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묵자흑 (1)
“잘 지내셨어요, 오빠?”
멍해진 정신을 일깨우는 여전한 미성.
남도윤은 돌덩이처럼 굳은 발을 한 발자국 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읊조렸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그건 또…….”
미처 완성되지 못하는 물음 끝에 다다르는 시선.
차하얀이 남도윤이 바라보고 있는 유리병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아― 이거요?”
우우웅―
투명한 유리병 안에 찬연히 빛나는 황금색 빛무리.
“한세계 씨가 혹시나 문전박대당할 수도 있으니 꼭 먼저 보여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셔서요.”
부드러운 미소로 유리병을 작게 쓰다듬은 차하얀이 들고 있던 유리병을 살짝 내밀어왔다.
“선물이에요. 한세계 씨가 도윤 오빠에게 보내는 화해의 선물.”
“……선물?”
“네. 오빠들이나 캠프원분들에게 정말 유용하게 쓰일 선물이에요. 이게 캠프에서 쓰고 있는 감염 치료제거든요!”
감염 치료제.
환한 미소로 목소리를 높이는 차하얀이 언급하는 명칭에 로비에 몰려든 농과대 캠프원들이 일제히 웅성거렸다.
누구나 다를 바 없이 동그랗게 커진 눈망울로 차하얀이 들고 있는 유리병을 바라보는 시선들.
그 중 유일하게 눈을 가늘게 좁힌 남도윤이 그녀가 내뱉었던 말을 되짚었다.
“……감염 치료제.”
기쁨도, 놀람도 없는 순수한 의심으로 가득 찬 눈초리.
그 눈초리를 유심히 바라보던 차하얀이 환한 미소를 가라앉히며 쓰게 웃었다.
“……오빠가 오해를 하고 계신다는 말은 이미 한세계 씨한테 들었어요.”
그래서―!
차하얀은 다시금 활짝 웃으며 자신의 뒤에 도열한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 오해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줄 사람들도 함께 왔어요!”
“…….”
“먼저 제 옆에 계신 분은 강청신 씨구요! 한세계 씨 말로는 말을 엄청 잘하신다고 궁금한 게 있으시면 이 분을 통해 여쭈시면 된다고 하셨어요!”
“헤헤― 안녕하십니까?”
달그락―!
차하얀의 소개에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네는 남성 생존자.
고개를 살짝 숙이기 위해 들썩이는 몸짓에 그가 메고 있던 가방이 옅게 흔들렸다.
그 안에서 들려오는 여러 개의 유리병이 부딪치는 소리.
“……한세계가 보낸 사람들을 통해 한세계를 믿으라고?”
여전히 가늘어진 눈가로 헛웃음을 토하는 남도윤.
그 얼굴을 주의 깊게 응시하던 차하얀의 얼굴이 옅게 굳었다.
“왜 그러세요, 오빠…….”
미소가 떠나간 얼굴로, 차하얀이 그와 시선을 맞췄다.
“오빠가 왜 그렇게 화나셨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저를 그만큼이나 걱정해주신 거니까 너무 감사하기도하구요. 그러니까 더더욱 오빠와 한세계 씨가 다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못 박힌 듯 발걸음을 멈춘 남도윤에게 내디디는 한 발자국.
차하얀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오빠가 알고 있는 사실들은 전부 다 오해예요. 저는 한세계 씨에게 납치당한 게 아니라, 설희 언니의 부탁을 받은 한세계 씨가 저를 데리러 오신 거예요. 물론 모두가 오해할만한 조금 거친 방법이었지만, 저를 보세요.”
툭―!
가슴에 얹은 손을 살짝 두드리는 손길.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멀쩡하잖아요? 게다가 도서관에서 그렇게 보고 싶었던 언니도 다시 만났어요. 저는 한세계 씨에게 피해 본 일이 단 하나도 없어요, 오빠.”
“……차설희 씨가 살아있다고?”
“예, 도서관에서 한세계 씨와 함께― 안전하게.”
……도서관.
그녀의 입에서 흘러드는 한세계의 본거지.
그 명칭을 되뇌자마자 머릿속에 그리운 얼굴들이 떠올랐다.
“태하랑 예리도?”
“네. 두 분 다 정말 다행히도 무사하세요.”
“다른 학생회 친구들도 모두?”
“……정말 안타깝게도 모두 다 무사하시지는 못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오빠.”
“……어떤 방식으로 무사하지 못하다는 건데?”
남도윤이 살짝 수그러진 차하얀의 눈망울을 지그시 응시했다.
“하얀이 네가 무사하다고 해서 한세계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야. 그런다고 이유진을 죽이고 장덕구를 수하로 부리는 게 정당화되진 않아.”
“……오빠.”
차하얀이 처음으로 남도윤을 응시하여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진을 죽인 건 한세계 씨도 어쩔 수 없었어요. 이유진이 캠프원들을 중독시켜 한세계 씨를 협박했다구요!”
점점 높아지는 차햐얀의 목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다른 분들이 위험해지기 전에 어쩔 수 없이 그러신 거예요. 하고 싶어서 하신 게 아니라, 필요해서 한 일이라구요!”
게다가―!
“장덕구 문제도 똑같아요. 그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능력이 너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안 그래도 그 사람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까 항상 붙어서 감시까지 하시는데 도대체 왜?!”
“정말 오해라니까요, 오빠. 오빠가 하고 계신 오해도 모두 한세계 씨에겐 이유가 있는 힘든 결정이셨어요!”
웅웅―!
로비를 타고 흐르는 높은 음색의 고함.
남도윤은 숨 고를 틈도 없는 고함에 붉게 달아오른 차하얀을 바라보며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나쁜 일엔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 그렇다고 그럴듯한 이유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나쁜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니야. 하얀아―”
“왜 계속 그렇게 나쁜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건데요?”
차하얀은 남도윤의 말을 끊으며 앞을 손가락질했다.
곧게 뻗은 그녀의 손가락에 담겨오는 낯익은 얼굴.
“이유진의 독에 당했었던 재하 씨가 이렇게 무사히 살아계신 게 나쁜 일이에요?!”
패닉에 빠졌던 캠프원들에게 들것에 실렸던 그 창백한 얼굴.
게거품과 반응 없는 동공이 보여주던 심각한 위험에서 벗어난 것도 어찌 보면 한세계의 공이었다.
자신에게 몰려드는 시선에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는 박재하.
차하얀은 박재하에게로 잠시 고개를 돌린 남도윤에게 눈가를 좁혔다.
“만약 오빠의 말이 다 맞다고해도 세상에 나쁜 짓 한 번 안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건 어떤 누구에게든 너무 가혹한 잣대잖아요?!”
“…….”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차하얀의 최선에 침묵을 유지하는 남도윤.
그렇게 남도윤의 대답을 기다리던 차하얀에게 기다리던 답이 흘러들었다.
“……너 지금 너무 낯설어, 하얀아.”
옅은 떨림을 내포한 답에 그녀의 눈망울이 함께 떨려왔다.
잠시간 시간이 멈춘 듯 눈망울만 파르르― 떨어대던 차하얀이 입술을 깨물었다.
“……오빠야말로 지금 너무 이상해요.”
눈망울의 떨림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좁힌 눈가.
“계속 꼬투리를 잡으면서 한세계 씨를 미워할 이유를 만들고 계시잖아요.”
“……넌 한세계라도 된 듯이 그 사람을 변호하고.”
“지금 여기 있는 건 한세계 씨가 아닌 오빠니까 당연하죠! 왜 지금 제 눈에는 한세계 씨가 아닌 오빠가 더 싸우지 못해 안달 난 사람으로 보이는 거죠?!”
날 선 눈빛이 그대로 남도윤에게 쏘아져 간다.
“막말로 그렇게 부딪친다고 오빠가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뭐?”
짧은 반문 뒤에 서서히 끓어오르는 감정.
불길이 담겨 이글거리는 눈으로 차하얀을 바라보던 남도윤의 입이 여러 번 열렸다, 다시 닫힌다.
끝까지 제어 없이 튀어나오려는 말들을 꾹― 눌러댄 그의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다음 말.
“……이것만 대답해줘.”
끝내 새어 나오는 말은 감정의 여파에 비해 너무나도 옅은 목소리였다.
넌 지금―
“돌아온 거야, 아니면― 보내준 거야?”
차하얀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를 또렷이 응시했다.
“보내주셨어요.”
그 사람 대신.
이어지는 말에 남도윤의 동공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를 내쫓거나 감옥에 가두실 건가요?”
자신에 비해 너무나도 담담한 그녀의 물음에 눈동자의 떨림이 멎었다.
차하얀을 마주 보고 그 물음에 대답하려는 찰나―
“에헤이― 둘 다 오랜만에 봤는데 분위기가 왜 이렇냐, 진짜―!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둘 다―!”
성준기가 어색한 웃음을 머금곤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툭―!
가볍게 남도윤의 어깨 위에 올려지는 두꺼운 손.
“야 갑자기 왜 그래? 네가 그러니까 오히려 내가 정신이 확 들잖아.”
성준기의 걱정 어린 속삭임에 남도윤의 몸이 작게 움찔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하얀아. 들어가서.”
툭―! 툭―!
부드럽지만 힘이 잔뜩 밀어간 손짓으로 자신을 밀어대는 성준기.
남도윤은 그 힘에 밀려 다시 계단을 오르면서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계단을 오르는 자신들을 따라 뒤늦게 발걸음을 움직이는 사람들.
그중 가장 마지막에 발걸음을 떼는 차하얀.
남도윤은 계단을 오르는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차하얀의 눈망울을 멍하니 응시했다.
항상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과는 조금 다른 날카로움.
그 처음 보는 눈빛이―
그 어떤 눈빛보다도 선명했다.
***
“꺄흑―!”
조금은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내게 안겨오는 차설희.
난 온몸을 던지듯 내게 안겨 오는 그녀를 꼭 안아주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풀썩이며 천천히 가라앉는 머릿결에서 흘러오는 샴푸향과 살냄새의 달콤한 조화.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셔도 계속해서 맡고 싶은 중독적인 체향에 그녀에게 파묻은 고개가 자연스레 비비적거렸다.
“꺄흐흑―!”
파고드는 고갯짓이 간지러운지 맑은 웃음소리로 살짝 몸을 떠는 차설희.
난 그제서야 그녀를 꽉― 안고 있던 손길을 잠시 풀고 그녀를 차분히 훑어보았다.
아주 꼼꼼히 그녀를 살피는 눈짓에 차설희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눈가를 좁혔다.
“거봐요, 내가 하나도 안 위험하다고 했죠?”
“뭐― 이번엔 인정.”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화답하는 진한 미소.
내 미소에 더 활짝 얼굴을 핀 차설희가 다시 내 몸에 파고들었다.
어리광을 부리듯 가슴을 쉴 새 없이 비비적거리는 그녀의 얼굴.
스윽― 스윽―
난 부드럽게 그녀의 머릿결을 쓸어 넘겨주며 앞을 응시했다.
“…….”
멍하니 나와 눈을 마주치는 금발의 여성.
안 그래도 큰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치켜뜨여있었고, 살짝 벌려진 입은 닫힐 기미가 안 보였다.
아주 크나큰 충격에 휩싸인, 어떻게 보면 다소 멍청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성 이능력자.
난 계속해서 차설희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인사에 선뜻 답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는 입술.
난 당황으로 점철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더 진한 미소를 내보였다.
린네아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