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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 폭군-77화 (77/120)

착한 아이 (4)

원래라면 과방에서 밤을 샌 학생들과 기숙사 통금 시간에 걸린 학생들이 자주 이용했을 다소 불편한 간이침대.

비 오는 날 특유의 쿰쿰한 땅 냄새와 여전히 서늘한 밤공기.

투둑― 투둑― 투둑―

차하얀은 창문에 방울지는 빗물을 조용히 바라보며 과방에서의 두 번째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끼에에에엑―!

분명 빗소리만 홀로 울리는 적막에도 그녀의 귓가에 선명히 울려오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차하얀은 아직도 그녀의 망막에서 떠나질 않는 기억들을 강제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세계의 등에 업혀 그와 함께 보았던 엄청난 수의 좀비들과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왠지 모르게 기쁜 표정의 좀비들.

얼굴이 완전히 찢겨 입가가 귀까지 찢어지는 좀비.

팔 한 짝이 없거나, 다리 한 짝이 없는― 심하면 허리가 반쯤 파먹힌 상태로―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쉽게 넘길 수 없는 결손을 단 채로도 아무렇지 않게 필사적으로 달려오던 그 좀비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창문에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을 통해 다시 그녀에게 맺혀온다.

마치 어둑한 과방의 창문이 스크린처럼 계속해서 아침의 공포를 그녀에게 상영하고 있었다.

허나, 차하얀은 그 끔찍한 광경에도 여전히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았을 때 떠오르는 광경보다 유리창에 비쳐오는 광경이 더 흐릿했기에― 그녀는 뜬 눈으로 흐린 창문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하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아주 옅게 내뱉는 과호흡과 여전히 쿵쾅대는 심장.

끼에에에엑―!

또다시 그녀의 귓전을 울리는 울음소리에 차하얀이 다시 간이침대에 뉜 몸을 뒤척였다.

스으윽―!

몸을 반대편으로 돌리는 와중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스치는 맨살과 이불의 부딪힘.

차하얀은 이 와중에도 그 소리가 너무 부끄러워 작게 입술을 꾸물거렸다.

꼬옥― 이불을 쥐는 그녀의 눈앞에 펼쳐지는 자욱한 어둠.

그나마 먹구름에 가려진 달빛이라도 스며들던 창문에 비해 너무나도 어두운 반대편에서 그녀는 흐릿한 칸막이를 응시했다.

아니, 그 너머에 있을 누군가를 바라보며 속삭일 수밖에 없었다.

“……한세계 씨?”

모든 게 무서울 때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이 홀로 있다는 걸 주지시키는 적막이었으니.

“왜.”

그녀의 부름에 바로 답해오는 다소 귀찮음이 섞인 건조한 목소리.

이상하게 그리 곱게 느껴지지 않는 대답에 작게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아주 어색한 물음을 다시 그에게 건넸다.

“……뭐, 뭐 하세요?”

“어― 글쎄. 잠이 안 와서 계속 칭얼거리는 처제 말 상대?”

태평하게 답하는 한세계의 목소리에 짙게 깔린 잔웃음.

뭐가 웃기다고 대답이 끝나고도 한참을 계속해서 웃어대는 저음에 차하얀의 눈이 더 가늘게 좁혀졌다.

“농담이고. 그냥― 내일은 반석교회 말고 어느 쪽으로 가야 안전할까 같은 이런저런 생각?”

“…….”

“그러니까 차설하 너도 그만 뒤척거리고 슬슬 자는 게 좋을걸? 벌써 세 시간이다, 세 시간. 네가 그렇게 잠도 안 자고 뒤척거린 거.”

……차설하.

차하얀은 한세계가 계속해서 불러대는 잘못된 이름을 되뇌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차하얀이 아닌 차설하.

분명 자신의 이름이 아닌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이름이기에 더더욱.

그래서 그녀는―

“……신기하네요.”

신기하고―

“분명 차설하는 제 이름이 아닌데― 이상하게 제 이름 같아요.”

또 복잡했다.

“처음이거든요. 그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들은 건…….”

칸막이 너머를 응시하는 차하얀의 입가에 옅은 쓴웃음이 맺혀왔다.

“아빠가 정말 무지무지 싫어하셔서 가족들 사이에서도 엄청 쉬쉬하는 비밀인데…….”

“당연히 너희 아버님께는 엄청 기분 나쁜 말이겠지.”

“…….”

차하얀은 곧바로 흘러드는 한세계의 대답에 여러 번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에게는 누군가와 비밀을 공유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지금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솔직히 그 사실을 너희 아버님 말고 너희들까지도 알게 됐다는 걸 보면 진짜 솔직히 말하자면 너희 어머니가 조금 눈치가 많이 없어 보이긴 하네.”

“…….”

“어떤 아버지든 그 말을 들으면 다 화냈을걸? 특히나 너희 어머니와 너희를 사랑한다면 더더욱.”

“……왜요?”

처음으로 듣는 답이었고, 처음으로 묻는 질문이었다.

“……저를 사랑하는 데 이름이 왜 중요한가요? 차하얀은 되고, 차설하는 왜 안 되는 거예요?”

마음속 깊이 감춰두었던, 가족에게도 묻지 못했던 물음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커다란 바다가 아니니까.”

“커다란 바다가 아니라 아주 여러 색의 물줄기니까”

“아무리 너희에 대한 사랑이 깊고 넓어도 그 옆에 아내의 전남편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도 분명히 흐르고 있을 테니까.”

“그 누구도 오직 하나의 감정만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해.”

아주 조용한 과방에 천천히 울려 퍼지는 한세계의 목소리.

차하얀은 이불을 꼭― 쥐며 그 속삭임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병이라고 했던 거야, 처제.”

“…….”

“게다가 속으론 분명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밖으로 나오는 감정은 하나잖아.”

“아닌데요―? 저는 한세계 씨를 속으로도 저질이라 생각하고 밖으로도 저질이라 생각하는데요?”

“그래― 그렇게 솔직하게 반응하면 되잖아. 착한 척 그만하고.”

불쑥 튀어나온 반항심에 내뱉은 반문에도 태연하게 웃으며 반응하는 낮은 목소리.

차하얀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며 서둘러 다음 말을 이었다.

“막말로 제가 착한 척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게 왜 나쁜 거예요? 제가 조금만 참으면 더 좋은 상황이 이어질 텐데 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데요?”

“네가 무언갈 참고 있다는 건 언젠가 참지 못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니까.”

“…….”

“그렇게 참고 참았던 둑이 터지고, 네가 꾹꾹 눌러 담았던 무언가가 모두 쏟아졌을 때― 넌 아마 후회하게 될 거야.”

담담히 흘러드는 대답에 차하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도 널 이해하지 못할 거거든. 네가 얼마나 참았고, 얼마나 견뎠는지 아무도 모를 테니까.”

“사람들은 오히려 그렇게 참고 참았던 감정을 토해내는 너를 이상하게 볼 거야.”

“지금까지의 네가 진짜 너인 줄 알 테니까.”

차하얀은 이어지는 한세계의 말에 이불을 꽉― 쥐고 작게 속삭였다.

“다, 당신은…….”

“뭐라고?”

“하, 한세계 씨는 알아보셨잖아요!”

욱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살짝 높아진 언성.

이상하게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는 귓불을 느끼던 와중 가볍게 헛웃음을 내뱉는 한세계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내가 뭐 독심술사인 줄 아냐? 나도 설희한테 들은 말로 나름 짐작해서 말하는 거지.”

“…….”

“그래서 널 만나면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었어.”

그렇게 억지로 착한 아이로 남지 않아도 돼, 설하야.

“…….”

무언가 불안하다는 듯 쉴 새 없이 입술을 꾸물거리며 씹어대는 치아와 파르르― 떨리는 이불을 쥔 손.

“착하지 않다고 그게 곧 나쁘다는 말은 아니잖아. 아버님도 엄청 좋은 분이셨다며?”

“…….”

“그런데 몇 번 이름가지고 화내시고 고집부리셨다고 너희 아버님이 나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아.”

“착한 게 아니면 나쁜거다. 이런 식의 극단적인 생각은 버려. 착하게 안 살면 다 나쁘게 사는 건가?”

넌 그냥 너답게 살아가는 거야.

“나는 나대로, 설희는 설희대로, 너는―”

너대로.

……나답게 사는 것.

그 짧은 문장이 차하얀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말이었다.

“물론 네가 왜 그랬는지는 잘 알고 있어.”

“아버지가 다른 언니, 그 문제에 아주 민감하신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재혼하여 자신을 낳은 어머니.”

“이미 충분히 삐걱거리는 가정에 너까지 삐걱거리기는 싫었겠지.”

“너만 착한 아이로 남으면 화목한 가정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

“대게 흔들리는 가정을 눈치챈 아이는 조숙해지기 마련이니까.”

투둑― 투두둑― 투둑―

계속해서 창밖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쓰윽― 작게 또다시 울리는 이불과 살이 스치는 소리.

차하얀은 자신도 모르게 칸막이 쪽으로 조금 더 깊게 다가가며 열려있던 귓가를 더 활짝 열었다.

“그렇게 착한 딸, 착한 동생에서 착한 아이돌 멤버까지.”

점점 길고 잦아지는 연기.

본심을 숨기고, 자신이 좋든 싫든 그저 환하게 모두에게 내보이는 착한 미소.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착하다고 더 환하게 웃어주는 사람들.

가족, 언니, 하이퀸즈 멤버 언니들, 수많은 팬분들―

그렇게 가족에서 수많은 팬들에게까지.

“많이 힘들었겠다, 너도 참.”

“…….”

그 모든 사람들에게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들키지 않은 속마음을 너무나도 쉽게 꿰뚫어 본 사람.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을 착한 척이라 아무렇지 않게 매도하는 기분 나쁜 사람.

“그러다 다른 분들이 저를 싫어하시게 되면요?”

“…….”

“제 행동에 실망해서 저를 떠나게 되면 어떡해요?”

그렇기에 도리어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있던 불안을 꺼내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게 조금 문제긴 하지.”

“……뭐에요. 그럼 그냥―”

“그러니까 일종의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그리고 그 선을 넘으면 화낼 거라고 미리 알려주는 거지.”

“……선.”

“그리고 네 행동에 실망해서 떠나는 사람이라면 그건 소중한 사람이 아닌 거겠지.”

“…….”

“먼저 온전한 너를 되찾고 난 뒤에 소중한 사람들을 찾아.”

보이지 않는 선과 온전한 나…….

그리 읊조린 차하얀이 조심스레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런데 선을 넘으면 화낼 거라고 어떻게 미리 알려드리는 건가요?”

“뭐 특별할 게 있나? 그냥 그런 낌새가 보이면 말로 경고하는 거지. 당신 지금 내가 그은 선을 넘고 있다, 조심해라 등등의 뭐―”

아―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인 차하얀이 다시금 칸막이 너머를 응시했다.

“한세계 씨.”

“……왜?”

“당신 지금 경고에요. 자꾸 어린애 취급하고 계속 일부러 놀리는 거 제가 모를 줄 아셨나요? 당신 지금 선을 아주 많이 넘으셨어요.”

아주 엄중하게 낮춘 음색인데도 도리어 어이없다는 듯 한껏 터진 헛웃음이 칸막이 틈새로 흘러들어왔다.

“차설하, 너도 마찬가지야. 처제만 아니었어도 머리에 꿀밤을 열 대는 넘게 때렸을 텐데.”

“……뭐, 뭐라구요?”

“지금도 우리 잠 못 주무시는 처제님 말 상대나 해드리고 있는 거 보면 참―.”

“치― 말상대는 제가 해드리고 있는 거거든요?”

“아하― 그러세요? 그럼 저는 안타깝게도 말 상대는 전혀 필요 없으니 이제 제발 눈 좀 감아주실래요?”

뚝―

한세계의 비아냥에 서둘러 반문하려던 차하얀의 귓가에 들려오는 아주 미약한 소음.

뚝― 뚝― 뚝―

조금 더 주의를 집중한 그녀의 귓가에 그리 길지 않은 주기로 바닥을 두드리는 물방울 소리가 더 선명히 울려왔다.

“…….”

아무 말 없이 자신이 덮고 있는 이불과 칸막이를 여러 번 번갈아 응시하는 차하얀.

자꾸만 끝까지 벌리지 못하고 입술을 우물쭈물거리던 와중에 한세계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찾아왔다.

“몸 똑바로 돌리고.”

“…….”

건성건성 한 말투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칸막이를 보던 고개를 다시 천장으로 되돌렸다.

창문도 칸막이도 아닌 어렴풋한 어둠으로 가득 찬 과방의 천장.

“눈 감고.”

차하얀은 그 어둠을 바라보던 눈을 부드럽게 스르륵― 감았다.

어떤 좀비의 비명도, 어떤 좀비의 얼굴도 떠올려지지 않는 완벽한 어둠.

“……얼른 자.”

귀찮음 가득한 투로 던지듯 내뱉는 말에 이상하게 마음이 고요해진다.

투둑― 투둑― 투둑―

마치 수면을 돕듯이 그녀의 귓가를 두드려오는 빗소리와 차분해진 마음.

───────.

긴장과 공포로 한껏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천천히 푹신한 침대에 맞닿는 걸 느끼며―

그녀는 더 깊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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