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94화 (94/120)

피아식별 (1)

[쟁탈전을 시작하기에 앞서 피아식별을 실시합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백군과 흑군은 적과 아군을 구분하세요.]

[05 : 00 : 00 : 00]

[04 : 23 : 59 : 59]

뒤이어 출력된 메시지들과 1초씩 줄어들기 시작한 제한 시간.

갑작스레 주어진 5일간의 피아식별 기간을 응시하던 중 다시금 메시지 알림음이 뇌리에 울려 퍼졌다.

띠링―!

[왕은 피아식별 기간 동안 상대편 영역을 침범하실 수 없습니다!]

[흑군의 왕은 속히 흑군 영토로 복귀하세요!]

[쟁탈전을 공지받은 위치를 감안하여 예외적으로 30분의 복귀 시간을 부여합니다.]

[30 : 00]

지금도 1초씩 줄어들고 있는 피아식별 시간 밑에 새롭게 추가되는 30분의 제한 시간.

[29 : 59]

툭―!

피아식별 시간과 마찬가지로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두 번째 시계를 바라보던 내게 둔탁한 착지음이 잇달았다.

“지금 하얀이는 어딨습니까―!”

공중을 부유하던 이능력을 멈추고 사납게 다가오는 남도윤.

“글쎄, 지금쯤 집에서 브런치나 조지고 있지 않을까?”

실소가 한가득 베여있는 대답에 놈의 얼굴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저랑 장난하십―!”

터엉―!

내 멱살을 잡아 올릴 요량으로 내뻗던 손을 튕겨내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남도윤이 완벽히 밀리는 순간 경고 메시지가 출력됐다.

[피아식별 기간엔 감염 외의 모든 폭력적 행위는 금지됩니다.]

강조하듯 여러 번 점멸하는 메시지에 진하게 가늘어지는 놈의 눈가.

“……잠깐만― 지금 말하고 있는 하얀이가 내가 아는 그 하얀인가요?”

잠시간의 소강상태를 뚫고 들려오는 린네아의 조금 어눌한 말투의 물음.

“당신이 하얀이를 납치했다던―”

“……맞네! 씨발, 맞네―! 비 오던 날 그 좆같은 뒷모습―!”

벽안으로 나를 노려보며 다가오던 린네아를 추월하는 우렁찬 목소리.

피 묻은 목검을 들고 있는 남자가 눈을 부릅뜨며 나를 손가락으로 찔러대고 있었다.

“이 인간 말종 새끼야―! 우리 하얀이―”

“가까이 오지 마―!”

내게 다가오고 있던 두 남녀를 서둘러 제지하는 고함.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두 남녀에게 남도윤이 급하게 들어 올린 손짓이 담겨왔다.

“……위험합니다, 린네아 씨.”

“…….”

고개를 돌려 린네아에게 경고하는 행태에 저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쉽사리 끊기지 않는 헛웃음에 다시 고개를 돌려오는 남도윤.

놈이 풍선 빠진 웃음을 토해내는 내 뒤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이를 제하더라도 당신 뒤에 있는 장덕구가 어떤 인간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놈의 시선을 따라가니 갑작스레 모인 시선에 어깨를 움찔거리는 장덕구가 들어섰다.

“장덕구.”

“……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남도윤의 호명에 어색한 미소로 버벅거리는 장덕구.

엎어졌던 땅바닥에서 일어난 장덕구가 불안감을 표하듯 한 시도 몸을 가만히 두질 않고 떨어댔다.

“장덕구가 노예처럼 부리고 강간한 여성들만 수십 명입니다. 그렇게 노예처럼 부려 먹고도 일이 마음대로 안 풀리니 그 사람들을 모두 버리고 도망친 무책임의 극치를 달리던 새끼입니다. 그건 알고 계십니까?”

“…….”

남도윤이 줄줄이 읊어대는 화려한 경력.

조용히 장덕구를 응시하는 시선에 놈이 필사적으로 내 눈길을 피하며 식은땀을 흘려댔다.

추하게 푸르르― 떨리는 볼살에 흔들려오는 놈의 굵은 땀방울.

난 다시 남도윤에게 고개를 돌려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내 밑에서는 그런 일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그런 일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럴 기회가 아직 안 왔던 거겠죠.”

“글쎄, 장덕구도 사람을 봐가면서 일을 벌이는 게 아닐까?”

남도윤을 바라보며 실실 흘려대는 잔웃음.

일부러 길게 늘어트리는 끝말에 남도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장덕구는 이유진과 함께― 잠깐.”

작게 읊조리는 속삭임과 함께 더 깊게 주름 잡히는 미간.

“……이유진은 어딨습니까?”

남도윤의 물음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갑작스레 튀어나온 이유진이라는 이름에 더 시퍼렇게 질리는 장덕구의 얼굴만 있을 뿐.

더 가파르게 떨리기 시작하는 놈의 볼살을 바라보던 남도윤이 낮게 뇌까렸다.

“……설마 죽였습니까?”

물음이라기엔 너무 단단한 확신으로 불꽃 튀는 동공.

“한세계 당신 정말 미쳤습니까?”

“죽일만한 년이니까 죽였겠지.”

“그 죽일만하다는 판단을 누가 합니까.”

그 누구도―!

숨 고를 틈도 없이 곧바로 튀어나오는 고함.

한 치의 미동도 없는 눈빛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 판단을 혼자, 그리고 한 번에 내릴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이어지는 끝말과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눈동자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 도덕심 가득한 딸딸이 멘트에 이유진이 감동의 눈물이라도 주룩주룩 흘렸을 것 같냐?”

난 샌님같이 뺀질거리는 놈의 얼굴을 노려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착한 어린이 상 앞에서 혼자 딸딸이치다 죽지 않아도 될 네 캠프원들이 개죽음당하면― 그때도 네 캠프원들 앞에서 그런 좆같은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한세계 당신보단 낫겠지. 내 캠프원분들이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당신이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캠프원들을 죽여대는 게 훨씬 빠를 테니까.”

“허― 무슨 근거로?”

“글쎄, 기준 없이 사람을 죽여대는 살인마에게 꼭 근거가 필요한가? 선이 없으니 선을 넘는다는 자각도 없이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되겠지.”

고개를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며 씹듯이 내뱉는 말.

난 고개를 살짝 비틀며 더 진하게 미소 지었다.

“이상하네. 암군은 내가 분명히 죽였는데 말이야. 속칭이 중복될 수도 있었나?”

“……속칭. 미안하지만 난 갑작스레 내려온 속칭에 자기 자신을 의태하는 자아 결핍자가 아니라서 말이야.”

내 표정을 진하게 노려보던 놈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내 오른손에서 습관처럼 까닥이는 쇠 파이프를 바라본 남도윤이 도발을 한껏 담은 미소를 내지었다.

“불편하고 갑갑하겠네. 그동안 별생각 없이 멍청하게 거슬리는 사람들은 다 죽여버리다가 이런 제한에 걸리니까.”

쇠 파이프 끝단에 묻어있는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

“지금도 갑자기 얻은 이능력만 믿고 손이 근질거릴 텐데 용케도 참고 있네.”

기다려.

“내가 당신과 장덕구의 미친 짓을 반드시 멈추게 만들 테니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남도윤의 의지로 충만한 눈동자에 저절로 처음의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 기나긴 대화에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난 처음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아쉽겠네.”

난 남도윤을 향해 손에 들고 있던 쇠 파이프를 까딱― 흔들었다.

“난 또 그 간단한 방법을 쓸 거거든.”

자신의 머리통을 쓰윽― 훑어대는 시선에 담담히 맞부딪히는 남도윤.

조금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남도윤이 작게 고개를 끄덕여왔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한세계 씨.”

서로 간에 오가던 날 선 말에 한껏 들끓었던 불길이 조금 옅어진 듯한 얼굴.

놈이 내 머리 위에 여전히 얹어져 있는 검은 왕관과 장덕구를 번갈아 응시했다.

“검은 놈 옆에는 검은 놈만 있는 거죠.”

“그 말은 하얀이가 들으면 엄청 슬퍼할 것 같은 말이네.”

“……당신.”

다시금 옅게 튀어 오르는 불길을 꾹― 눌러 담는 듯한 남도윤.

놈이 그 불길이 미처 잠들지 못한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읊조렸다.

“갑자기 왜 이런 피아식별이 시작됐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갱생이 불가능한 쓰레기라는 생각만 진해지네요.”

툭―!

지근거리에 다가왔던 몸을 돌려 자신의 캠프원들에게 돌아가는 남도윤.

“5일 뒤에 다시 뵙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캠프원들을 이끌고 사라지는 남도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절로 이죽거리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병신.”

5일 뒤라니.

“…….”

남도윤의 무리에 합류하면서도 계속해서 뒤를 응시하는 벽안.

난 점점 멀어지는 린네아의 푸른 눈과 계속해서 시선을 맞췄다.

이미 백군과 흑군으로 나누어진 세력에서 뜬금없이 시작된 피아식별.

……쟁탈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다.

툭―! 툭―!

멀어지는 백군을 바라보며 허벅지를 치대는 쇠 파이프.

난 까닥― 까닥― 흔들리는 쇠 파이프를 조용히 응시했다.

남도윤.

네가 내 블러핑에 속았든, 속지 않았든―

지금부터 아주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될 거다.

[14 : 38]

난 어느새 반절이 흘러간 제한 시간을 눈짓하며 몸을 돌렸다.

“…….”

마주치는 눈길에 쉴 새 없이 목울대를 꿀렁이는 장덕구.

난 앞에 펼쳐진 중앙도로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얼굴을 찌푸렸다.

“뭐하냐, 볼일 끝났으면 집으로 가야지, 덕구야.”

“……예, 옙―! 물론, 물론입니다, 관장님!”

띠링―!

[‘장덕구’가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복종 요인 : 생존을 위한 ‘아주 강한’ 버팀목, 폭력에 대한 ‘아주 강한’ 두려움 ……]

[왕권 : 330 -> 345]

정신이 번쩍 든 듯이 부산을 떨기 시작하는 장덕구와 갱신되는 상태창 메시지.

난 한 번에 꽤 많은 단계를 뛰어넘은 복종 상태와 또다시 푸짐하게 오른 왕권을 훑어대며 미소 지었다.

“모시, 모시겠습니다, 관장님―!”

비굴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신거리며 앞길을 가리키는 장덕구.

난 안 하던 짓을 시작한 장덕구를 바라보다 남도윤이 사라진 뒤편을 돌아보며 더 진한 헛웃음을 터트렸다.

……가시기 전에 이렇게 보너스까지 챙겨주시네.

***

끼이이익―!

“관장님, 관장니이임―!”

도서관 정문을 열자마자 로비를 메아리치며 울려오는 호들갑.

난 쏜살같이 내게 달려오는 고장훈과 로비에 도열한 수색, 타격조를 휘둘러보았다.

“상황은 갑자기 나타난 메시지를 통해 이미 파악했습니다. 그러니까―”

숨을 헉헉대면서도 빠르게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는 고장훈.

“그러니까 저희가 흑군이고 적은 백군! 관장님이 오시기 전에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냈습니다. 지금 당장 명령만 내리신다면―”

대략적인 상황은 메시지를 통해 알았지만, 자세한 상황은 아직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난 고장훈의 말을 끊으며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필요 없어. 뭔 피아식별 기간인지 뭔지가 시작됐으니까.”

“……예? 아니 이미 흑군과 백군으로 나뉘었는데 무슨 피아식별을…….”

“그 흑군과 백군이 고정된 역할이 아니라는 거겠지.”

“……예?”

내 옆에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덕구와 눈을 좁히며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고장훈.

난 조금 멀리서 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간부들에게 다시금 손사래 치며 말을 이었다.

“한동안은 이렇게 호들갑 떨지 말고 하던 과업이나 마저 수행해.”

“……예, 관장님.”

머리를 굴리던 와중에도 본능처럼 고개를 살짝 숙이는 고장훈.

난 놈을 바라보며 아직 끝나지 않은 다음 말을 속삭였다.

“하던 일은 마저 하면서 사람 몇 명만 골라와라, 고자야.”

“…….”

내 지시에 조금 고개를 숙이며 내 말에 귀 기울이는 고장훈.

“지금 캠프 생활에 아주 만족하는 사람.”

“캠프에 연인이 있는 사람.”

그리고―

난 내 말을 경청하는 고장훈과 로비 천장을 번갈아 응시하며 미소 지었다.

“캠프에 가족이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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