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92화 (92/120)

운명 충돌 (2)

“가, 감사합니다, 관장님.”

아주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복사실을 나가는 마지막 캠프원.

달칵―!

큰 소음 없이 닫히는 문을 끝으로 복사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

복사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나와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있는 차하얀.

달그락―!

이내, 차하얀이 왕권이 담겨 있던 유리병을 정리하는 소리만이 나지막이 복사실을 울렸다.

독 관련 이능력자와 벌레 관련 이능력자의 아주 절묘한 합작 공격.

애초에 대비가 가능한 영역인지도 불분명한 아주 뜬금없는 기습이었기에, 혹시나 또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불상사는 미리 막는 게 상책이었다.

그렇기에 전 캠프원들을 대상으로 다시 실시한 부분무능 주입.

장덕구를 굴복시킨 직후 이어진 기나긴 주입이 아주 늦은 밤이 되고 나서야 막을 내렸다.

달그락―!

난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차하얀의 백색 소음을 들으며 조용히 복사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위에선 한창 부분무능을 주입받은 캠프원들을 통솔하고 통제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혹시나 부분무능을 주입받지 못한 캠프원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부분무능을 주입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이중 확인을 거쳐야하니 더더욱 한가할 틈이 없겠지.

특히나 사무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고장훈이나, 고층 여성 캠프원들을 사실상 총괄하는 차설희는 아주 죽을 맛일 것이다.

“……꼭 그러셔야 했어요?”

달그락―

다시 재활용할 수 있는 유리병들을 보기 좋게 줄 세우는 손짓.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어요. 누군가의 제지나 벌이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구요.”

그래도…….

꼭 그렇게 필요하진 않은 소일거리를 반복하는 하얀 손이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로비에서의 한세계 씨는…….”

달그락―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이리저리 유리병 사이를 오가는 손길.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진 모르겠지만― 조금 과하셨어요.”

꼼지락거리는 손짓을 용기로 치환하듯 그제서야 끝말이 이어진다.

로비에서의 한세계 씨는―

“……너무 잔인하고 무서웠어요.”

하고 싶은 말이 이어졌다.

달그락―

할 말을 다 끝낸 듯 다시 유리병 정리에 몰두하는 차하얀.

난 의자에 앉아있는 차하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벽에 기댄 등을 일으켰다.

뚜벅― 뚜벅―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옆자리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레 바닥을 끄는 의자 소리에 고개를 돌려오는 차하얀.

“그렇게 무서운 사람한테 이런 말 하는 건 안 무섭고?”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장난스런 미소.

“…….”

허나, 전혀 화답하지 않는 그녀의 표정에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모든 일을 설명할 때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돼버렸어, 설하야.”

“…….”

좀비와 이능력의 출현.

기존의 말이 안 되던 상황을 말이 되게 만드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들.

“지금 당장 도서관에 운석이 떨어져도 뭐라 불평할 수 없는 세상.”

“기존의 즐비하던 위협은 그대로 있으면서, 온갖 기상천외한 위협이 새로 생긴 미친 세상.”

“우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한 발자국만 실수해도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낭떠러지에 매달려있는 거야.”

특히나―

난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는 차하얀을 바라보며 잔웃음을 흘렸다.

“내 실수는 훨씬 더 위험해. 어쩌면 내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게 그대로 끝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굳이 내 행동에 이유를 붙이자면, 그건 이미 충분한 위험에 더한 변수를 만들기 싫어서라고 하자.”

“…….”

여전히, 분명하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차하얀.

난 그 눈길에 다시금 웃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호명했다.

이유진.

“……이유진은 살려두기엔 너무 변수가 많은 이능력자야. 사람을 죽이는데 너무나도 효율적인 이능력을 가진 이능력자. 그 이능력을 제지할 수 있는 건 내 이능력뿐이지만 그렇다고 하루종일 내가 이유진 옆에 붙어있는 건―”

진하게 찌푸린 미간으로 고개를 내젓는 얼굴.

“게다가 이유진의 최종적인 목표는 도서관 그 자체였으니까― 살려뒀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악독한 수로 캠프원들을 위협했겠지. 눈에 뻔히 보이는 위협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보다 더 최악의 짓거리는 없어.”

그리고 다음으로―

“장덕구. 그 자식을 좀 과하게 괴롭힌 이유는―”

난 차하얀의 표현을 빌려 쓰며 천천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 자식이 우리 도서관에 꼭 필요한 이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야.”

유추하고 있던 능력만으로 이미 아주 무궁무진하게 쏟아져나오는 활용 방안들.

“우리 도서관을 더 나은 상황으로 만들어 줄 아주 특출난 능력. 설하 네 말대로면 이미 공대에서 노예를 부리며 왕처럼 지냈을 나날들.”

“따로 더 생각하지 않아도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너무 뻔하게 보이잖아.”

난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를 향해 헛웃음을 옅게 흘렸다.

“처음에는 고분고분할지 몰라도 점점 제 능력의 효용을 깨달을수록 막 나가기 시작하겠지. 캠프에 보탬이 되는 능력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다시 나와 협상하려 할지도 모르고.”

다시 말하지만―

“그런 소모적인 일에 우리 캠프의 역량을 소모하기엔, 아직 바깥에 산재한 위협들이 너무나도 많아.”

정문의 거대 변종 좀비, 중앙의 좀비 띠 그리고 그 너머의 또 다른 생존자들.

“그러니,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겁을 줘놓는 거지. 공포는 서열을 구별할 때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 감정이니까. 무엇보다 놈이 가진 첫인상에 그 공포를 각인시키는 게 아주 중요했어.”

누군가의 첫인상은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지속되니까.

“이 정도면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해 줄 수 있겠어?”

“…….”

조심스런 물음에 차하얀은 아무 말 없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달그락―

다시금 유리병을 바쁘게 오가는 손짓과 당황으로 꾸물거리는 입술.

“따, 딱히 이해를 못 하겠다는 의미로 했던 말은 아닌데요……. 저, 저는 그냥―”

생각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운 태도에 오히려 더 어버버 거리는 차하얀.

난 정리했던 유리병을 또다시 꼼지락거리는 차하얀을 바라보며 조용히 뇌까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고 있어야지.”

“…….”

“그런 사이잖아, 우리는.”

유리병을 달그락거리던 손짓을 멈추고 멍하니 돌려오는 고개.

난 긍정도, 부정도 내뱉지 않고 내게 눈을 맞춰오는 눈망울에 옅게 미소 지었다.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라, 필요해서 한 일이야.”

“…….”

“차설하, 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아이가 되기보단,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착한 아이가 되길 선택한 그녀처럼.

“그런 비밀을 너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첫 번째 농담과는 다르게 파르르 떨려오는 그녀의 눈망울.

난 그녀의 눈망울을 지그시 응시하며 주문을 외듯 다음 말을 속삭였다.

“사람은 그 누구나 여러 개의 가면을 가지고 살아가, 설하야.”

“…….”

“그 중엔 쓰기 싫어도 써야 하는 가면도 있어.”

일부러 아주 흐릿하게 입가에 머금는 미소.

아지랑이처럼 순식간에 흩어지는 미소에 내 얼굴을 응시하던 차하얀의 눈망울이 더 격하게 떨려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가면.

난 이 말을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차하얀의 눈을 아주 오랫동안 응시했다.

아주 좋은 성과이자, 보상이었다.

차하얀이 내게 꼭 그랬어야 했냐고 묻는 그 물음 자체가.

그동안 ‘착한 아이’로 살아가던 그녀에게는 아주 생소했을 부정적인 질문.

과하고, 잔인하면서, 무서웠다고 말해오는 솔직한 감상.

이 모든 것들이 내 앞에선 ‘착한 아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항상 쓰고 있던 가면 그 너머의 솔직한 관계.

서로만이 서로를 알고 있다는 기묘한 확신과 아주 은밀한 비밀들.

그녀는 이미 너무 진하게 내 빛깔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색깔로 물들어가는 자신.

“……그럼―”

그 변화를 알아차린 그녀가 내뱉을 물음은 오직 하나였다.

“지금 제 옆에 있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숨기지 못한 떨림으로 가득한 조심스러운 물음.

난 그녀의 눈망울을 마주하며 다시금 속삭였다.

“한세계.”

네가 지금 차하얀이 아닌 것처럼, 나도 지금은 관장님이 아닌 거겠지.

“내가 널 차설하라 부를 때, 차설하 너도 날 형부나 관장님이라 부르지 않았잖아.”

단 한 번도.

그동안 서로 간의 알게 모르게 금기시되던 호칭 문제.

아주 자연스럽게 차설희를 떠올리게 되는 형부라는 이름에 그녀의 눈망울이 더 가파르게 떨려왔다.

허나, 그녀의 동공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내게는 전혀 다른 광경이 보였다.

쉴 새 없이 파르르 떨리는 바짝 마른 입술과 이미 유리병을 꼭 붙잡고 있는 손길.

“그럼 이것도…… 지금 제 옆에 있는 당신도…….”

그녀는 언니가 다른 무언가를 걱정하고 있었다.

“……가면을 쓰신 건가요?”

아주 간절히, 이미 정해진 대답을 종용하는듯한 눈빛.

난 아무런 대답 없이 조용히 몸을 숙였다.

툭―!

천천히 아래로 쓰러지던 고개의 종착지.

난 푹신하게 내 뒷머리를 감싸주는 차하얀의 허벅지를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갑작스레 내려온 머리에 바짝 얼어있는 그녀의 허벅지.

가까워진 얼굴에 숨소리 하나 내뱉지 못하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너는?”

확실한 말이 아닌 어쩌면 너무나도 모호한 몸짓.

그 해석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그녀의 몫이었다.

“…….”

조용히 긴장을 풀어가는 허벅지에 더 푹신하게 가라앉는 뒷머리.

어두컴컴한 시야에도 내 얼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던 찰나―

스윽―

조심스레 내 머릿결을 정리하는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스윽― 스윽―

가녀린 손가락이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내 머릿결을 쓸어내렸다.

자연스레 온몸에 긴장이 풀리는 노곤한 감각.

난 편안한 숨을 내쉬며 더 깊게 눈을 감았다.

***

어제의 난장판이 꿈이었다는 듯 말끔하게 빛나는 도서관 로비.

난 쨍쨍한 햇빛이 내려앉는 운반 차량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오늘부터 사범대 쪽도 작업 시작해.”

“예, 관장님.”

이유 모를 캠프원들의 발작으로 외부 활동을 금지한 후, 우리도 마냥 놀지는 않았다.

외부 수색을 하던 인력까지 모두 집중되었던 도서관 리모델링.

덕분에 지하 1층까지 대략의 용도대로 도서관 리모델링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이제 도서관이 아닌 가까운 사범대로 작업 반경을 늘릴 타이밍이었다.

“오늘 사과대 확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사범대 리모델링은 고자 네가 알아서 첫 단추부터―”

열심히 내 말을 경청하던 고장훈에게 지시를 내리던 내 눈가에 걸려 오는 얼굴.

난 고장훈에게 내리던 지시를 멈추고 엉기적거리기 바쁜 멍청한 얼굴에 다가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헤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관장님!”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 관장님―!

아주 눈치 빠르게 허리를 숙이고 멀어지는 고장훈과 창백히 질린 얼굴로 다가오는 장덕구.

난 다가온 장덕구에게 친근하게 어깨동무하며 다시 도서관 밖을 응시했다.

“저, 저― 관장님…….”

내 갑작스런 어깨동무에 바들바들 떠는 입술을 여는 장덕구.

놈이 어제의 여파로 시퍼렇게 멍이 든 이마를 내보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 그으― 해독제는 언제쯔음…….”

하긴, 그 누구보다 이유진의 독이 어떤 독인지 알고 있으니 아주 똥줄이 지리게 타겠지.

난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식은땀을 줄줄 흘려대는 놈에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잘한 게 뭐가 있다고 벌써 해독제를 줘야 하는데? 이 새끼가 들어온 지 하루 만에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하네.”

벌써부터 빠졌냐?

툭―!

조금 강하게 어깨를 짚는 손길에 놈이 팔짝 뛰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관장님―! 그냥, 그냥 편하실 때―! 편하실 때 주십쇼―! 그, 그으― 여왕벌―! 일단 관장님을 위해 여왕벌부터 왕창 모아오겠습니다―!”

이제야 마음에 드는 대답을 쏟아내는 장덕구.

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놈의 능력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전용 스탯인 ‘벌레 각인’이 높아질수록 더 높은 단계의 더 많은 벌레를 조종할 수 있다?”

“저, 정확하십니다, 관장님! 아주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그 전용 스탯을 어떤 방법으로 올려야 되는데?”

“다, 다양한 벌레를 수집하고 길들이고 또 키울수록 ―”

“씨발― 뭔 벌레몬스터냐?”

짜증이 가득 담긴 일갈에 자라처럼 목을 쑥― 끌어당기는 장덕구.

난 눈알을 열심히 굴려 나를 데굴데굴 응시하는 놈의 눈깔을 보다 가볍게 혀를 쳐댔다.

쯧―!

“일단 벌레를 조종하기에 앞서 먼저 여왕벌을 잡는 것부터가 일이겠네.”

“…….”

계속해서 내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장덕구.

끼이이익―!

그 순간, 내부 계단 문이 열리며 준비를 마친 수색조원들이 서둘러 로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있는 힘껏 달려와 내 앞에 도열하는 수색조원들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갈색의 야구 배트.

난 어떤 건 짧고, 어떤 건 또 길고 아주 뒤죽박죽이던 무장에서 드디어 단일화된 수색조의 무장에 작게 고개를 주억이며 정문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갑작스런 독 능력자의 기습에 움츠러들어야 했던 3일.

오늘은 그 3일 동안 미처 완수하지 못한 남측 점령을 끝맺음 짓는 날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측에 남은 단과대 단 하나.

사회과학대학.

남은 단과대를 점령하며 장덕구가 조종할 벌레도 수색하고―

마지막으로 이제 진출해야 할 북쪽을 가로막고 있는 좀비 웨이브를 처리할 방법 또한 강구해야 했다.

“일단 벌레몬고나 하러 가자, 덕구야.”

“……예, 예, 관장님!”

끼이이익―!

난 엉거주춤 어색하게 나를 따르는 장덕구를 어깨동무로 이끌며 도서관 정문을 천천히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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