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76화 (76/120)

착한 아이 (3)

초콜릿 바와 생수 한 병.

난 테이블 위에 마련된 아침 식사를 이어가는 차하얀을 조용히 응시했다.

깃을 세워 목 끝까지 지퍼를 잠근 검은색 트레이닝복.

과방 철제 사물함에서 건진 여분의 옷가지였다.

“…….”

아무런 쩝쩝거림 없이 얌전히 초콜릿 바를 꼭꼭 씹어먹는 차하얀.

새로운 옷이 생각보다 낯선 듯, 이리저리 작게 몸을 들썩이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바로 아래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소 착용감에 여유를 주는 트레이닝복인데도 유난히 둥글게 부각되는 트레이닝복 상의.

자신의 상의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옅은 홍조를 낀 얼굴로 창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 마르려면 훨씬 더 오랫동안 널어둬야 할걸?”

“…….”

“그래도 이제 나가야 하니까, 밥 다 먹고 저기 널어둔 원피스는 여기 가방 안에 집어넣어.”

“……네.”

식량과 식수가 들어있는 가방을 가리키는 손짓에 별말 없이 끄덕여오는 고개.

난 차하얀의 앙증맞은 입 안에 쏙― 사라지는 초콜릿 바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잘 먹네. 하나 더 줄까?”

“아, 아니요, 괜찮아요.”

차하얀이 초콜릿 바를 씹고 있는 입을 가리며 남은 손으로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초콜릿 바 하나론 조금 부족하지 않아?”

“아니요, 정말 괜찮아요. 원래 뭘 먹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이 정도만 먹어도 이미 충분히 배불러요.”

서둘러 변명을 이어가며 나에게 보란 듯이 배 위에서 작게 원을 그리는 그녀의 손짓.

다소 티가 너무 뻔하게 나는 그녀의 거짓말이었다.

조심스럽게 들고 있는 생수병을 옅게 들이킨 후 꼼꼼히 뚜껑을 닫아 테이블 위에 올리는 차하얀.

툭―!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난 자동처럼 튀어나오는 그녀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아침에 내가 쭉 확인해봤는데 이 근처에 남아있는 좀비는 없더라고.”

“…….”

“받아. 아이돌도 화장실은 가야지.”

“…….”

아무 말 없이 내가 내민 휴지를 바라보다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나는 차하얀.

난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휴지를 조심히 건네받는 순간 휴지를 잡고 있는 손에 작게 힘을 줬다.

“아― 나는 화장실 근처로 절대 안 갈 테니까, 혹시라도 발소리 같은 게 들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

“좀비나 발소리가 들리면 ‘형부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여러 번 외쳐. 그럼 내가 곧바로 달려갈 테니까.”

툭―!

내 말이 끝나자마자 쥐고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놓고 다시 자리에 앉는 차하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와 눈을 맞추자 차하얀이 나를 노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 화장실을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한세계 씨.”

“정말?”

“…….”

짧은 되물음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차하얀.

난 꽤 고분고분한 모습에서 다시 경멸 모드가 된 차하얀을 바라보며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뭐―. 다 큰 처제 화장실 가는 것까지 챙겨줄 수는 없지.”

“…….”

마치 증기가 뿜어질 것만 같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차하얀의 얼굴.

난 부끄러움 혹은 치욕스러움에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크게 손뼉을 쳤다.

짝―!

큰 박수 소리에 깜짝 놀라며 나를 응시하는 차하얀.

난 그녀를 향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화장실도 안 가겠다면 여기 더 있을 이유가 없잖아? 이제 슬슬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아까 말했던 원피스 챙기고 생수병도 다시 가방 안에 넣어.”

“……네.”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를 시작으로 부산하게 과방을 오가는 차하얀의 발소리.

난 테이블 위의 초콜릿 바 봉지와 생수병을 챙기고 창문 턱에 걸려있던 원피스를 가방 안에 집어넣는 차하얀을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살짝 볼록해진 가방의 지퍼를 꼼꼼히 채우고 내 가방과 의료 가방을 내게 내밀어오는 차하얀.

난 그 가방들을 인벤토리에 다시 수납한 뒤, 과방 벽에 기대어있던 쇠 파이프를 챙겨 들었다.

“……가자.”

과방 문을 가리키는 턱짓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차하얀.

끼이이익―!

다시 울려 퍼지는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두 명의 발소리가 여전히 어둑한 복도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 옥상 철문을 열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규칙적인 빗소리.

철퍽―!

난 밤새 내린 비로 곳곳이 웅덩이진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완전히 숙여진 자세로 양팔을 뒤로 모으고 옥상 철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뭐 하세요?”

내 자세에 기겁한 얼굴로 살짝 뒷걸음질 치는 차하얀.

난 ‘하아―.’ 그녀에게 들리도록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빗물에 젖어가는 얼굴을 건성으로 끄덕였다.

“그 설마가 맞으니까 얼른 와서 업히기나 해.”

“……가, 갑자기― 왜―.”

“그럼 어제처럼 얼굴이랑 허리 붙잡고 다시 납치라도 할까? 차설하 너도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 뭘 그렇게 놀란 표정을 하고 있냐.”

아― 시간 없으니까 투정 그만 부리고 일단 업히기나 해.

짜증을 한껏 담은 얼굴로 사납게 휘적거리며 가까이 오라 재촉하는 손짓.

“…….”

입술을 꾸물거리며 초 단위로 표정을 바꿔가며 고민하던 차하얀이 결국 옥상 철문을 넘어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철퍽―!

바로 등 뒤에서 울린 발소리와 멈칫멈칫거리며 내 등을 뒤덮어오는 넓은 촉감.

“…….”

마지막으로 어깨 근처의 등을 포근히 감싸오는 몽실몽실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무언으로 감탄을 흘려보냈다.

조심스레 내 목을 교차하는 그녀의 팔과 허리쯤으로 당겨오는 다리.

난 슬슬 차하얀이 자세를 잡은 듯하여 왼손으로 그녀를 지탱하며 꿇고 있던 무릎을 다시 위로 들어 올렸다.

“꺄, 꺄아악―!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엉덩이 말고 허벅지잖아, 허벅지.”

거의 발광을 하며 깜짝 놀란 몸을 뒤흔드는 차하얀.

난 서둘러 그녀의 몸을 한 번 더 크게 들썩이며 업은 자세를 안정시켰다.

“그렇게 엉덩이랑 허벅지 만져지기 싫으면 차설하 네가 알아서 자세를 잘 유지하면 되잖아.”

“……으으―”

“다리로 허리 꽉 붙잡고―, 허리 일부러 쭉 펴지 말고 등에 딱 붙이고―, 양팔로 목 교차해서 꼭 붙잡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내가 말하는 과정을 착실히 이행하는 차하얀.

난 일부러 허리를 쭉 펴고 있던 차하얀이 완전히 내 등에 달라붙는 부드러운 온기를 느끼며 그녀의 허벅지를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렇게 힘을 풀어도 제법 자세가 유지되는 안정된 상태.

“지금 이게 절대 장난이나 시시덕거리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해, 차설하.”

“…….”

“네가 내게서 떨어지는 순간, 나도 어떻게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어.”

“…….”

“만약 그런 순간이 오면 내가 너희 언니 얼굴을 어떻게 보게 하려고 지금 이런 투정을 부리냐, 차설하.”

처음으로 아주 차갑게 그녀에게 쏘아대는 저음의 목소리.

계속해서 앓는 소리를 내던 그녀의 입이 꾹 다물어진 것을 조용히 확인했다.

천천히 내 목을 교차한 양팔을 더 강하게 움켜잡는 그녀의 손짓을 느끼며 옥상 바닥에 발걸음을 이어갔다.

철퍽―! 철퍽―!

가볍게 내디디는 발걸음에 사방으로 비산하는 물웅덩이들.

겨우 말랐던 바지 밑단이 다시 물기로 젖어갔다.

턱―!

가벼운 뜀박질에 단숨에 올라온 옥상 난간.

난 꽤나 아찔함 거리감을 토해내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이 거리감을 함께 느끼고 있을 그녀에게 읊조렸다.

“더 꽉 잡아.”

쐐애애애액―!

“으읍―!”

허공에 내디디는 발걸음을 통해 온몸을 휘감는 선명한 부유감과 사나운 바람.

난 황급히 입을 다물며 내 몸에 매미처럼 달라붙는 차하얀을 느끼며 차분히 아래를 응시했다.

쿠웅―!

옥상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기엔 조금은 소박한 착지음.

“으흑―!”

난 도리어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차하얀의 반응을 느끼며 질주를 재개했다.

쐐애애액―!

전력을 다하지 않고 아주 최대한 힘 조절을 마친 빠른 달리기.

난 농과대를 목표로 빠르게 돌파했던 산책로와 도로를 천천히 되집으며 반석교회를 향해 이동했다.

투두두둑―!

또다시 차하얀과 나를 흠뻑 적시는 예외 없는 빗줄기.

난 점점 가까워지는 반석교회와 그곳에 아른거리는 검은 띠를 확인한 뒤 조금 더 속도를 줄였다.

더 느리게 줄어드는 속도에 내 어깨에 파묻었던 얼굴을 조심스레 들어오는 차하얀.

그녀가 고개를 들어 앞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교회 주변에 뭉쳐있던 좀비들의 고개도 함께 돌아갔다.

“끼에에에에엑―!”

한순간에 빗소리를 잡아삼키며 주위로 뻗어나가는 사나운 포효.

난 벌룬이 두 번 터졌던 때보다 오히려 더 불어난 듯한 놈들의 파도를 차분히 훑어보았다.

전보다 더 진한 검은 띠로 대학 북측과 남측을 가르는 시체들의 경계선.

“…….”

난 허벅지를 만졌을 때보다 도리어 얌전한 그녀의 반응에 업은 자세를 한 번 더 추슬렀다.

내 추스름에 아무 말 없이 더 꽉 내 몸을 조이는 그녀의 팔과 다리.

난 슬슬 숨이 막힐 정도로 내 목을 둘러싸고 달달달― 떨고있는 그녀의 진동을 확인했다.

“끼에에에에엑―!”

가까이 다가오는 먹잇감에 환영하다 못해 미쳐버리기 직전인 좀비들의 돌진.

두두두두두―!

점점 더 선명히 다가오는 땅울림을 여실히 느끼며 툭―! 툭―! 가볍게 뒷걸음질 쳤다.

“정신 차려, 차설하!”

빗소리와 놈들의 포효만이 더럽게 섞여 있던 대기를 뚫는 고함.

난 깜짝 놀란 듯 내 목을 더 세게 조이는 차하얀을 느끼며 다급한 목소리로 고함질렀다.

“앞을 똑바로 쳐다봐! 주변에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 같은 거 보여?!”

“…….”

퍼억―!

그녀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다가온 좀비의 머리를 깨부수는 쇠 파이프.

푸확―! 크게 튄 검붉은 핏물이 얼굴을 세차게 두드리는 걸 느끼면서도 다시 그녀를 재촉했다.

“정신 차리라고, 차설하! 빈 곳―! 빈 곳을 찾아―! 뚫을 수 있을 만한 곳―!”

“끼에에에엑―!”

퍼억―!

내게 순식간에 뜀박질한 놈의 대가리를 내려치는 둔기질.

난 놈들을 유인하듯 얄밉게 뒷걸음질 치며 그녀를 계속해서 닦달했다.

“정신 차리라고, 차설하! 눈 떠어―!”

그녀는 지금 이 광경을 두 눈으로 봐야 했다.

공포를 느끼고,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며, 온몸에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차설하―! 들리면 대답해―! 차설하―!”

“……네, 네에!”

“차설하―! 빨리 정신―”

아주 다급히 고래고래 소리치면서도 차분히 놈들의 파도를 훑어보던 와중―

투웅―!

기다렸던 소리가 나를 표적으로 조용히 흘러든다.

표적에 도달하기까지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을 모조리 꿰뚫으며 치닫는 흉악한 돌덩어리.

툭―!

허나, 기습이 아닌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극적인 투척은 그리 위협적인 공격이 아니었다.

크게 몸을 옆으로 이동하는 뜀박질에 뒤늦게 볼에 스며드는 날카로운 바람.

쿠우우웅―!

끝내 표적이 아닌 엉뚱한 벽을 폭격하는 굉음에 차하얀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는 몸짓이 선명히 느껴진다.

돌덩어리가 만들었다기엔 지나치게 살벌한 균열에 저도 모르게 더 격하게 몸을 떨어대는 차하얀.

“켁―! 케에엑―! 켁켁―! 켁―!”

고마움의 표시로 내보인 미소에 가래충이 거북목을 더 깊게 숙이며 서둘러 아가리에 돌덩어리를 모아갔다.

“차설하―! 주변에 빠져나갈 곳이 보이냐고―!”

“……어, 없는― 없는 것 같아요, 한세계 씨―!”

“확실해―?! 진짜 없어―?!”

“어― 어― 어어어― 뒤― 한세계 씨 뒤이이―!”

“끼에에에엑―!”

세상 다급하게 내게 소리치는 차하얀과 어느새 등 뒤에서도 다가오는 좀비들의 하울링.

난 적절한 순간에 몸을 회전시켜 등 뒤를 기습하려던 좀비의 대가리를 깨부쉈다.

그리곤 큼지막하게 휙― 휙― 뒤로 물러서며 주변을 살피기 위해 몸을 빠르게 돌려댔다.

“끼에에에에엑―!”

경이로울 만큼 무수한 숫자로 우리에게 달려오는 좀비 웨이브.

난 마치 감독이 든 카메라마냥 그녀를 움직여 그 공포를 그대로 전해줬다.

조금만 방심하면 그대로 파도에 깔릴 것만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

당연히 돌파하지 못하고 다시 예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합당한 이유.

“하아아― 이 씨이발―!”

“…….”

마지막으로 거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완전히 북쪽으로 내돌렸다.

쿠우우웅―!

빠르게 옆으로 튼 몸을 지나쳐 가로수를 박살 내는 돌덩어리.

가로수를 아주 깊숙이 관통한 돌덩어리에 큼지막한 가로수가 기우뚱― 흔들리며 나뭇잎이 모아뒀던 물방울들을 모조리 토해냈다.

투두두두둑―!

난 살짝 고개를 돌려 다시 열심히 가래를 모으기 시작한 변종을 훑어본 뒤 크게 바닥을 박찼다.

쐐애애애액―!

“끼에에에에엑―!”

그날과 똑같이 점점 멀어지는 내게 애타게 손을 뻗어오는 좀비들.

난 놈들의 부름을 무시하며 그날과 똑같은 목적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철퍽―!

다소 투박한 착지에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

“…….”

분명 그 물방울들을 흠뻑 뒤집어썼을 차하얀은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툭―!

이미 물기로 흠뻑 젖은 무릎에 더 스며드는 물기와 함께 다시 낮춰진 자세.

그녀를 바닥에 놓아준 뒤 빠르게 돌아본 차하얀이 그대로 몸을 휘청이는 모습에 서둘러 손을 뻗었다.

“……아.”

내 손짓에 붙잡혀 중심을 되찾는 차하얀.

평소보다 더 큼지막한 눈과 옥상 바닥이 아닌 조금 더 먼 곳을 보는 흐릿한 동공.

빗물이 주는 추위 때문인지, 아직 해소하지 못한 공포 때문인지 잡힌 손길을 통해 선명히 다가오는 떨림.

“……괜찮아?”

내 물음에 먼 곳에서 다시 가까운 곳으로 돌아온 그녀의 동공이 내 눈을 마주했다.

“바, 방금 그건……?”

“뭐야―, 좀비 새끼들 처음 봐?”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 그렇게 많은 좀비들은 처음…….”

여전히 얼이 빠진 목소리로 가녀리게 중얼거리는 차하얀.

“처, 첫날의 농과대에서도 저 정도의 좀비들은 없었는데― 저건― 저건 정말― 정말 너무 많잖아요―.”

“……내가 지나쳤을 때보다 더 불어나긴 했더라.”

“네에에―?! 지, 지나치셨다고요―?!”

작게 읊조린 말을 덥석 물어 챈 차하얀이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그럼― 내가 뭐 동네 산책이라도 하면서 온 줄 알았어?”

“그, 그럼 저곳 말고 다른 곳으로―”

“불가능해. 내가 지나칠 때도 좀 질릴 정도로 긴 띠 형식으로 남측과 북측을 가르고 있었거든.”

그런 설정이다.

며칠동안 우리를 둘러쌀 상황은.

내 단언에 더 크게 눈을 치켜뜬 차하얀이 한 발자국 내게 더 다가오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위험해요―! 이, 이러지 말고 차라리 지금이라도 농과대 캠프원분들에게―”

“그만해.”

내 손을 꼭 붙잡고 농과대 쪽을 번갈아보던 그녀의 말을 바로 끊어냈다.

“그 이야기는 이미 다 끝났잖아.”

“…….”

이 무대에 더는 새로운 출연자는 없다.

한정된 공간, 한정된 사람.

그리고 흔들다리처럼 흔들리는 수많은 감정들.

난 단호한 얼굴로 옥상 철문을 가리켰다.

“일단 다시 비부터 피하자, 설하야.”

“…….”

“내일은 교회 쪽 말고 다른 쪽으로 시도해봐야겠네.”

툭―!

그녀의 등허리를 붙잡고 부드럽게 밀어대는 손짓에 차하얀이 그대로 앞을 향해 걸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등허리에 얹어진 손을 통해 전달되는 여전한 진동.

그런 위기 상황에서 몸이 파르르― 떨리고, 심장이 터질 듯 빨리 뛰고, 숨이 가빠져 오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몸은 그저 기계적인 반응을 계속해서 내뱉을 뿐이고―

그걸 정의해야 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뿐이다.

끼이이익―!

다시 활짝 열려오는 옥상의 철문.

난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등허리에 얹은 엄지로 부드럽게 허리를 쓸어내리며 자그맣게 웃었다.

그렇기에 감정이라는 건 쉽사리 혼동하기 쉽다.

감정이라는 건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쉽게 조작이 가능한 관념이다.

뚜벅― 뚜벅―

파들파들 떨며 계단을 내려서는 그녀를 안심시키듯 계속해서 토닥이는 손길.

그녀는 그녀를 처음 업었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무반응으로 열심히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아마 아직도 좀비 웨이브를 대면한 공포가 해소되지 못한 거겠지.

계속해서 온전히 해소하지 못할 공포라는 감정.

그 긴박하고 뜨거운 감정의 찌꺼기는 여전히 공포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었다.

그 감정의 이름을 정하는 건 오직 그 감정을 가진 본인뿐이니까.

그러니 나는 계속해서 반복하면 되는 것이다.

그녀가 그 찌꺼기를 다른 감정이라 스스로 생각할 때까지.

“들어가면 다시 옷부터 벗어. 그 옷도 이미 다 젖었네.”

“…….”

착한 아이라도 절대로 헷갈리지 않을 감정으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