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 폭군-75화 (75/120)

착한 아이 (2)

“그거 병이야, 처제.”

툭― 던진 말에 의자에 허리를 쭉 펴고 앉아있던 차하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왔다.

끼익―!

그녀가 먼지를 털어준 의자에 갑작스레 더해지는 체중.

옅은 삐걱거림이 새어 나오는 것에 아랑곳 않고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댔다.

“그거 병이라고.”

난 극과 극의 자세로 의자에 앉은 차하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모든 사람들한테 동글동글하게 대하려는 거, 그거 병이야.”

“……제가 어느 부분에서 동글동글하게 행동했는데요?”

끼익―!

자로 잰 듯한 정자세를 유지하는 그녀에게 강조하듯 더 깊게 의자에 기대는 허리.

자연히 내 의자를 바라보던 차하얀이 이어지는 내 눈길을 따라 자신이 들고 있는 의료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동글동글한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예의예요.”

“그러니까―”

이미 한껏 차가워진 표정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새어 나오는 헛웃음에 더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 기본적인 예의를 납치범에게까지 차리는 미친놈이 어딨어?”

“…….”

꾹 다문 입술과 가히 무표정에 가까운 그녀의 얼굴.

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르게 날선 그녀의 반응을 확인하며 대놓고 그녀를 향해 잔웃음을 실실― 흘려댔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갑자기?”

“성함이 어떻게 되시냐구요.”

“한세계.”

“……그래요, 한세계 씨.”

차하얀이 작게 끄덕이곤 오히려 허리를 더 쭉 펴며 나와 눈을 맞췄다.

“한세계 씨 같이 기본적인 예의가 없으신 분들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거겠죠? 뭐 눈에는 뭐만 보이듯이.”

“…….”

그 모습이 가시를 한껏 세우고 하악질하는 고슴도치가 따로 없었다.

난 그녀를 향해 아무 말 없이 눈썹과 어깨를 한 번에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모습에 더 진하게 나를 노려보는 차하얀.

“그런데 진짜 이름은 갑자기 왜 물어봤던 거야? 이미 세글자보다 더 부르기 편한 두 글자 이름을 알고 있잖아, 처제?”

“……그건 정말 꿈도 꾸지 마세요, 한세계 씨.”

“한세계 씨, 한세계 씨~ 납치범한테 아주 성함이 어떻게 되시냐~ 정중함이란 정중함은 다 끌어 쓰면서 기본적인 예의다~ 자기는 동글동글하지 않다~ 아주 착한 척이란 착한 척은 지가 다하고 있네.”

건들건들― 정신 사납게 흔들리는 다리와 함께 그녀의 귓가에 분명히 박혀갔을 영혼을 담은 비아냥.

의료 가방을 꾹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게 아주 선명히 동공에 맺혀온다.

“……지금도 충분히 혐오감을 담아서 말하는 거예요. 한. 세. 계. 씨.”

무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내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씩 끊어 내뱉는 차하얀.

끼익―! 끼익―!

난 계속해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풀고, 기댔다 푸는 건들거리는 자세로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러니까 지금 결론을 말하자면, 이미 이름을 부르는 걸로 처제가 형부를 욕하고 있었다는 말이네?”

드르륵―!

난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의자를 밀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럼 형부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겠는데?”

“…….”

아까의 분노는 어디 가고 갑작스레 다가온 나를 바라보며 얼음처럼 굳어있는 차하얀.

난 파르르― 떨리는 동공만 열심히 움직이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다시 한번 잔웃음을 흘려댔다.

“안 그래요, 차설하 씨?”

“……이름이 될 뻔 했던 거지, 그게 제 이름은 아니에요.”

“그러니까요. 저도 한세계 말고 당신이 불러줬으면 하는 다른 이름이 있거든요.”

“…….”

아주 고집 넘치게 끝까지 꾹― 다물고 있는 분홍빛 입술.

뚝―! 뚝―!

난 서로가 고집을 피우는 적막 속에 유일하게 과방 안에 울려 퍼지는 소음을 쫓았다.

차하얀과 내가 앉아있는 의자 밑에 어느덧 웅덩이진 물기들.

난 그제서야 그녀의 몸에 착― 달라붙어 온기를 빼앗는 옷가지와 미세하게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몸을 조용히 훑어내렸다.

드르륵―!

“일단 입고 있는 옷부터 벗어.”

의자를 다시 뒤로 끌어당긴 뒤, 자리에서 일어나 철제 사물함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끄드득―! 끄드득―!

사물함 안에 든 잡동사니들을 뒤적거리며 여전히 아무런 소음도 내뱉지 않는 차하얀 쪽을 눈짓했다.

“뭐해? 그대로 있다간 진짜 감기 걸린다.”

“……괜찮아요. 이 안에 감기약도 있어요.”

들고 있던 의료 가방을 내게 내보이는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 얼굴.

난 철제 사물함을 뒤지기 위해 이미 한껏 멀어진 거리에도 드륵― 작게 뒤로 물러서는 차하얀을 응시하며 헛웃음을 머금었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

“야, 차설하.”

“전 차설하가 아니라 차하얀이에요. 그리고 정말 괜찮다니까요.”

봐요― 전혀 아무렇지도 않고, 아직 약도 많이 있어요.

다시 한번 의료 가방을 내보이며 허리를 쭉 펴는 차하얀.

난 아무렇지 않으려 필사적인 그녀의 얼굴에 슬슬 퍼렇게 질려가는 입술을 바라보며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아―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에 차하얀이 작게 어깨를 떨었다.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차설하.”

“…….”

“내가 네 언니 남편이라고 그렇게 주구장창 말했는데 지금까지 뭘 들었냐고, 진짜. 그리고 만약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저질러도 진작 저질렀겠지, 내가 너랑 이렇게 말씨름이나 하고 있었겠냐고.”

“…….”

“그걸 알고 있으면서 계속 묘하게 투정을 부리네.”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게 아니라 저는 정말로 괜찮―”

엣취―!

그녀의 말을 끊으며 세차게 튀어나오는 선명한 기침 소리.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연신 헛웃음을 토해내는 나를 보며 새빨간 홍조가 든 차하얀이 서둘러 의료 가방을 내보였다.

“약……. 해열제랑 감기약― 이 안에 있어요.”

“그래― 낯선 남자 앞에서 부끄러울 수 있지.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게다가 약까지 있으니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안 일어날 테지.”

그런데―

난 끝말을 길게 늘이며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차하얀을 마주했다.

“네 말을 정리해보자면 잠깐의 부끄러움 때문에 쓰지 않아도 될 약을 쓰겠다는 말이잖아. 해결책이 있는데 그걸 안 쓰고 약을 낭비하겠다는 말이네.”

……허!

감정을 제법 많이 실은 헛웃음에 그녀가 찔린 듯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그러니까 분명히 아까 뭔 당신의 불필요한 행동에 아무 죄 없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설교하시던 분이 지금 이 고집을 피우고 있는 거 맞죠?”

“…….”

“농담이 아니라 아까 그분은 차하얀 씨고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은 차설하 씨인 건 아니죠, 그죠?”

“…….”

난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아무 말도 내뱉지 않는 그녀에게 칸막이 너머의 간이침대를 가리켰다.

“그러니 지금 당장 입고 있는 옷 벗고, 가방 안에 있는 수건 털어서 몸에 남아있는 물기 닦고, 침대 위에 있는 이불 덮어서 몸이나 데워.”

“…….”

“이거 무슨 처제를 데리러 왔는데 웬 큼지막한 어린애가 있네.”

마지막 투덜거림이 결정타였는지, 무언가 불만 어린 얼굴로 입술을 꾸물거리던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난 간이침대가 있는 칸막이로 드디어 걸어가는 그녀를 일별한 뒤 다시 철제사물함을 뒤졌다.

……사물함 말고 다른 곳에 있으려나?

난 활짝 열린 철제사물함들을 쭈욱 훑어본 뒤 조금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아주 다행스럽게도 구비되어 있는 스탠드형 옷걸이.

그 스탠드형 옷걸이에 걸려있는 기본 철사 옷걸이를 빼내던 중― 갑작스런 소음에 고개를 돌렸다.

드르륵― 드르르륵―

테이블을 둘러싼 의자 중 몇 개를 칸막이 근처로 끌고 가는 차하얀.

그렇게 의자와 칸막이를 연결해 인공적인 차단선을 만드는데 열심히 던 그녀를 호명했다.

“야, 차설하.”

“…….”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차하얀을 향해 내미는 철사 옷걸이.

드르륵―

서둘러 의자 차단선을 헤치며 다가온 차하얀이 철사 옷걸이를 건네받은 뒤 쭈뼛쭈뼛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와아― 있는 고집, 없는 고집 다 부리다가 이제 다시 착한 척하네, 대단하다 우리 설하.”

“……안 감사합니다, 한세계 씨.”

“천만에요, 차설하 씨.”

활짝 웃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서는 차하얀.

난 나를 노려보며 의자 차단선을 정성스레 가다듬고 칸막이 뒤로 사라지는 그녀를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스르륵― 스르륵― 거리며 조용히 흘러드는 면과 살이 스치는 소리.

“……드, 듣지 마세요―!”

“와― 슬슬 진짜 짜증 나려 하네. 내가 처제가 지금 한 짓들 설희한테 다 일러바칠 거야.”

“저, 저는 뭐― 일러바칠 거 없는 줄 아세요?! 제가 먼저 일러바칠 거예요!”

“그래― 차라리 그렇게 화라도 내면서 빨리 다 벗어줘, 제발. 괜히 생사람 잡지 말고.”

“……지, 진짜― 진짜 재, 재수 없게 말하시네요, 한세계 씨.”

“어― 고마워요, 설하 씨. 그런 말 평소에도 많이 들었어요.”

“……이이익―!”

장난스런 잡담이 오가는 와중에도 조용히 흘러드는 칸막이 너머의 인기척.

난 창문 사이의 작은 턱에 철사 옷걸이가 걸리는 듯한 소음에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속옷도 다 벗었어?”

“무, 무,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그, 그걸 한세계 씨가 왜 물어보세요?!”

“아니― 혹시나 어중간하게 벗었다가 감기도 어중간하게 걸리면 그것보다 어이없는 일도 없잖아? 벗을 거면 깔끔하게 다 벗으라고.”

“……다, 다 벗었으니까― 마, 말 걸지 말아주세요!”

허나, 그녀의 끝말관 다르게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가득해지는 칸막이 너머.

난 다시 옷걸이가 창문 턱에 걸리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다음 말을 이었다.

“가방 안에 있는 수건으로 몸에 남아있는 물기들 다 닦았어?”

“……제, 제가 알아서 하니까 말 걸지 말아달라니깐요!”

“의자 닦는다고 묻었던 먼지들은 다 털고 닦은 거지?”

“…….”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흘러드는 수건 터는 소리.

참지 못하고 크게 내뱉은 웃음소리에 수건 터는 소리가 더 격하게 울려 퍼졌다.

“그 간이침대 위에 이불은 있어?”

“……있어요. 이제 진짜 말 걸지 말아주세요. 저 혼자서도 다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마저 들어. 그 이불 꼼꼼히 덮고 침대에 누웠어?”

“……네, 누웠어요.”

“그래.”

그녀가 보지 못할 끄덕거림을 끝으로 마무리된 대화.

끼익―!

난 편하게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대며 창밖을 조용히 응시했다.

───────.

기나긴 적막 동안 홀로 창밖을 쉴 새 없이 두드리는 빗방울.

난 어느새 밤이 되어 완전히 어둑해진 창밖을 바라보며 내일을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은 지금의 비.

아침부터 시작해 늦은 밤까지 계속해서 내렸는데도 빗줄기가 전혀 옅어지지 않았다.

‘……이른 장마인가?’

초여름이라면, 초여름이라 할 수 있지만 왠지 모르게 애매한 시기에 시작된 장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시간을 되짚어보던 나는 자연스레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에는 좀비가 있어서 좀비가 튀어나왔나.

그렇게 과거를 반추하며 미래를 예상하기엔, 너무 크게 뒤틀려버린 세상이었다.

“……한세계 씨.”

아주 오랜 침묵을 깨고 스며드는 그녀의 미성.

쉴 새 없이 이불을 뒤척이는 소리 덕에 잠에 들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게 말을 거는 건 뜻밖이었다.

“왜.”

“……그래서― 내일 계획이 어떻게 되는데요?”

“계획이라 할만한 거창한 건 없는데. 그냥 최대한 빠르게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럼 여기 있을 시간에 차라리 빨리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럴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그렇게 했겠지.

난 대답 없이 창밖 너머의 반석교회 쪽을 응시하다 천천히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내일 아침이면 내가 왜 그랬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잠이나 자세요, 차설하 씨.”

뚝―! 뚝―!

또다시 침묵에 휩싸인 과방 안에 초침처럼 흘러드는 나지막한 두드림.

난 어느새 물기를 다 토해냈는지 슬슬 주기가 길어지고 있는 옷 끝단의 물방울들을 내려다보며 툭―! 옷을 한 번 크게 털었다.

“……괘, 괜찮으세요?”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한 그녀의 물음.

“한세계 씨도 엄청 많이 젖으셨잖아요……. 아, 안 추우세요?”

“왜―? 내가 춥다고 하면 공간이라도 좀 내줄 거야?”

“……진짜 사람 자체가 저질이시네요, 한세계 씨.”

조금 전의 물음엔 확실히 들어있었던 걱정 대신 들어찬 경멸.

난 차게 식은 그녀의 말에 잔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난 너처럼 미련하지가 않아서, 추웠으면 알아서 네 이불이라도 뺏었을 테니까 얼른 잠이나 자세요, 차설하 씨.”

“지, 진짜 이러고 내일 감기 걸려서 끙끙대시는 거 아니죠?”

“……얼른 자.”

축객령처럼 이어질 대화를 뚝― 끊어내는 짧은 문장.

난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녀의 뒤척임을 들으며 조용히 침묵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끊긴 이불 부스럭거리는 소리.

투두두두둑―!

난 여전히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젠 고른 숨소리만 들려오는 칸막이를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그녀가 빨리 잠을 못 이룬 이유가 나에 대한 걱정 때문이든,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 때문이든―

그녀가 저 잠자리에 익숙해지길 바랬다.

“…….”

아직.

도서관에 돌아가기 전에 해야 할 일과 나눠야 할 말들이 너무나도 많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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