 총장 사모님이라고까지 불리는 차설희의 여동생에게 어떻게 저렇게까지 겁 없는 말들을 지껄일 수 있을까?

순간, 진지하게 생각하던 머리를 한 번에 지우며 더 진한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렇게까지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지금 이 사태까지 상황이 악화되진 않았겠지.

또한 사람들은 아주 자주 언젠간 반드시 닥칠 미래보다 잠깐의 분풀이를 더 소중히하며 행동하곤 한다.

나 또한 그랬던 적이 아주 많으니 지금 여기서 그녀들을 욕하는 것도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나 다름없겠지.

“정말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네가 납치당한 이후로 제대로 얼굴 한 번 피고 웃는 걸 못 봤던 선배들이야. 그렇게나 너를 애지중지하고 아껴주던 사람들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죄, 죄송해요― 언니.”

끼이익―

김한별의 말을 끊으며 다급히 울리는 의자 끄는 소리.

“죄송해요― 죄송해요 언니― 이, 일단 아니― 나, 나중에―”

울음기 섞인 중얼거림을 어버버 거리며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는 차하얀.

“……저거 봐. 아주 아이돌다우시게 예쁘게 눈물 뚝― 뚝― 흘리면서 쪼르르 도망치는 것 좀 봐.”

문이 닫히기 전에 함께 새어 나오는 비아냥에 문 옆에 있던 나를 발견하곤 휘둥그레진 눈이 더 크게 벌려지며 파르르― 떨려왔다.

조심스레 사무실 문을 닫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물기 가득한 촉촉한 눈망울.

조용히 대화할 수 있게 나 또한 잠시 사라져주겠다는 약속을 어긴 나를 가리키는 오똑한 콧날 끝의 붉은빛.

“……죄송해요, 형부.”

울음을 참기 위해 잔뜩 구겨진 얼굴에 가녀린 미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열심히 해보려 했는데…….”

아직 언니들이 저를 조금 미워하고 계셔서…….

아무렇지 않으려 호선을 그리는 눈가 덕분에 끝내 다시 또르르― 흘러내리는 작은 눈물방울.

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내 양팔이 벌려지자마자 그대로 내게 달려오는 차하얀.

난 내 몸을 꽉― 끌어안고 몸을 부르르 떨어대는 차하얀의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작게 속삭이는 다독임에 그녀가 천천히 내 가슴에 눈물 젖은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정말 이래서 TV를 보이는 대로 믿으면 안 돼. 애초에 연예인들 이미지 자체가 그냥 다 만들어진 거라니까. 사람은 인간 대 인간으로 직접 만나봐야 진짜 본성이 나온다고.”

지금껏 내가 그녀들의 대화를 다 들었다는 걸 알려주듯 벽 뒤에서 흘러나오는 뒷담화.

난 더 강하게 가슴을 비비적거리는 그녀의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사무실 벽을 응시했다.

아니, 그 너머의 한 여성을 지그시 바라보며 웃었다.

김한별.

그 예쁜 이름처럼―

입도 고왔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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