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묵자흑 (2)
따사롭게 테이블을 감싸는 조금은 쨍쨍한 햇빛.
난 커피가 담겨있는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을 바라보다 맞은편의 린네아를 응시했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몸을 거의 완전히 돌려 침실 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간 침실 문에서 마주치는 맑은 눈동자.
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차설희의 눈가가 배시시 맑은 눈웃음을 그렸다.
나와 린네아를 번갈아 응시하며 무언의 응원을 보내는 눈동자.
쿵―!
그렇게 침실 문이 닫히고 조금 오랜 시간 뒤에 린네아가 삐걱거리는 몸짓으로 상체를 돌려왔다.
“…….”
숨소리도 내지 않고 허연 김을 토해내는 찻잔에 고정된 시선.
아주 어색함이란 어색함은 다 티 내고 있는 몸짓에 저절로 잔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차설희의 말대로 생김새로는 전혀 유추할 수 없는 소심함이었다.
그동안 방송이나 다른 미디어에서 그리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이유가 언어상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니.
“조금 우습네요.”
“……네?”
잔웃음이 섞인 말문을 열고 나서야 찻잔에 고정했던 시선을 드는 린네아.
난 드디어 마주친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조금 뻔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설희랑 하얀이에겐 안 하던 짓을 하려니까 너무 어색해서.”
“……네?”
“그냥 그 두 사람한테 하던 대로 편하게 말할게.”
“……네?”
린네아가 고장 난 녹음기처럼 똑같은 물음을 반복했다.
난 점점 차설희가 내게 안겨 왔을 때와 비슷한 표정으로 변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댔다.
후룩―
한결 편해진 자세로 한 모금 들이켜는 커피.
잔 받침에 찻잔을 다시 올려놓기 위해 살짝 숙이는 시선에 아직 대화의 갈피를 잡지 못한 린네아가 담겨온다.
“그래서―”
다시 부드럽게 여는 말문에 내게 돌아오는 린네아의 벽안.
“아주 무시무시한 한세계의 노예수용소를 관람한 감상은 어때?”
난 일부러 잔뜩 힘을 준 억양과 장난기 어린 미소로 그녀에게 물었다.
“…….”
내 질문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는 린네아.
난 차설희가 안내했던 도서관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을 린네아를 차분히 기다렸다.
“……그, 그렇게 무시무시하지도 않았고, 노예수용소 같지도 않았어.”
“하얀이 납치도 오해라는 걸 당연히 들었을 테고.”
린네아의 대답을 보충해주며 태연하게 으쓱이는 어깨.
그런 내 모습을 제법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던 린네아가 조용히 손을 뻗었다.
탁―!
갑작스레 허공을 튀어나와 린네아의 손에 잡히는 유리병 하나.
황금색 빛무리가 담긴 유리병을 옅게 흔든 그녀가 내게 물어왔다.
“그, 그래서 이거― 이게 정말 감염을 치료해주는 약품인가요? 아니― 야, 약품이야?”
마치 편해진 내 말투에 질 수 없다는 듯이 이를 악물고 반말을 계속해오는 그녀.
난 자신이 말해놓고 오히려 자신이 더 어색해하는 린네아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 그럼 이걸 먹으면 감염에 면역이 되는 건가?”
“그 정돈 아니고. 감염을 한 번 무효화시켜주는 정도?”
물론― 중복사용도 당연히 가능하고.
설명을 이어갈수록 점점 더 휘둥그레지는 린네아의 눈망울.
마지막 덧붙임을 끝으로 멍하니 유리병을 바라보던 린네아가 조용히 읊조렸다.
“……말도 안 되는 능력이네.”
“운이 좋았지.”
우우웅―!
난 의례적인 겸손을 표하며 오른손에 부분무능을 불러일으켰다.
유리병에 담긴 황금빛과 내 손을 타고 피어오른 황금빛을 번갈아 보는 린네아의 시선.
“그나저나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응?”
“난 당연히 진위여부쯤은 확인하고 왔을 줄 알았는데.”
이능으로 만든 감염 치료제라니.
솔직히 처음 들으면 워낙 황당한 소리잖아?
린네아를 지그시 바라보며 살짝 기울이는 고개.
궁금함을 가득 담은 시선에 린네아의 얼굴에 당황이 스친다.
“……화, 확인할 시간이 없었어. 설희가 워낙 빨리 돌아가자 재촉하기도 했고, 애초에 설희가 건네준 거니까…….”
……퍽이나.
저 성격에 잘도 갑작스레 감염 치료제를 확인할 상황을 만들겠다.
그래도 이 문답으로 그녀가 기숙사 캠프를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운영’이나 ‘지배’라는 단어와는 아주 먼 사이일 확률도 농후했다.
기숙사 구역 임시 리더.
난 대학 북측에 표기되었던 그녀의 호칭을 다시금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뭐― 진위여부는 확인하기 싫어도 조만간 어쩔 수 없이 확인해야 할 순간이 올 테니까.”
“…….”
담담히 뇌까리는 내 말에 린네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얀이 납치, 있는 그대로의 우리 캠프, 마지막으로 내가 가진 능력.”
난 그 흐릿한 표정에 지금껏 나누었던 대화를 차분히 되짚어주며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서 더 증명해야 할 게 남아있나?”
“…….”
“이 정도면 남도윤 말고 나와 손잡아야 하는 이유로 충분할 것 같은데.”
조용한 읊조림에 린네아의 눈망울이 천천히 떨리기 시작했다.
난 그 눈망울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다음 말을 이어갔다.
“남도윤과는 더 이상 동맹을 유지할 이유가 없고, 이쪽은 이미 거의 한 가족이나 다름 없지 않나?”
설희, 하얀이 그리고 너.
“그 끈끈했던 하이퀸즈가 서로 싸워야 할 이유 자체가 없잖아.”
게다가―
난 끝말을 조금 길게 늘어트리며 여전히 그녀의 손아귀에 잡혀있는 황금색 빛무리를 가리켰다.
“미래를 생각해도 공중 부양이나 하는 서커스 능력보다는 내 능력이 훨씬 더 캠프원들에게 유용할 건 두말할 것 없고.”
“……장덕구.”
이어지는 설득을 조용히 끊어오는 한 이름.
“농과대에서 그 자식에게 고통받았던 사람들을 봤어. 정말, 정말로 위험하고 나쁜 사람이야, 그 사람.”
“…….”
“죽일 거지? 아니, 죽이진 않더라도 벌을 주거나 곁에 두진 않을 거지?”
마지막 물음이었다.
틀림없이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린네아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백군에서 흑군으로 피아를 뒤바꾸겠지.
평소의 심성을 보여주듯 조금은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린네아.
난 그 눈빛을 마주 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뭐?”
“절대로 안 죽여. 오히려 장덕구를 죽이려 하는 놈을 내가 어떻게든 죽여버릴 거야.”
“……뭐라고?”
한 순간에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떨려오는 그녀의 벽안.
난 그 충격을 덤덤히 응시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식량은 절대 무한하지 않아.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급속도로 줄어들겠지. 너도 나와 비슷한 입장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알 거야.”
“…….”
“그렇게 줄어들기만 하는 식량 속에서 장덕구의 벌레 조종 능력은― 즉, 양봉을 가능케 하는 이능력은 아주 소중한 능력이야.”
앞으로 식량 상황이 어떻게 급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꿀이라는 식량은 미래를 도모할 수 있게 하는 아주 좋은 옵션 중의 하나였다.
“장덕구? 그 쓰레기 새끼는 죽어 마땅한 짓을 했으니 당연히 죽여도 상관이 없지. 하지만 문제는 놈을 죽이면 놈이 가지고 있는 능력 또한 사라진다는 게 문제야.”
그게 진짜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지.
툭―!
난 테이블을 체크하듯 가볍게 손가락을 테이블에 두드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장덕구는 카드 게임으로 따지자면 이미 메이드된 아주 쓸만한 패야.”
“…….”
“그리고 우린 손에 들고 있는 카드로만 게임을 진행해야 해.”
툭―!
다시 한번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
“안 그래도 뒤죽박죽 아주 엉망으로 망해버린 세상이야. 딜러가 언제 새 패를 건네줄지도 모르는데 내 손에 들린 확실한 카드를 버린다?”
……하!
생각만으로 절로 진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건 일부러 게임을 지기로 작정한 병신 새끼들이나 하는 짓이겠지.”
그리고―
“난 그런 병신 트롤러가 아니야, 린네아.”
그런 짓거리는 남도윤에게나 어울리는 아주 미련한 짓거리였다.
훗날 게임의 승패에 아주 치명적인 마이너스를 가져다줄지도 모를 위험천만한 도박.
그 도박을 아주 자랑스레 저지르며 내뱉는 말 또한 압권이었다.
“그렇게 해서 얻는 알량한 도덕심과 아주 쥐좆만한 사회 정의 회복보다 내 사람들이 먼저야.”
“…….”
“설희랑 하얀이가 굶어 죽는 미래보다 더 최악인 게 어딨어? 그런 미래의 가능성을 높이면서 얻는 게 고작 정의 실현? 지금 당장 부족한 식량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그런 헛소리를 내뱉는 게 오히려 더 무책임한 거 아닌가?”
린네아.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장덕구를 죽일 거야, 살릴 거야?
체크.
테이블을 두 번 두드리며 다음 순번에게 차례를 넘기는 신호.
난 일부러 내 손에 든 장덕구를 맞은편에 있는 린네아에게 넘겼다.
알게 모르게 차설희와 차하얀, 그리고 캠프에 속해있는 모든 생존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서.
“…….”
예상치 못하게 자신의 손에 들린 장덕구를 생각하며 눈가를 떠는 린네아.
아주 오랫동안 파르르― 눈동자를 떠는 린네아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숙여졌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 없이 한참을 고뇌하기 시작했다.
───────.
찻잔 위로 계속해서 피어오르던 허연 김도 사그라든 오랜 시간의 고민.
“……그래서.”
그 오랜 시간 끝에 린네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다음은 어떻게 할 건대?”
다음 계획을 묻는 조금 빙― 둘러온 대답.
난 다시금 의자에 등을 묻으며 고개를 든 린네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망울에 대고 천천히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것도.”
“…….”
“기숙사는 지금부터 아무것도 하지 마.”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했다.
“……아!”
허나, 뒤늦게 튀어나오는 아주 짧은 탄성.
난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다소 멍청한 표정이 된 린네아를 바라보며 다시금 미소 지었다.
“린네아.”
내 은근한 속삭임에 다시금 나를 바라보는 린네아.
난 그녀를 응시하며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기숙사가 아닌―
“너한테는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